|
안셀무스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하여
I. 안셀무스
안셀무스의 유명한 명제로 돌아가 봅시다.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
안셀무스는 스콜라주의를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낸 사람이자, 그의 신 존재 증명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안셀무스에게서 신앙과 전통은 상호 균형을 이루면서 함께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이 전통에 우위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에게서 신앙은 전통에 대한 참여였습니다. 전통 즉 과거의 신앙의 교부들이 해석한 전통에 참여한 것인데, 이 때 그는 반드시 이성에 의한 참여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즉 전통을 스스로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이성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경험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경험은 주관적 경험(종교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경험을 객관적 경험성 즉 성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성서를 읽고 그것을 새기는 것이 바로 경험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 이후에 인식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전통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지식화한 것입니다. 유사한 예를 들어 봅시다.
(예시) 자연과학자 내지 수학자들은 그들이 연구하는 대상과 합일되어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연구 대상에 참여하고 있고, 그것을 경험한다. 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연적 실재를 바라볼 수 있는 수학적 구조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그들은 자연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인식바탕은 경험에서 나타나고, 그 경험에서 얻은 인식을 가지고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구조와 운동에 대해서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질서를 세우고,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셀무스의 전통과 이성에 대한 이해도 같습니다. 안셀무스는 전통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참여, 즉 경험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객관적 경험을 통해서 인식이 생기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전통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인식은 주관적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이야기 되는 성서와 이를 통한 자의적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경험이 객관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객관적 경험에서는 객관적 인식이 도출되고, 그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전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하는 삶이고, 안셀무스는 그렇기에 알기 위해 믿는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객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계성을 확립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System Theology 즉 조직신학입니다. 이 인식은 일관성을 가져야 하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도구적 이성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도구적 이성을 통해서 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이 직접 우리에게 주관적 현존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말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곳에서의 이성은 객관적 경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도구적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성의 역할이 없다면 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안셀무스는 인간 이성의 역할이 신앙과 균형 있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II.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
이제 본격적으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크게 두 가지 증명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합니다. 우주론적 증명은 모놀로기아(Monologia)에 등장하고, 존재론적 증명은 프로스로기온(Proslogion)에 등장합니다.
1. 우주론적 증명
사실 우주론적 증명의 경우에는 뒤이어 등장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이 오히려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론적 증명은 대체로 연역적 상승을 통해서 신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점에서 안셀무스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증명의 내용을 봅시다.
(증명) 세상에는 선한 것, 참된 것, 위대한 것, ... 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렇게 규정짓게 할 수 있는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 무조건적으로 참된 것, 무조건적으로 위대한 것, ... 등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선, 무조건적인 참됨, 무조건적인 위대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신이다.
이 증명에서 나타나는 증명이 조악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아마 그 점에서 오히려 제일원인론이 더 타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증명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조명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즉 유한자적 성격을 규명하는 것에는 타당한 것이다. 오히려 이 증명은 신의 실존보다는 유한성이 무한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관계성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조건적인 것 즉 유한한 것에 의해서 무한한 것이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 의해서 드러난다라는 것인데, 조건이 무조건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신은 인간이 없어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덧붙여서 우주론적 증명의 마지막 한계점은 연역적 증명의 끝에 반드시 신의 존재가 연결되는 경우에만 한정지어서 증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신-세계, 인간의 관계가 신으로 이어지는 연역적 고리가 아닌 형태라면 그 증명은 입장이 매우 어려워진다.
2. 존재론적 증명
자, 다른 증명으로 넘어가보자. 우주론적 증명은 아퀴나스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안셀무스에게는 존재론적 증명이 보다 유명하다. 이것은 그의 증명이 등장한 이후 여러 철학자들이 그의 증명에 대한 평을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안셀무스의 증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 등이었다. 이른바 합리주의 전통 속에서 인간을 바라본 사람들이다. 이와 반대로 안셀무스의 증명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퀴나스나 칸트는 대표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경험론의 틀에서 인간을 바라본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증명을 했기에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까. 증명으로 넘어가보자.
(증명)
① 전제 / 신 = 그것보다 더 큰 것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이고, 그는 사고 속에 존재한다.
② 어리석은 자들아 이해할 수 있느냐? (그 순간 X를 사고한다.)
③ X’(X+실재성)를 사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귀류법에 따라서 전제를 부정하게 된다.
④ 그러므로 전제를 부정하면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⑤ 따라서 신은 실재성을 가지고 사고 밖에 존재한다.
