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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아야 할 선입견
행 10:9-16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행 10:9-16 / [베드로가 본 환상] 이튿날 그들 세 사람이 욥바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를 드리러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가 마침 정오여서 베드로는 시장기를 느꼈다. 점심식사는 아직 준비중이었고 그러는 중에 베드로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갔다. 11) 그가 쳐다보니 하늘이 열리고 네쪽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12) 그 속을 들여다보니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먹지 말도록 금지되어 있는 뱀과 새 등 온갖 종류의 짐승이 들어있었다. 13)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려 왔다. `자, 어느 것이든 원하는 대로 잡아먹어라.' 14) 베드로가 소리쳤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이런 것을 입에 대어 본 일이 없습니다.' 15)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하나님께 대꾸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정결한 음식이라고 하시면 그것은 정결한 것이다.' 16) 똑같은 환상이 세 번이나 반복되더니 그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들리어 올라갔다.
신앙의 싸움은 전통이냐 말씀이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살아온 전통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통을 파고들어 깨뜨려내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9-16) 제 육시 기도시간, 무두장이 시몬의 집 옥상에 올라 기도하던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서 보자기와도 같은 큰 그릇이 베드로를 향해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레위기 11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온갖 부정한 짐승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베드로에게 ‘이것을 잡아먹으라’ 명령했지만 베드로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먹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이나 잡아먹을 것을 명령했지만 베드로는 거절했고 그 그릇은 하늘로 올려집니다. 보자기 안에 있는 짐승들은 모든 이방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상징하며, 잡아먹으라는 말씀은 그들을 용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유대적인 전통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서 이해되지 않는 문화와 풍습을 용납하기 힘들어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됩니다. 복음은 우선적으로 상대방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형편과 상황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주며 품어줄 때 비로소 복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마음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의 일방적인 선포는 오히려 복음을 막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13-16) 베드로가 환상가운데 주어진 명령을 거부한 이유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저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의 구별 정도로, 그리고 자신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의로운 행동양식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고넬료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에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전통에 싸여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여전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당신의 전통은 없습니까? 누군가를 대하기 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시선으로 대하는 일들은 없습니까?
히틀러를 신처럼 숭배하던 히틀러의 경호원 중 한 사람인 바그너는 전쟁이 끝날 무렵 히틀러가 자살하자 그의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고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책 한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심코 읽은 책 한권으로 그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경배대상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를 찾아갔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며 평화의 주인이십니다.”
< 설 교 >
베드로의 환상 / 김영규 목사
베드로가 환상을 보다
지난 주에는 고넬료가 본 환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본 환상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고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약50km 정도의 거리입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고, 즉시 심부름꾼을 보냈으니까, 다음날 정오쯤에 욥바에 도착한 것입니다. 고넬료의 하인들이 베드로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지붕에 올라가 유대인의 규칙대로 정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 아래층에서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 눈앞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에는 “황홀한 중에”라고 했는데, 종전의 개역 성경에는 “비몽사몽간에”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 상에는 “e[kstasi"”(엑스타시스)인데 이 말은 제정신을 잃는다(ejxivsthmi)는 뜻입니다. 영문으로는 “ecstasy”라고 번역합니다. 꿈이 잠자는 동안에 보이는 장면이라면, 환상은 생시에 보이는 장면입니다. 대개 꿈은 선명치 않으나 환상은 선명하게 보입니다.
