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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정론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교)와의 대담을 진행했다. 방학을 이용하여 입국한 강영안 교수와 대담했는데, 2019년 6월 28일 편집장 안재경 목사가 진행했다. 그 대담내용을 풀어서 전한다. |
인터뷰이: 강영안(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인터뷰어: 안재경(개혁정론 편집장)
안: 교수님, 작년에도 방학을 이용해서 귀국하셔서 베리타스 포럼을 포함하여 이 곳 저 곳에서 강의하셨고, 저희 <개혁정론>과도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올해 역시 방학을 이용해서 다시 귀국하셨는데요. 1년 동안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면서 어떠셨는지, 그리고 이번에 나오셔서 어떤 강연들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강: 작년 고려대학교에서 베리타스 포럼을 하고 출국해서 곧장 작업에 들어간 게 지난 5월에 나온 『대화』(복 있는 사람)라는 책입니다. 베리타스 포럼에서 했던 강의와 콜라보 강의를 저와 같이 한 우종학 교수(서울대 천문물리학부)와 나눈 대담이 실려 있어요. 9월부터 다시 학기가 시작되어 강의를 했는데요. 칼빈 신학교에서 하는 강의는 주로 박사(Ph.D)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신학’(Philosophical Theology) 강의인데요, 지난 가을 학기에는 칸트가 신학과 윤리, 종교에 미친 영향을 다루었습니다. 봄 학기에는 목회학석사(M.Div)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변증학’ 강의를 칼빈에 간 뒤로 두 번째로 했어요. 필수과목이어서 모든 학생들이 한번은 들어야 하는 과목이지요. 신학석사(Th.M) 학생들에게는 논문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연구방법론’ 강의도 지난 봄 학기에 했지요.
안: 골고루 다 가르치셨네요. 연구방법론을 가르치신 것도 흥미롭고요.
강: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나에게도 물론 유익했고요. 근 30년을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요. 대학원 교육에서 제대로 된 학술 논문을 쓰는 훈련이 참 약했다고 생각해요. 되돌아보면 유럽도 이 교육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주제를 정하는지, 선택한 주제에 관하여 나의 주장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주장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이런 훈련을 하는 시간이 연구방법론 수업입니다. 한국 학생들뿐만 아니라 미국 학생들도 글 쓰는 것을 보면 거의 ‘리포트’ 수준입니다. 그야말로 ‘보고서’이지요. 이런 저런 것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거지요. 논문을 쓴다고 하면서 대부분 보고서를 쓰고 있어요. 학술 논문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학술 논문’(academic paper)이라고 하면 그곳에는 분명한 주장이 있어야지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구성해 내는 것이 논문이거든요. 이 훈련을 지난 학기 학생들에게 시켰지요.
안: 한인교회와 한인 목회자를 위해서도 가르치신 것으로 아는데요.
강: 북미개혁교회(CRCNA) 교단에 소속되어 한인 교회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140 여분 계십니다. 그 가운데 스물 두 분이 작년 10월에 한 주간 칼빈 신학교에 모였어요. 내가 ‘일상과 목회’라는 주제로 내내 혼자서 강의를 했지요. 강의를 했다기보다는 사실은 성도들이 일상에서,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목회해야 할 지 같이 묻고 생각하고 다시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함께 씨름한 모임이었지요(이 모임을 올 10월 칼빈신학교에서 다시 일 주일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달라스에 있는 교회에서 2박 3일씩 신앙강좌를 하였지요. 작년 11월초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주 고신 총회에서 다원주의에 관한 특강을 하기도 했고요.
안: 이번에 귀국하셔서 어제(6월 27일)는 고신 서울서부노회 교역자회와 장로회 연합 강연을 하시고 오늘(6월 28일)은 청어람 아카데미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 네. 남서울교회에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모시고 ‘교회의 세속화와 세속의 성화’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어요. 오늘 저녁에는 청어람 아카데미에서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내일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투자전문가 빌 황 회장이 출연해서 만든 Grace and Mercy Ministry 재단에서 연세대에서 하는 행사에 가게 됩니다. 주제는 ‘신앙과 일터’와 관련된 것인데요, 내 책 『믿는다는 것』(복 있는 사람)을 성우가 한 장을 읽고, 그 내용을 가지고 패널토론을 하는 모임이 이 가운데 들어 있어요. 주일 설교와 강의도 몇 군데 잡혀 있고요. 다음 주에는 ‘Reformed Inklings’라는 이름을 붙인 모임이 여의도 금융센터에서 이틀간 있게 됩니다. 서른 분을 초청하여 여의도 호텔에서 머물면서 세상과 일상, 일상 가운데서의 신앙 생활에 관해서 식사 시간 빼고 열여섯 시간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실하게 살 것인가?” 라는 물음을 내걸었어요.