(감추어진 전제)
① 어리석은 자들(무신론자) 역시도 신의 개념과 무조건적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관념이 있다.
② 무조건적 신의 관념은 인간의 지성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
③ 지성의 안 보다는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보다 높은 존재형식을 갖는 것이다.
④ 높은 존재형식을 갖는 것은 신으로의 귀속을 의미한다. (위계적 존재질서)
증명이 이해되는가? 아마 처음 보는 증명인 경우에는 이해하기 워낙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어려워한 경우가 많았고, 그걸 이해한 경우에도 많은 반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반박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반박1) ‘완전한 섬’의 반박이다. 이것은 당시뿐 아니라 칸트도 비슷하게 공격한 것인데, 이른바 이행의 도약이라는 것이다. 사고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실재한다고 실재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마치 우리의 지갑 속에 10만원이 들어있다라고 사고할 때, 그것의 실재성을 갖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 아닌가? 자, 모두 10만원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모두 지갑을 보자. 10만원이 들어있는가? 배신감까지 드는 것이다. 물론 안셀무스는 이것에 대해서 우연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증명을 방어한다. 그것은 X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증명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연적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연적 존재는 있음 또는 없음 즉 완전한 섬이라는 것은 ‘가능한’ 완전한 섬이고, 그것은 실재성을 가질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필연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만 이 증명이 성립될 수 있다.
반박2) 두 번째는 신의 정의(definition)를 말하고자 한다. 신은 왜 X라고 하여야 하나? 신의 정의에 대한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신은 이러한 신 이해하고는 다른 부분이 많다.
반박3) 세 번째로는 X와 X’간의 크기라는 기준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느냐라는 부분이다. 실재성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중에서 실재성이 있는 것이 더 크다라고 확신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 부분이 문제로서 지적되고 있다.
반박4) 개인적으로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필연성에 근거한 존재증명이라는 것이다. 필연적이기에 존재한다라는 것인데, 플라톤적 사고방식의 귀결로서 판단하고 있다. 만약 신관(神觀)이 플라톤적 신관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이 증명은 상당히 위태롭지 않을까 한다. 부동의 동자이면서 일자로서의 신 개념이 흔들리는 때에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합치로서의 진리의 개념 역시 위태롭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두 문장만 확인하자.
인간은 유한적이나 무조건적인 것을 내포한다. - 데카르트, 헤겔 전통
실존은 개념(사고)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 칸트 전통
(보론) III.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과 객관성에 대한 추구 (사견, 마무리 지으면서)
1. 들어가면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어떠한 맥락에서 신 존재 증명에 대해서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상사적 맥락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신플라톤주의적 위계질서를 갖는 세계관이다.
둘째, 보편주의에 뿌리를 둔 신의 속성이다.
셋째, 스콜라주의에 뿌리를 둔 이성이다.
넷째, 진리에 대한 정의(Definition, 定意)이다.
바로 이 네 가지 논점을 가지고 중세 신 존재 증명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가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시작하면서 물음을 던져보자. 고대로부터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기도 했다.
과연 신은 무엇인가?(What?)
2. 신플라톤주의적 위계질서로서의 세계관에서의 신
신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둔 중세의 기본 전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세워진 경우가 많다. 기본적인 신플라톤주의의 이해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탁월했으며, 그가 일정부분 수정한 사항이 반영된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사상사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적 그리스도교 사고관 내에서 神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에 비유할 만한 것일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비유’할 만 하다는 것이지 그것이 부합한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어찌되었건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사실상 중건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신의 표상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할 수밖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일자(一者)의 개념이 신에게 투영되어 있는데다가, 신정(神正)의 개념을 지향하는 바, 일자는 반드시 성(聖), 미(美), 선(善), 진(眞)의 속성을 갖게 된다. 이와 반대로 질료라는 것은 이 위계질서상의 최하위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전혀 형상이 없는 것으로서 속(俗), 추(醜), 악(惡), 위(僞)한 것이다! 그러한 사고틀 속에서 신은 가장 높고, 가장 크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신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진정한 것이다. (일면 가장 ‘구속’ 된 것이기도 하다. 不動의 動者. 의지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神은 아우구스티누스 신론의 특성이기도 하다.)