베드로의 눈에 보인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매우 큰 그릇이었습니다. 그릇은 보자기처럼 평평했고 네 귀퉁이를 매어 땅에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각종의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tetravpou"), 기는 것(eJrpetovn), 나는 것(peteinovn)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짐승들을 보고 있을 때에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어나라! 베드로야, 잡아 먹어라! “!Anastav", Pevtre, qu'son kai; favge.” Arise, Peter, kill and eat! 시장하니까 동물을 잡아서 맛있게 먹으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거절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정통파 유대인인 베드로가 아무 짐승이나 잡아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거절했을 때에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된 후에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세 차례 반복된 것은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환상의 의미가 뭘까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 부정한 음식의 의미
환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본 부정한 음식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 유대인들을 음식을 가려먹을까요? 베드로가 한 말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베드로는 평생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왜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을까?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와 신명기에 보면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례가 있습니다.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물에 있는 어족 중에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이런 것은 너희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또 무릇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을지니라.”(신14:3-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무릇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무릇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땅에 기는 바 기는 것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쪽제비와 쥐와 도마뱀 종류와, 합개와 육지 악어와 수궁과 사막 도마뱀과 칠면석척이라. 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무릇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목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사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레11:20-42) 율법에 언급된 부정한 동물은 식품 영양학적인 관점에서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외양이 더럽거나, 혹은 땅에 밀착하여 도약하지 못하는 종류, 혹은 육식 조류 등입니다. 땅은 죄악과 타락의 장소이므로 땅에서 뛰어오르는 메뚜기 같은 곤충은 먹어도 되지만 배로 기어다니는 종류는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고기 종류도 비늘 없이 땅에 밀착된 종류는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체는 죽음을 의미하므로 생명의 하나님과 상충 됩니다. 그래서 주검을 만진 것, 특히 부정한 짐승의 시체를 만진 것은 아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구약 율법이 부정한 동물을 먹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손상시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유대인의 전통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부정한 동물의 개념을 모든 음식물에 확대 적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물로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기본 사상은 聖俗의 區別입니다. 구약 성경에 부정한 음식을 규정하게 된 동기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신14:1-2,2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여기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입니다. 단지 음식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가 세상 사람과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하는 聖別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모든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녀들에게 “너희는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탈무드의 중요 내용들도 이러한 구별을 가르칩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시간을 구별하는 일, 코셔, 할라빵 등 거룩한 음식물로 몸을 구별하는 일, 절기, 예식 등으로 가정을 구별하는 일, 기도, 금식, 등의 경건 생활의 구별 등등.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습관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부분이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복장, 음식, 안식일, 금식, 기도, 결례, 등등.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성별된 생활 자체를 비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마음에 없는 外飾, 위선적인 행위를 비판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유대인의 성별 의식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저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유대인의 구원 문제는 접어 두고 얘기 해 봅시다. 그들이 구원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따지기 전에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하나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 위한 기독교의 구원 개념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이런 답변을 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8:39,41)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자녀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구원 받는 데 주력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곧 성별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정통파 유대인입니다. 그는 선민으로서의 모든 규례들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유대인의 성별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복장을 구별했습니다. 절기를 지켰습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모든 면에서 유대인의 전통을 계속 지켰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습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다운 성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는 선민의 표식이며 언약 백성, 아브라함 자손의 표식입니다. 그들은 굳이 이 표식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할례 문제는 사도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에서 전도된 신자들 사이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후에 새로운 복음 안에서의 법이 세워집니다. 예수 믿은 사람에게 유대인의 할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
어찌 되었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얼마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까? 천국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답게 사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몇 개월 다니다가 실망해서 그만 두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룩한 성자라고 생각했는데 노는 모습을 보니까 세상 사람과 똑같아요. 아마 요즘도 처음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 중에 이런 실망을 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나도 저 그리스도인들처럼 남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한 답변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가?
