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가 가득한 도시를 혼자 걷는다. 누구를 만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편의점. 음료수 코너… 여야 하는데 라면 코너다. 엄마보다 자주 만나는 편의점 알바는 외친다.
이제 마시는 것은 그만둔 건가요?
아니요. 국물 마시려고요.
그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신상털이. 마시즘이다.
이것은 라면과 음료의 전쟁이다
마실 수 있음에도 다루지 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라면 국물’이 그랬다. 그것은 ‘라면 칼럼니스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라면만 다룰 뿐 음료를 쓰는 일이 없었다.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훈훈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다 옛날 일이 되었다. 라면을 만드는 팔킨(PALKIN)에서 ‘라면 티백’을 출시했기 때문이다. 라면회사의 음료 진출이라니.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구나! ……사실 나는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언제고 ‘라면 국물 특집’을 쓰겠다고 준비 중이었거든.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음료가 아니다. 라면이다.
라면 국물의 모든 것
라면 티백이 왔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라면 국물을 모두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다 확실한 연구를 위해 편의점에 들려 인지도 있는 라면들을 사 왔다. 물론 무파마는 먹고 싶어서. 마시즘에서는 이 라면들의 수프만을 가지고 국물을 낼 것이다.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라면 티백은 정말 라면 국물 맛을 내는가?
라면 국물이 음료라면 무엇이 가장 맛있을까?
문제는 면 없이 국물을 우려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라면 티백의 규격에 맞춰서 수프의 용량과 우려내는 방법을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만들었다, 라면 티백
그래서 각각 라면의 티백을 만들었다. 용량은 라면 티백과 비슷한 수준인 4.5g~5g로 맞추었다. 면은 제외했지만 후첨양념(무파마)이나 다시마(너구리)는 추가했다. 물론 다시마가 2개 들어있는 기적은 없었다.
라면 티백을 만들며 각각 라면수프들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더기수프의 내용도 그렇지만, 색깔과 향기가 달랐다. 나는 라면 수프의 향을 맡다가 코에 수프가 들어가기도 했다. 끔찍했다. 가루를 코로 마시다니. 경찰이 봤으면 은팔찌 찰 뻔. 휴.
라면 티백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여러 음료를 비교할 때는 마시는 조건을 동일하게 하려 노력한다. 차의 경우는 우려내는 시간에 따라 맛의 진하기가 달라진다. 또한 비교를 할 때는 전에 마셨던 음료의 흔적이 남으면 안 된다. 때문에 속성별로 라면을 2개씩 나누고, 아래의 단계에 맞춰 연구를 진행했다.
라면 티백이 담긴 종이컵에 물을 붓는다
1분 30초에서 2분가량 우려낸다
향, 첫맛과 끝맛, 여운, 맵고 짠 강도를 기록한다
양치하고 물을 많이 마신다(다시 1번부터 반복)
오래 기다렸다. 자, 이제부터 라면 수프로 우려낸 ‘라면 차’를 마실 시간이다.
클래식 타입: 신라면, 삼양라면
라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녀석은 신라면과 삼양라면이다. 신라면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이고, 삼양라면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라면이다.
신라면은 달큼한 향기와 함께 파 냄새가 느껴진다. 첫맛은 짜게 시작했다가 곧 달고 매워진다. 이름 때문에 매운맛이 도드라져 보일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단맛과 짠맛 사이에 잘 녹아있다. 은근히 밸런스 잘 맞는 녀석.
반면 삼양라면은 짭조름한 향기가 난다. 건더기 수프에 들어있는 햄 조각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맛이 담백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매운맛이 방점을 딱 찍는데. 신라면과 다르게 첫맛, 중간맛, 끝맛이 주사위 굴러가듯 변한다.
컨트롤 타입: 진라면 매운맛, 순한맛
다음은 갓뚜… 아니 오뚜기의 진라면이다. 이 녀석들은 매운맛과 순한맛으로 타입을 나뉘어 있다. 이는 단순히 매운 강도를 조절한 정도가 아니라 수프의 베이스가 다르다. 라면 티백의 경우도 매운맛과 순한맛이 나뉘어 있기에 비교군으로 가장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짠맛으로 따지자면 진라면 매운맛이 압도적이었다. 처음에는 짠듯하다가 달콤하고, ㅉ… 짜! 하는 짠맛의 공격이 강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모든 국물을 삼킨 후에 여운 파트에서 매운맛이 등판하여 혀에 불을 지른다.
반면 진라면 순한맛은 간장 양념이 베이스가 된 녀석이다. 맵다는 맛은 약간 분위기만 낼뿐, 단짠단짠을 제법 잘 구현한 것이 진라면 순한맛의 특징이었다. 역시 ‘마일드’란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녀석.
아이템 타입: 너구리, 무파마
다음은 재료빨(?)로 승부하는 라면이다. 다시마로 승부하는 너구리와 가격으로 승부하는 무파마다. 너구리는 역시나 다시마가 메인이자 주인공. 무파마는 건더기 수프에 정성을 쏟았다. 재료들 각각이 형태를 알아볼 수 있어서 다른 라면들에 비하면 거의 마트 식품코너 수준이었다.