안: 이번에도 쉬지 못하시고, 계속 스케줄이 잡혀 있네요.
강: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와 시애틀 교회에서 40시간 넘게 강의하고 곧장 귀국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게 힘들어요. 막상 강의는 어렵지 않게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몸이 무척 피곤합니다.
안: 어제 오늘 강연하시는 것이 ‘교회의 세속화, 그리고 세속의 성화’라는 주제입니다. 사회가 세속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교회의 세속화를 먼저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강: 유럽의 경우,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이나 교회 소속 재산을 매각하는 일이 발생했어요. 원래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이던 것이 민간인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을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세속화’라는 말이 서양에서 쓰이기 시작할 때는 그런 뜻이었지요. 교회의 것, 종교적인 것,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세상 것, 일반인들의 것, 속된 것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세속화’란 말이 전문 용어로 사용될 때 가진 뜻입니다.
안: 교회재산이 민간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 세속화라는 말의 원래 뜻이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후로 세속화의 영역이 계속 확장되었겠네요.
강: 그렇죠. 그게 점차 전체 유럽사회에 영향을 미쳤지요. 교회 재산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예술, 문화, 교육으로 세속화의 대상이 확대되어 갔지요. 여기에 가정이나 학교, 기업, 국가라는 제도도 포함됩니다. 교회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여러 삶의 영역과 제도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감소되었지요. 종교적인 영향력이 감소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도 ‘세속화’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세속화’란 말이 처음에 사용될 때는 교회 재산이 민간인, 즉 일반인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이지만 그게 점차 확대되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 기독교의 영향, 교회의 영향, 또 다르게 말하자면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의 영향이 대폭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확대되어 사용된 것이지요. 오늘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세속 사회’, 곧 ‘세속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은 종교와 종교를 집행하는 분들(목사, 신부, 스님)의 영향력이 정치나 교육, 경제나 예술과 같은 공공 영역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안: 서양 선교사들은 이미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강: 그렇지요. 서양의 경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세속화가 훨씬 더 강화되었지요.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당시의 미국사회만 하더라도 벌써 세속화된 사회였거든요. 기독교 신앙이 중요하고 교회에 다니냐 안 다니냐 하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미 정치, 경제, 학문 영역에 미치는 신앙의 영향, 교회의 영향은 대폭 줄어든 상황이었죠. 그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미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거든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세속사회라는 것이 이미 전제가 되어 있었다고 봐요. 그 당시 우리 한국 사회는 물론 완전한 세속 사회는 아니었지요. 당시는 우리나라가 유교 사회였죠. 유교는 기독교만큼 성속의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아요. 유교는 일종의 일상의 종교이거든요. 교회당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향교라는 것이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냅니다만.
안: 유교에서는 소위 말하는 제사장이 없잖습니까?
강: 유교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제사장이잖아요. 집이 말하자면 교회이고요.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가 자식들을 가르치고 조상들에게 제사지냈지요.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끼리는 우애 있게 지내고, 바깥에 나가서는 성실하고 신뢰를 받을 수 있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지요. 효제충신(孝悌忠信), 이것이 원시 유교의 핵심이지요. 유교의 종교생활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요. 유교에서는 성과 속의 구별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유교에는 ‘천’(天) 개념이 분명히 있거든요.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움, 하늘의 보호, 하늘의 가호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까 유교 사회는 완전히 세속화된 사회라고는 할 수 없지요. 모종의 거룩한 영역과 거룩한 사람과 거룩한 날들이 있죠. 거룩한 날이라는 것은 조상들의 제삿날 같은 날이죠. 제사 지낼 때 목욕재개하고 생활도 잘 정돈된 방식으로 해서 제사를 지내거든요.
안: 기독교가 유교사회의 전통을 깨뜨리잖습니까?