하나님이 알려주신 진리
이제 이 환상에 담긴 영적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정한 음식의 의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부정한 음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부정한 음식은 바로 세상 모든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음식이 담긴 네 귀퉁이는 동서남북 사방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담긴 동물들은 부정하거나 혹은 정하거나를 불문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부정한 음식을 잡아먹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바로 이방인을 내 삶의 영역에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내 마음 중심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되어 내 몸에 흡수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는 성찬은 예수님의 인격이 내 삶에 녹아져서 흡수되어 일치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일치되어 죄에 대해서 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일치되어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다는 뜻이 뭘까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속죄 받으면 깨끗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칙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성별 의식, 潔禮法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최소한의 영역 안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인과 접촉하지 않고, 이방인의 식탁에 앉지 않고, 이방인을 더러운 사람으로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미 유대인의 계율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두장이(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피장이는 시체를 만지는 부정한 직종입니다. 그래서 대개 피장이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욥바 해변에 피장이 시몬의 집이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 부정한 피장이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잤습니다. 정하고 부정한 것은 출신이나 직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면 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예수 믿지 않고 속죄 받지 못하면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부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혹시 오늘 내 마음에서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접근하지 않기로 단정한 사람이 있습니까? 죄인으로 단정한 사람이 있습니까? 가망 없는 사람으로, 혹은 포기한 사람이 있나요? 선입견을 두지 마세요. 예수님이 깨끗케 하시면 다 깨끗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접촉하신 사람들을 보세요. 우편 강도는 평생 강도질만 한 나쁜 사람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입니까?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결혼에 다섯 번이나 실패한 인생 실패자입니다. 세리 마태는 동족들에게 지탄 받는 부정한 인물입니다. 38년 된 병자, 여리고 성의 나병 환자, 중풍 병자, 미문 가에 걷지 못하는 사람, 모두가 가망 없어 보이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거룩한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선입견 없이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 이름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깨끗케 하시면 얼마든지 깨끗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받아들일 때에 이방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방전도의 열매는 바울이 얻었지만, 그 시작은 유대인 베드로 사도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랑하십니다. 불신 이방인들을 주 안에서 품고 영접하고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땅끝까지 교회, 베드로의 환상 / 석원태 목사
우리는 이 시간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 일컫는 사도행전 10장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선교 전략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가 이방 로마 장교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받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일입니다(행 10:44~48, 11:1, 18). 땅끝까지 가는 복음과 교회부흥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의 선교작전이었습니다.
Ⅰ. 이방 로마의 장교 고넬료가 받은 환상은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1-8).
팔레스타인의 땅 가이사랴에 고넬료가 지휘하는 이달리야대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이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당시 로마 총독의 거주지로서 로마에서 파송된 다섯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완전 로마인들로 구성된 이달리야대는 그 중에 한 부대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행 10:1~2). 그는 어느 날, 제9시쯤의 기도하던 시간에 뜻밖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제9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중 받은 환상(ejn oJravmati)은 사도행전 7장 31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그 ‘광경’이란 단어와 같습니다. 그 환상은 홀연히 나타난 빛난 천사가 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남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넬료에게 나타났고, 그 내용은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한 사실입니다(행 10:3~5). 베드로는 지금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는데, 그 집은 해변에 있다고까지 알려주었습니다(행 10:6). 시간적으로 지금이었습니다.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청해야 될 사람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장소는 욥바이고, 머물고 있는 집은 피장 시몬의 집이며, 그 집은 해변에 있다고까지 알려주는 구체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 환상을 처음에는 심부름하는 그 종들에게(행 10:7~8), 다음에는 자기 집에 온 베드로에게(행 10:30~33) 다 말하였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환상을 반복하여 말하였습니다(행 11:13~15). 그 환상은 고넬료에게 즉각적인 순종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환상이 준 영감의 감동이 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집안 하인들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그가 받은 환상을 다 말하고,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모셔오도록 급파하였습니다. 실로 땅끝까지를 향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작전이 아닌가! 그것은 순전히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복음전도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Ⅱ. 유대인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은 초청하는 고넬료 가정으로 가라는 것(행 9-16).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서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제6시(12시)를 맞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시장하여 점심을 준비시킨 때였습니다. 갑자기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릇은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워서 베드로 앞에 당도하였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그 안에,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유대인들이 부정한 흉물로 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음성(소리)이 나서 이르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즉각적으로 항변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그에게 두 번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들을 담은 보자기 같이 싸인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또 다시 그 네 귀에 달린 한 큰 그릇이 두 번째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하늘의 음성과 베드로의 항변과 반복되는 하늘의 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꼭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나타난 환상이었습니다.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이었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한 그릇’이었습니다. 그 ‘한 그릇’의 다른 모양은 ‘큰 보자기’와도 같았습니다. ‘네 귀를 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한 그릇’은 하나님이 수용하는 전 우주 안에 있는 생존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네 귀에 매었다’ 함은 동서남북 사방을 의미합니다.
