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 받던 두 기의 여인 묘소를
중심으로
공원을 만든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매창공원에는 시인 명기 매창의 묘소와 한
때 광대라 불리워야 했던
명창 이중선의 묘소 두
기뿐이다.
부안 읍내에 조성된 매창공원.
표지석에는 매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비를 털어 만들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부안 출신의 명기 매창을 위해 주머니를
턴 부안 사람들이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창공원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매창문화제가
열린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매창의 묘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閨秀)시인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꼽는다면,
기녀(妓女)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梅窓)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나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이 시는가곡원류와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애간장을 녹이는법.
헤어지기 싫어 손을 잡고 우는 그들 위로 배꽃은 꽃비되어 내리더니,
바람에 낙엽이 져도 다시 오지 않는 님.
매창의 기다림은 15년 동안
계속됐다
임색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아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매창과 헤어진 유희경 역시 그리워 하기는 마찬가지.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春來人在遠 (춘래인재원), 봄은 왔지만 임은 먼 곳에
계시어
對景意難平 (대경의난평) 경치를 보면서도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습니다
鸞鏡朝粧歇 (난경조장헐), 난새 거울에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 (요금월하명) 달 아래서 거문고를 뜯으니 눈물이
나네요
看花新恨起 (간화신한기), 꽃 바라 볼수록 새 설움이
일고
聽燕舊愁生 (청연구수생) 제비 우는 소리에 옛님 생각
솟아나니
夜夜相思夢 (야야상사몽), 밤마다 임 그리는 꿈만
꾸다가
還驚五漏聲 (환경오루성) 오경 알리는 물시계 소리에 놀라
깬다오.
매창과 가장 가까웠던 남자는 세
사람,
광해군 시절, 불우하게 지내다 인조반정의
주인공이 된 이귀'
매창이 첫 순정을 바친 유부남 시인
유희경,
여류 시인으로 명성 높은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홍길동의 저자),
이 가운데 매창이 일생 그리워 한 남자는
유희경뿐이었다.
그러나 홀로 사는 천한 기생 매창을
유혹하는 사내들이 너무 많았다.
이 때 지은 시가 '취하신
님께'다
취하신 손님이 영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 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이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 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첩이 허용되던
당시,
왜 유희경은 산골에서 외롭게 멸시받고
살아가는
그의 연인 매창을 서울로 부르지
않았을까?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마 유희경에 대한 깊은
사랑때문이었으리라.
허균의 일생을 그린
영화'천둥소리'에는
매창이 신모씨의 애인으로 잠간
등장하나
매창과 유희경의 시로
미루어
이러한 일은 허구일 것으로
추정된다.
매창이 죽으며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있다.
結約挑園洞裏仙(결약도원동이선)-도원에 맹세할 땐
신선같던 이 몸이
豈知今日事凄然(기지금일사처연)-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坐懷暗恨五絃曲(좌회암한오현곡)-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러 볼까
萬意千事賦一篇(만의천사부일편)-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塵世是非多苦海(진세시비다고해)-풍진 세상 고해에는
말썽도 많아
深閨永夜苦如年(심규영야고여년)-홀로 새는 이 밤이 몇
해인 듯 길구나.
藍橋欲暮重回首(남교욕모중회수)-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靑疊雲山隔眼前(청첩운산격안전)-구름 속에
첩첩청산눈앞을 가리우네.
위의 시는 유희경이 매창의 무덤에 성묘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궤연(几筵)이 모셔져
있고 궤연(几筵)옆에는
거문고와 매창의 마지막 작품인 위의 절필(絶筆)
유작시(遺作詩) 가 놓여 있었다.
유희경은 절명시를 써가면서 죽어간 이매창을 생각했다.
유희경은 붓을 들어 탄식과
후회가 가슴을 후비는 아픔으로 아래의 시를 썼다
明眸皓齒翠眉娘(명모호치취미낭)-맑은 눈 하얀이 푸른눈섭 계랑아
忽逐浮雲入杳茫(홀축부운입묘망)-홀연히 뜬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縱是芳魂歸浿色(종시방혼귀패색)-꽃다운 넋은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誰將玉骨葬家鄕(수장옥골장가향)-그 누구가 너의
옥골을 고향에 묻어주랴
유희경은 92살에
죽었다.
너무도
대조적이다.
한 여인은 일생 연인을 그리다
요절했고,
그 남자는 사랑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
했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과 매창과의 시 교류도
활발했다.
허균이 매창의 죽음을 알고 쓴
시다.
妙句土甚擒錦(묘구토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허균이 이매창을 알게
된것은
그의 큰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01년에
허균은 충청,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자주 순시하면서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매창을 알게 되었고
시문학을 통하여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때가 허균이 33살, 매창이 29살 로 전한다.
그때를 허균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선조34)년 벼슬을 내놓고
부안에 욌는데
비가 쏟아져서 그곳에 머물렀고 그때 매창을
만났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이야기를 나눌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주고받았으며 시로 화답했다. 저녁이 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주었는데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다."
- '조관기행' 중에서-
허균은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도덕적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한다.
허균은 매창과 교유하면서도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매창에 대하여 기억하기를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인격을 대우하고 그의 시를
좋아할 뿐이다.
매창의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情誼)가 막역하여 농담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매창을 그리며 쓴 시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나삼상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래도 정은 살아
남았네
'매창묘를 찾아서' 소설가 정비석씨의
글
김민성 시인은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작고한 교육자였다.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1898~1943)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5세부터 13세까지
전라도 보성에서 자랐다
이화중선은 박기홍, 이동백, 송만갑 등의 소리제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가 누구에게서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익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
하여간 이화중선은 뒤늦게 소리판에 뛰어들었음에도 당시 최고의 여류명창으로
평가받았다.
일제 때 판소리계에서 임방울과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후에 이화중선의 동생 이중선까지 판소리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큰 인기를 모으자 동생 이중선까지 판소리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
이중선은 언니 이화중선의 그늘에 가려 크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이중선에 대한 문헌이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는 관련자료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아서
생몰연대 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중선과 이화중선의 목소리를 비교해 볼 때
이화중선과 이중선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것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녀가 죽은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오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매창과 유희경의 첫 만남이 18살과 46살로 나오는 등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일부 영상과 자료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모셔왔습니다.> |
첫댓글 시인 매창은 기억에 없지
만 명창 이중선 외할머니
께서 자주 말씀하셨답니다.
할머니 말씀은 누가 뭐라
해도 명창 이중선을 따를
자가 없다고 저에게도
여러차례 말씀 해 주셔서
가장 기억에 남고 이중선
의 펜이신 할머님이 생각
납니다. 할머니 고향이
전남 珍島분이십니다
씻김굿의 고장 珍島가
故鄕이신 외할머니께선
남도 창을 아주 좋아하셨고 창을 잘 하셨
습니다.
댓글을 써가는 동안
할머니의 생각이 떠오름
니다.
씻김굿의 고장 珍島가
故鄕이신 외할머니께선
남도 창을 아주 좋아하셨고 창을 잘 하셨
습니다.
댓글을 써가는 동안
할머니의 생각이 떠오름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