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어딨지? [1]
"왜 나만 빼놓으려고해." 나는 마치 날 따돌리는 언니나 오빠를 고자질하는,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처럼 전화기에 대고 징징거렸다.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지." 엄마가 말했다. "넌 이제 스물 다섯이야. 지금이 너한테 가장 중요한 시기야. 엄만 네 아빠랑 둘이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어." 계속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고 그 중에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유진에 있는 암 전문의 닥터 리는 엄마가 췌장암 4기라고 진단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존율이 3퍼센트였다.
수술을 하면 회복하는데 몇 달이나 걸리고, 그래도 완치될 확률은 2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아빠는 다른 소견을 들어보려고 휴스턴에 있는 MD 앤더슨에 진료 예약을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엄마가 '팬크리-아티' 암, '앤디 앤더슨'이라고 발음하는 걸 [전자는 췌장의 형용사인 '팬크리아틱' 이, 후자는 '엠디 앤더슨'이 올바른 발음이다] 듣고 있자니 마치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토이 스토리〉 속 인물의 손에 달린 것처럼 여겨졌다.[앤디가 만화영화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 떠올리게 한다는 뜻] "내가 거기 있고 싶다고." 나는 우겼다. "엄만 네가 오면 둘이 싸우게 될까봐 그런 거야." 아빠가 나중에 털어놓았다. "어찌됐든 지금은 오로지 병을 낫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내가 집을 떠나 살아온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모두 치유해주었으리라고, 내 10대 시절을 짓누르던 엄마의 중압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유진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충분한 공간을 찾아냈고, 나 역시 줄기찬 비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원 없이 창작 욕구를 발산한 덕분에 그간 엄마가 한 모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건만 아빠의 고백은, 그럼에도 엄마에겐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내비쳤다.
신생아 때부터 나는 무엇 하나 수월한 게 없는 아이였다고한다. 세 살 무렵에는 나미 이모가 나를 '유명한 악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뭐든지 일단 들이받고 보는 게 내 주특기였다. 나무 그네든 문틀이든 의자 다리든 독립기념일 행사 때 놓아둔 철제 관람석이든 가리지 않았다. 내 머리 중앙에는 내가 우리집 식탁 유리 상판 모서리를 최초로 들이 받았을 때 움푹 파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식사 모임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볼 것도 없이 나였다.
오랫동안 나는 부모님이 과장을 하거나 그냥 아이 키울 마음의 준비가 제대로 안 된 분들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들으면 내가 진짜로 사람 피를 말리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최악은 아빠가 말하는 그 끔찍한 시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쯤부터 그냥 사춘기의 불안 정도로 지나갈 수도 있었을 상태가 심한 우울증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늘 피곤하고 무언가를 할 의지를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성적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엄마와 나는 자꾸 서로 어긋나기만 했다.
"안됐지만 내 쪽 유전자 탓이야." 어느 날 아빠가 아침을 먹으면서 말했다."아마 잠도 잘 못 잘 거다." 아빠는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음면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막 또 한바탕 엄마를 기함하게 하고서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여기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아빠는 고개도 안 들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신문을 스포츠면으로 넘겼다.
아빠는 마약중독에 빠진적이 있었고 청소년기를 나보다 훨씬 힘들게 보냈다. 열아홉 살 때는 애즈버리 파크의 덱 산책로 밑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거기서 하필 경찰한테 메스암페타민 [각성제의 일종으로 피로폰이라고 불리는 약물] 을 팔려다가 붙잡혔다. 그 일로 6주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캠던 카운티에 있는 재활센터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새로운 심리 치료 요법의 마루타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쓰인 표지판을 목에 걸고 다녀야 했고, 무슨 도덕성을 자극한다는 쓸데없는 운동을 해야 했다. 토요일마다 센터 뒷마당에 구덩이를 팠고, 일요일마다 그 구덩이를 다시 메웠다. 그에 비하면 내가 겪은 문제는 별것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