그 그릇 안에 있던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행 10:12)은 구약에 불결한 동물로 규정한 것들인데(신 14:3~20), 유대인들에게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산재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를 상징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곧 「일어나 잡아먹으라」(행 10:13)고 함은, 복음의 이방 전진, 복음의 세계정복을 알려주는 계시였습니다. 이 환상(e[kstasi")은 고넬료가 본 객관적 환상(oJravma)과는 달리 심령적 황홀경을 뜻하는 말로 영감의 주관성에 치중하는 말입니다. 이 환상이 세 번이나 반복된 것은 이 환상의 확실성과 중요성 그리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서 우주적 복음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계를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뿐 아니라, 전 세계를 받은 것입니다. 실로 땅끝까지 가는 하나님의 세계선교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실 구원받을 백성이 유대인 외에 이방 세계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실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땅끝까지 산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선교구역, 세계적 복음선교의 대상을 알려주던 환상이었습니다. 우주적 복음운동의 환상이었습니다.
Ⅲ. 이방인의 구원을 본다(17-48).
세 번이나 계속된 그릇 환상의 계시는 베드로를 경각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반복된 세 차례의 계시를 풀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행 10: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바로 그 시간, 그가 머물고 있던 피장 시몬의 집에 도착한 고넬료의 심부름꾼들로 말미암아 곧 풀렸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행 10:19~20)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속되고 불결한 것은 율법에 의하여 먹을 수 없다고 항변하던 베드로의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을 깨쳐버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였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이르러, 두 사람의 역사적 상면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는 사실상 서로 상존하거나 상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요,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적 혈통의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를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속되고 가증하고 불결한 동물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두 사람은 상거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환상과 환상으로 감동을 시켜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만나기 위하여 고넬료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자기와 온 집과 친구들을 다 불러놓고, 주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주실 말씀을 듣고자 모여 있었습니다(행 10:24~33). 마침내 하나님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 설교는 성령이 임한 오순절에 각 사람이 자기의 난 곳의 방언으로 듣던 성령 설교였습니다(행 2:14~36). 그 결과는 3,000명이 회개하는 축복이었습니다. 두 번째 설교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반발 가운데서, 40년 동안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계기로 행한 설교였습니다(행 3:11~26). 그 결과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반발과 박해였습니다. 오늘 그의 세 번째 설교는 이방인 가운데서 행해진 설교입니다. 그 설교의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① 예수는 만유의 주되신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행 10:36).
②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행 10:36).
③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행 10:38).
④ 예수는 이적과 기사로 모든 병을 고쳐주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0:38).
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나무 형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0:39).
⑥ 예수는 무덤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사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0:40).
⑦ 예수는 구약예언의 성취라고 하였습니다(행 10:43).
⑧ 예수는 믿는 사람에게 사죄의 구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행 10:43).
바로 성령께서 나타내신 구원론적 설교였습니다. 선교의 주제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설교말씀이 선포되는 그 시간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내려오다’라는 말은 ‘위에서 떨어지다’, ‘덮치다’, ‘압도하여 사로잡다’라는 뜻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베드로를 가라고 하였습니다(행 10:19). 그 성령이 베드로의 설교를 주장하였습니다. 그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하였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고 하였습니다(행 10:45).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행 10:47)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행 10:48)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물세례는 베드로를 수행한 그의 수종자들에 의하여 행하여졌습니다. 아마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던 빌립에 의함인지도 모릅니다. 그때 빌립은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행 8:40). 실로 놀라운 가이사랴의 오순절이 아닌가!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은 14만 4천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4:1, 2, 7:4). 다시 말합니다. 구원인에 대한 이러한 숫자적 표현을 다르게 말하기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인의 최다수를 알려주는 상징적 계시표현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행 13:48). 사실상 이들의 구원 때문에 세계 역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전도’라고 하는 미련한 방법을 통하여 성취해 가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0~21). 바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명령입니다(딛 1:3). 이 복음 전도의 결과는 예수 믿는 신자들로 이룩되는 ‘교회’라고 하는 구령인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서, 유대에서 부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복음 선교를 위하여 바울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계복음화의 환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바로 바울 자신의 부흥이요, 베드로 자신의 부흥이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재생과 재기를 의미합니다. 개인의 부흥이 교회의 부흥으로,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부흥을 이룩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바울을 통하여, 땅끝까지 가는 교회 부흥의 선교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편견의 안경을 벗은 사람