너구리는 향부터 다르다. 다시마와 건조 미역 때문에 해초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거의 다시마 마에스트로의 지휘하에 매운맛과 짠맛이 나서 독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입을 쩝쩝댈수록 짠맛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무파마
는 마시즘이 성공하면 먹으려고 했던 꿈의 라면이다(비싸니까). 무와 파와 마늘의 깊은 라면 국물 맛. 그래서인지 맛의 선이 굵다. 절권도 스타일이라고 할까? 빡! 짜! 빡! 달아! 빡! 매워! 역시 돈의 맛은 짜릿하다.
돌연변이 타입: 라면 티백 매운맛, 순한맛
드디어 라면 티백의 시간이다. 라면 티백은 칼칼한 매운맛과 담백한 순한맛으로 종류가 나누어져 있다. 포장을 뜯어보니 나오는 ‘라면 한잔할래?’라는 문구도 재미있다.
라면 티백 매운맛의 향은 시골에서 말린 고추를 담은 포대 안과 비슷하다. 날카로운 매운 향. 아니나 다를까 첫맛부터 매운맛이 빠르게 치고 들어와 밥생각을 나게 한다. 칼칼한 존재감을 내려고 매운맛을 무한대출했구나.
라면 티백 순한맛
은 포장마차 스타일이다. 조금 맵게 우려낸 어묵 국물 맛이 난다. 진라면 순한맛에 비하면 그래도 맵고 짠 편이다. 비교 대상에는 없었지만 새우탕이 생각난다.
이 정도면 제법 라면 국물을 잘 구현했다. 심지어 라면 티백은 13칼로리로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지만 이 녀석들은 마실수록 다른 무언가(밥이라든지, 물이라든지)를 먹게 만든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끝난 줄 알았지? 빌런 타입 라면 국물
빨간 국물 라면만이 라면인 시대는 끝났다. 궁금함에 다른 종류의 라면 수프로 라면 차를 만들어 봤다(끔-직). 라면 수프가 만약 흥행하면 이런 것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붉닭볶음면은 향기가 매섭다. 그런데 마셔보니 먹을 만했다… 라고 생각했다가 목 안에 화재가 났다.
비빔면
은 의외로 괜찮다. 새콤하고 달콤한 국물 맛. 유일한 단점이라면 안 시원하고 따뜻하다는 거.
짜파게티는 춘장 향 나는 물맛.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사리곰탕이 가장 괜찮다. 곰탕집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문제는 고기도 없고, 깍두기도 없고, 오직 곰탕 국물에 소금 쳐 먹는 자린고비 맛이 난다는 거.
추가 질문: 라면 아이스티는 어때요?
라면 티백을 연구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요즘같이 더운 날 라면 티백을 시원하게 마시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맛의 기미상궁인 마시즘이 출격했다.
끓는 물 약간에 라면 티백 2개를 강하게 우려낸다
찬물을 섞고 얼음을 넣어 온도를 낮춘다
마신다
죽는다
웬만하면 마시지 말자. 식어버리다 못해 차가워진 라면 국물을 마시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추가 질문 2: 라면 티백으로 라면을 끓일 수 있나요?
라면 티백으로 라면을 끓일 수 있다(굳이 왜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컵라면에서 수프를 빼고 라면 티백을 2개(수프 용량 기준 작은 컵은 2개, 큰 컵은 3개) 넣어 끓여 보았다.
라면 티백이 면의 기름과 만나자 국물이 더 라면다워졌다. 면도 짭쪼름해졌다. 역시 라면은 라면이다. 하지만 국물과 면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라면회사 너 이 녀석! 수프에 맞춰서 면을 만들어 왔던 거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주륵).
어묵 티백에 이어 라면 티백까지… 다음 음료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시도였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을 음료로 만들다니.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음료 외에도 다른 마실 것들이 있는 것 같다. 또 이런 것들이 음료로 나오겠지? 나는 벌써부터 다음 마실 것을 적어본다. 어묵 국물은 했고, 동치미 국물, 냉면 국물…
첫댓글 최근에 라면국물 맛을 낸다면서 티백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엄청 황당했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일반 라면보다도 훨씬~ 비싸다는 사실에 충격먹음;;
그거 보면서.. 나라면 차라리 일반라면 스프들로 티백차를 만들어먹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충실히, 아주 잘~ 실현하신 분의 글이 있었네요..ㅋㅋ 재밌어서 퍼왔습니다.ㅎㅎㅎ
"뭐 저딴 가성비 제로인, 할일없는걸 상품화하고 난리얌.."하다가...
저거 보면서 문득 생각이 바뀝니다.
현재의 비트코인처럼, 뭔가 우스꽝스럽고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결국엔 비트코인시스템이 언젠가는 은행 대체역활을 할 것이란 생각처럼...
뭔가 앞서가는 아이템이 아닐까?하는.. 갸우뚱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