3. 실념론으로서의 신
자, 그러한 신의 개념에서 이것을 중세 실념론으로 이관시켜보자. 실념론의 핵심은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보편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념론에서의 神은 보편존재로서 있다. 이것은 당시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기도 한데, 일신(一神)의 개념 하에서 삼위(三位)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삼위가 실념론 내에서는 하나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개별이 모두 보편인간으로서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일견 타당한 점이 있다. 어찌되었건 실념론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만 사용한다면, 결국 보편실재에 대한 확신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이 곧 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존재의 속성으로서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온전한 보편성은 오직 신에게서 나타난다. 존재의 힘이라는 개념과 그것이 위계적 세계관과 결합된다면 가장 온전한 보편성은 오직 신에게 귀속된다. 중요한 포인트는 보편적이라는 것은 곧 객관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데 있다. 보편적이라면, 그것은 주관적이지 않은 것이거나, 주관과 객관이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보편은 누가 보더라도 보편의 본질을 잃어선 안 된다. 그것이 곧 신을 이해하는 것이고, 진리를 이해하는 지표가 된다. 이제 신은 보편적이기에 객관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러한 절대적 보편성(神)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How?)
4. 스콜라주의에 뿌리를 둔 이성
자, 그렇다면 이제 신은 보편적이므로,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야 한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식별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스콜라주의에서의 이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들이 이성을 통해서 이른바 ‘객관적’ 인식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앞서서 이야기 했던 스콜라주의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통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객관적 인식’이다. 이것은 성서에 대한 참여를 말하는 것이지, 교회나 마술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알렸다. 그들은 이성을 통해서 성서를 구성하였지만, 이것은 현대의 구성주의와는 관련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연과학자들과 같이 자연 속에서 그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에 바탕으로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성서라는 객관적 경험을 통해서 이를 바탕으로 얻은 객관적 인식능력 즉 이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객관적 경험에서 도출된 객관적 이성을 바탕으로 신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들의 이성적 관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인식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지 않은 가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은 그들 독자적으로(물론 ‘경험’이라는 사전적 요소가 필요하지만) 신을 인식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그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증명과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까지 넘기어 보자!
그렇다면, 왜? 왜 그들은 억척같이 신 존재의 증명까지 필요로 한 것인가?
5. 왜! 그 끈질긴 진리에 대한 물음의 답 앞에서 : 인간의 발견...? 정말...?
그렇다면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지 않았을까? ‘인식할 수 있다’의 명제에서 굳이 ‘인식하자’까지 넘어간 것일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참에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 바라볼 때는 그닥 끌리는 선택지는 아니다. 그들이 신에게 대하는 인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누가 봐도 신이라는 것 아니었을까? 저 개념 하에서 신이란 누가 봐도 신이어야 한다. 잘 생각해보자. 신은 보편적이고, 인식 가능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같은 신’을 바라볼 수 있고,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왜 다르게 보이는 것일까? 누구에게는 이런 신의 양태로, 누구에게는 다른 신의 양태로 드러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신 존재성에 대해서 ‘다름’의 영역이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이란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모든 이들의 주관성과 신의 객관성은 그대로 일치해야만 한다. 그것은 있음대로 인식되어야 하고, 그것은 같음으로 앎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이자 진리인 것이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객관성에 기초해서 맞추는 방법, 다른 하나는 주관성에 기초해서 객관성에 대한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주관성에 기초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극도로 불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주관성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도 신이나 진리를 상대로? 어림도 없다. 결국 우리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전환하고, 대상의 객관성에 우리의 주관성을 맞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억제’는 객관으로의 전향이자 신뢰의 부여이고, 우리에게 객관성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스콜라주의적으로 드러난 셈이고, 그러한 객관성에 기초해서 그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이 결국 폭발하게 된 것은 현대 사상으로의 이전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주관의 마수’에서 벗어나듯 ‘객관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참고문헌>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2003). 대한기독교서회
- 현대 신학사의 거두인 폴 틸리히의 강의록 시리즈인 그리스도교 사상사는 고대 교부철학시기부터 종교개혁시기까지를 다루면서 서구 지성사 전반을 함께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안셀무스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씀드리면, 섹터3의 의견은 사견인데, 수업 담당 교수님께서 매우 우려스럽게 보신 부분입니다.(1. 하이데거를 너무 추종하지 않도록. 그러다가 이른바 '온전한 객관성'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유의하라.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항상 가지고 가는 것이 건전한 철학의 바탕. / 2. 중세는 그렇게 이해할 '객관성'의 시대가 아니었음. 오히려 근대에 이르러서 '객관의 극단'을 볼 수 있었음에 유의할 것.) 유의해주세요.
- 이 글은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를 읽고 이를 정리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 이 글은 신학은 인간학이다(정재현 저. 2003)을 읽고 이를 정리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 감상평, 태클 등등 어떤 것이든지 환영합니다.
첫댓글 저도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