행 10:9-23 / 조상호 목사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를 잘 들으시고 이야기 후에 이어지는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아들은 중상을 당하여 앰블런스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급히 수술해야 할 의사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 아들이기 때문에 제 손으로 수술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질문합니다. 지금 어떤 상황일까요? 답을 아시는 분?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는데, 이 의사가 누구일까요? ... 바로 중상을 입은 환자의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자기 손으로 아들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사하면 남자 의사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교통사고를 당하여 돌아가셨는데, ‘병원에 또 다른 아버지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남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쉬운 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답을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편견들이 우리들에게 무수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 편견들이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가령 예를 들어 우리 주위에 보면 ‘이탈리아 사람은 정열적이다’, 또는 ‘영국 사람은 신사다’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OO 출신 사람은 이기적이다', 'OOO 족은 과격하다', '어느 나라 사람은 돈만 안다’, ‘무슨 종족은 머리가 나쁘다’라는 말들을 합니다만, 이러한 말들이 바로 편견으로부터 시작된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편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견이 ‘외모에 대한 편견’입니다. 외모가 그럴싸한 사람에게는 호감을 갖지만, 겉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호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지나치게 외모를 중시하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형수술이 보편화되고, 성형외과가 돈을 벌 수 밖에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과의 전쟁을 하는 것처럼, 무리하게 살을 빼다보니 죽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성광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유관재목사님은 <버려야 할 단어들>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할 편견의 안경들’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 의하면 현대에 많은 편견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문편견 바로 이 ‘외모에 대한 편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외모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구약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새는 아들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첫 번째 나타난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감탄하며,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다음으로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마지막 일곱째 아들까지 지나가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큰 잔치가 열린 것도 모르고 들판에서 열심히 양떼를 돌보고 있는 막내아들 다윗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버지 이새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엇습니다. 그런데 이새는 일반사람이나까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사무엘까지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살펴본 나다나엘이라는 제자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친구 빌립이 그에게 찾아와서 ‘그렇게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라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당시 나사렛은 굉장히 깡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메시아는 깡촌인 나사렛에서 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지방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편견’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우던 베드로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편견의 안경을 쓰고 있었던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한 복음의 물결이 제자들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던 유대출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들이 사는 곳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을 뿐 아직까지 이방인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해왔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할례 받지 못한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55Km 떨어진 욥바의 시몬 집에 방문했다가, 기도시간이 되어 지붕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집 구조는 앞쪽과 달리 뒤쪽은 나지막한 높이의 지붕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올라가기 쉬웠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러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는 제 육시,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정오로서 점심을 먹을 시간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다가, 거기에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각종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13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 한대” 하나님께서는 ‘잡아 먹으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이기 때문에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계속해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베드로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사실 베드로의 삶은 그 동안 편견에 사로잡힌 삶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정한 음식을 먹고 있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먹지 않으니, 이방인보다 깨끗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구별된 삶을 살고 있다”라는 편견 속에 살았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는 이방인들에 비해, 자기는 정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베드로야, 네가 너무 큰 편견을 가지고 있구나, 네 자신에 대해서 네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너는 큰 편견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하시며, 그를 깨우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짐승들이 담긴 큰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짐승, 다시 말하면 부정한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도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자기에 담긴 부정한 짐승들이 하늘에 올라간 것처럼,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이방인들도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훗날 그곳에서 우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계7:9~10).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을 받으시기 원하셨지만, 베드로는 유대인들만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베드로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편견의 안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마거릿 미첼의 원래 직업은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녀는 처녀 시절 커다란 꿈을 안고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6세가 되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해 그만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26세의 젊은 아가씨가 불구의 몸이 되어 직장마저 그만두게 되었으니 얼마나 절망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 오래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비록 다리는 다쳤지만, 글은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무려 10년에 걸쳐 소설 한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그 소설 원고를 들고 3년 동안이나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무명작가인 그녀, 그리고 불구가 된 그녀를 받아 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이슨이라는 출판사 사장을 찾아가 한번만 읽어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는 급히 열차를 타러가야 한다며 그녀의 원고를 가방 속에 처넣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열차에 탔지만, 그 원고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레이슨 사장이 타고 가는 열차에 ‘원고를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는 전보를 급히 쳤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심이 되지 않았던 그녀는 그 이후로도 전보를 두 번 더 쳤습니다. 결국 세 번째 전보를 쳤을 때, 그 출판사 사장은 그 원고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원고를 읽기 시작한 그 사장은 원고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녀에게 출판을 제의했습니다.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출판되자마자 놀랍게도 하루에 5만 부가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책은 그 이름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질 뻔 했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와 같은 편견의 사람이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자기 안에 있는 음식을 먹으라는 명령을 거절하자, 그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환상에서 깨어났지만, 도대체 그 환상이 의미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 17절에는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의심하다'로 번역된 ‘디아포레오(diaporeo)’라는 단어는 원래 '몹시 당황하다'는 의미입니다. 똑 같은 내용의 환상과 음성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해 무척 당황해 했습니다. 자신이 부정하게 여기던 짐승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그 때,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의 묵고 있는 시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7절부터 20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결국 베드로는 “내가 저희를 너에게 보내었느니라. 그들을 따라 가도록 하라”는 성령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방금 전에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이방인에 대한 그의 편견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신을 받아주신 주님께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를 받아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갈릴리의 하찮은 어부인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께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를 외면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는 개 취급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섬겨야 할 이웃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동안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그릇된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약 50Km 떨어진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라고 고백하며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고넬료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 다시 말하면 유대인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이방인들도 예수 믿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 성령을 부어주시다니’하며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 그곳에서 수일 을 더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소문이 유대에 전해졌습니다. 그 때 유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사도행전 11장 1절부터 3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그들은 베드로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기뻐하며 잔치를 벌여야 하는데, 그들은 잔치를 벌이기는 커녕,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은 베드로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에 있었던 성도들은 베드로를 책망할 정도로 더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는 수없이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편견에 사로잡혀 그렇게도 난리법석을 부리던 성도들이 잠잠하여졌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11:18).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유대인출신 성도들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편견은 무섭습니다. 한번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트라이언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크리스천 네스텔 보비라는 사람은 “발전의 큰 장애는 편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발전을 방해하는 ‘편견’을 깨뜨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을 박살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앞서서 소개한 ‘벗어나야 할 편견의 안경들’에 보면 우리가 버려야 할 편견 몇 가지를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이의 편견’이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자 형들이 뭐라고 반응했습니까? “아니 그럼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리들이 네게 절한단 말이냐. 말도 안 된다”라고 요셉을 야단쳤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편견과는 달리, 어린 요셉을 들어 쓰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나이로 인한 편견들이 많습니다. 일단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도 나이가 많으니까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거야’라는 편견으로 봅니다. 또 나이가 어린 사람에 대해서는 ‘너 같이 어린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며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이에 편견을 깨뜨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이에 대한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는 ‘지역적인 편견’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아니 싫어하다 못해 짐승취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혹시 우리 안에 ‘지역적인 편견’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있다면 깨뜨려야 합니다. 전라도 사람이면 어떻고, 경상도 사람이면 어떻고, 충청도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강북출신이면 어떻고, 분당 출신이면 어떻습니까? 이러한 지역적 편견은 반드시 그리스도안에서 깨뜨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출신지역에 대한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는 ‘직업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아예 세리를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리 삭개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직업이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직업적인 편견’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저런 직업을 가졌으니까 별 볼일 없어’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직업적인 편견을 깨뜨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중한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지위로 인한 편견’이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보고 사람을 구분지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도 없고, 지위가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든, 지시에 따르는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소중한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다 동일한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사회적 지위로 인한 편견’이 있다면 깨뜨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1842년에 있었던 아주 재미난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에 사는 의사들과 의학자들이 모여서 거창한 결정을 하나 했습니다. 그 결정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류마티스와 폐렴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이상한 결정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펜실베니아주에 사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무려 3년 간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지 않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편견은 수년 후에 깨어졌습니다. 1903년, 그 유명한 라이트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아갈 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동네사람들은 이 형제들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기계가 날아갈 수 있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고, 한낱 망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라이트형제는 ‘기계는 절대로 하늘을 날 수 없다’는 동네사람들의 편견을 보기 좋게 박살내 버렸습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수결 원칙을 주장합니다. 두 가지 의견을 놓고 한 명이라도 더 많으면 많은 쪽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수가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수의 길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이 있다면 그 편견을 깨드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누르고 있는 편견이 있다면 그 편견을 박살내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자매 여러분들은, ‘여자 팔자 남자에게 달려있다’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자 팔자는 남자에게 달려있지 않고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형제님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나는 늙었다’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80세에 호렙산에서 소명을 새로 받았고, 갈렙은 85세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하며 아낙족속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갔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늙었다’는 편견을 버리시고 “이제 천국이 나에게 가까이 왔어,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라는 말씀대신 ”나는 주 안에서 아직도 젊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이 많다“라고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은 ”나는 안 된다“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빽이 없어서 취직을 못합니다. 집안이 별로 좋지 않아 출세하기 틀렸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른들은 어렵다고 하지만,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전도가 어렵다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는 쉽습니다. “나는 도저히 전도할 수 없어, 나는 이번 홈컴밍데이에 단 한 사람도 데리고 오기 힘들어“라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또 이번 홈컴밍데이에 ”저 친구는 사기꾼 같으니까 안돼. 또 저 사람은 교민사회에 평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초청할 수 없어. 저 여자는 소문이 좋지 않던데. 저 여자는 아직은 안돼”라는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마지막으로 저는 <마음이 담긴 몽당연필>에 실린 “편견은 색안경과 같다”는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보 3면에 적어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을 보고 함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섣불리 사람들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견을 갖곤 합니다. 처음 가졌던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판단의 오류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나무의 수를 헤아린다 해도, 결코 나무의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바라볼 때, 나무가 몇 그루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조급한 판단으로, 소중한 인연이 될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런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편견은 커다란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안경과 같습니다. 편견을 버리기 위해서는 사소한 부분까지 깊이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쓰고 있는 편견의 안경을 벗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편견의 안경을 쓰고 계십니까?
가까워진 하나님
행 10:9-23 / 김흥규 목사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복음>
사도행전 1장 8절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워낙 편견과 장벽이 많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까지 전파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에 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고넬료의 집안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0: 1-8절에 보면 고넬료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중대장 급에 해당되는 외국인 장교였지요.
그런데 2절에 보면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의 이와 같은 경건과 구제와 기도 때문에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이 깨끗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바로 이와 같이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시고 이방인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고넬료로 하여금 욥바에 머무르고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고넬료는 하인 둘과 부하 한 사람, 모두 세 사람을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보냅니다.
오늘 봉독한 10: 9-23절을 보면 베드로 역시 신비한 환상을 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집이 어떤 집인지가 중요합니다. 욥바에 있는 피장(皮匠), 즉 무두장이 일을 하는 시몬의 집입니다. 욥바는 요나가 이방 지역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했을 때 정반대인 스페인으로 도망치려고 배를 타기 위해 내려갔던 곳입니다. 바로 이 욥바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을 구원하라는 환상을 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머물렀던 곳, 무두장이 시몬의 집 역시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부정한 집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는 부정하고 경멸스러운 직업입니다. 가죽을 다룬다는 것은 곧 죽은 짐승을 다루는 것이기에 더러운 것을 오염시킨다는 율법 때문이지요. 따라서 무두장이는 유대인 동네로부터 격리되기 일쑤였고 상대방이 무두장이인 줄 모르고 약혼을 했을 경우 그 약혼을 파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의 백정 정도의 직업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으로서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베드로가 이 더러운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을 묵고 있었다는 사실이지요. 율법적으로 부정한 이들도 구원받을 계절이 무르익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
이제 베드로가 정오 기도를 위해 지붕, 즉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가장 더러운 곳으로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가장 거룩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장기를 느낀 베드로는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 순간 비몽사몽간에 신비한 환상을 봅니다. 하늘이 활짝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땅으로 드리워져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을 쳐다보았더니 온갖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레위기 11장에서 금하고 있는 동물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이런 짐승의 고기는 먹어서 안 되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고기 종류 중에는 지느러미가 없고 비늘이 없는 것을 피해야 했습니다. 새종류 중에는 독수리,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부엉이와 같은 새들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기어 다니는 길짐승 가운데에는 족제비와 도마뱀을 부정한 것으로 금했습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레위기에서 금하고 있는 동물은 하나 같이 정상과는 다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정상적인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조개류와 뱀장어는 물고기의 자격에 맞지 않습니다. 조류는 날도록 되어 있는데 타조는 날 수 없으므로 부정하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유대인의 음식에는 비정상적인 것 혹은 불량품은 철저히 부정한 것으로써 배제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제사용 짐승에게 까지 연결되는데 누구도 성전에 다리를 절거나 흠있는 양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흠없는 제물을 원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놀라운 것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흠있는 제물과 흠없는 제물에 관한 까다로운 규정은 심지어 사람을 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나누는데 까지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1: 17-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한 마디로 장애인들은 몸에 흠이 있기 때문에 제사 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율법이지요. 오늘의 기준으로 본다면 사람의 거룩함의 등급을 성별이나 인종, 건강상의 이유로 매긴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 남자들은 날마다 "나를 이방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여자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침 기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이와 같은 인간의 등급이 다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흠없는 자들보다는 흠있는 자들을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짐승처럼 여기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셨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나병을 앓는 사마리아인을 고쳐주셨고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사마리아 여인을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흠있는 자나 흠없는 자나 누구나 다 끌어 안으셨기 때문에 오직 흠없는 자만 하나님이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본 바리새인들과 사사건건 충돌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우주적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 율법 속에서 자랐고 어떻게 해서든지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에 더러운 이방인들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례에 관한 각종 율법은 특히 더러운 것의 전염과 오염을 경계했습니다. 환자, 이방인, 시체, 특정 동물은 물론 곰팡이에 닿아도 불결한 것이 전염된다고 보아서 일체의 접촉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같은 흐름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더러운 것과 접촉하면 오염된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더러운 것을 깨끗이 고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오염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깨끗해졌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을 더럽게 한 것이 아니라 혈루의 근원이 말라 온전한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12세 된 소녀의 시체는 예수님을 더럽게 오염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불결하게 오염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병자, 장애인, 죄인들과 같이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자들을 오염의 소굴로 보신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베푸시는 큰 잔치에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이 닥치는 대로 초청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방인들은 더럽다고 해서 피해 왔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리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보자기 안에 각종 더러운 짐승들이 들어가 있는데 한창 시장기를 느끼는 베드로에게 그 더러운 것을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당연히 거절합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14절).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아마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어조는 이랬을 것입니다. "잔말 말고 먹으라면 먹어! 그것이 정한 지 부정한 지를 결정하는 게 누구냐? 너냐? 아니다! 나 하나님이다! 내가 깨끗하다고 하는데 왜 네가 잔말이 많으냐?" 호통을 치시는 것이지요.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더욱 더 가까워진 주님의 보좌>
하나님이 이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신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율법적인 사고에 묶여있던 베드로는 이방인은 더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니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더럽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설교를 했는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사도행전 10장은 끝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편견과 장벽이 무너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성령, 한 세례, 한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하신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지 말고 유대인의 대표로서, 고넬료 역시 이방인의 대표로 봐야할 것입니다. 고넬료나 베드로는 모두 복음의 능력으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행 10: 28)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이제 고넬료는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상관없이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필립 얀시는 베드로가 본 환상은 충격을 많이 받을수록 의미가 살아난다고 하면서 현대적 버전을 말합니다. 미국 텍사스 경기장에서 아주 보수적인 교단 남침례교의 총회가 열리고 있는데 천상에서 경기장 위로 온갖 술을 갖춘 술집이 내려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시라!" 그 때 남침례교인들은 "주님, 우리는 절대금주자들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도 복음을 전해서 그 집안 식구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줍니다. 우리 모두가 다 흠이 있고 불완전해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백악관에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계급 질서에 따라 정해져 있습니다. 보통 시민들은 어느 선 이상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 역시 이와 같은 위계질서를 분명히 했습니다. 심지어 신체장애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큰 장애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누구나 다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10: 19-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집무실은 고위 관리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가 대통령을 접견할 수 없었지만 두 살배기 아들 존은 노크도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집무실에 들어가 노는 사진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아빠였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이제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떤 위계질서와도 상관없이 그 하나님 아빠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에게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이 사실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