강: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제도나 권위를 깨트리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죠.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이미 세속화된 사회에 적응된 기독교였다고 나는 봐요. ‘세속화된 사회에 적응된 기독교’란 기독교 신앙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개인의 신앙 체험과 신앙 고백에 국한된 기독교를 말하지요. 교회도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나 사적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계몽의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는 정치, 경제, 학문 등 공적 공간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다만 사적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지요. 정치나 경제나 도덕이나 예술 등의 영역이 종교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 영역이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각 영역이 종교로부터 독립한 고유의 주권, 고유의 규칙과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 사적인 문제에 국한해서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안: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자신의 믿음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는데요.
강: 이제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에 오면서 양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예측과는 달리 종교가 완전히 밀려나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종교도 삶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학문, 이런 영역과 나란히 종교도 하나의 영역이 된 것이지요. 가정, 학교, 기업, 국가, 이런 기관과 나란히 교회도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의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고요. 종교 행위도 정치 행위, 경제 행위, 학문 행위와 나란히 여러 가능한 행위 가운데 하나의 행위로 등장하게 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내재성의 영역에 갇히게 되었다는 거지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이것을 ‘내재적 틀’(immanent frame)이라 불렀어요. 정치나 경제나 학문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일종의 세속의 영역이 된 것이죠. 세속 영역에 든 것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은 선택 가능성이에요. 종교도 이제는 여러 영역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택 가능성의 영역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안: 종교도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과목이 되었다는 말이군요.
강: 20세기 오면서 사람들은 종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 거지요. 힌두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이 가운데 기독교도 있다는 것이지요. 종교도 이제 정치나 경제, 또는 예술 영역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지요. 종교 안에서도 여러 종교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고요.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헤레티컬 임페러티브’(Heretical Imperative)란 말을 붙여요. ‘헤레티컬’은 ‘이단적’이고 ‘임페러티브’는 명령이니 ‘헤레티컬 임페러티브’를 ‘이단적 명령’, ‘이단이 되어야 할 명령’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지요? 사실 ‘헤레티컬’이라는 말은 희랍어 하이레시스(hairesis)에서 온 말이지요. 신약성경에는 이 말을 ‘이단’이라고 번역해 놓았지요(갈 5: 20; 벧전 2:1). 그런데 원래 ‘하이레시스’라는 말은 ‘선택’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피터 버거가 말하는 ‘헤레티컬 임페러티브’는 ‘선택의 명령’, ‘선택의 필연성’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요. 언제 선택하게 됩니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하는 행위가 선택입니다. 종교도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은 삶의 여러 영역 가운데 종교도 선택의 대상이 되고, 여러 종교도 종교 시장에 물건으로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하나의 가능한 옵션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는 말입니다.
안: 음식을 선택하는 것 처럼요?
강: 다른 곳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식당에 가면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하더라도 무슨 채소를 넣을 거냐, 고기는 무엇을 넣을 거냐, 소스는 뭘 할 거냐를 선택해야 해요. 미국뿐만 아니라 이제 세계는 ‘선택 가능성의 사회’가 되고 있어요. 한국 같으면 아파트에 살 거냐, 개인주택에 살 거냐를 선택하지요. 전세를 살 거냐, 월세를 살 거냐를 가지고 선택해요. 경제적 능력에 따라 선택 가능성이라는 게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지요. 세속사회의 중요한 특성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선택 가능성이에요.
안: 초월성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네요.
강: 중요한 것은 내재적으로 본다는 거에요. 초월적인 것을 배제하고 오직 내재적인 것이 중요해요. 경험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처분할 수 있는 삶의 영역으로 타당성의 영역을 일단 제한하죠. 종교는 그걸 통해서 초월을 내다볼 수 있는, 초월을 엿볼 수 있는 통로란 점에서 중요하지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초월성이 아주 강한 종교죠. 우리의 내재적 경험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면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분이지요.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임재하시는 분이시지 우리 손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분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면서 내재해 계시는 분이지요. 그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내재 속에 갇히지 않고 초월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죠.
안: 기독교는 내재에서 초월을 보여주어야 하는 셈인데요.
강: 그렇죠. 세속시대에 기독교가 처한 과제는 여러 옵션 가운데 가장 좋은 옵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오늘 교회가 사람들한테 ‘이게 가장 좋은 옵션이니 이걸 선택하시오’ 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교회 세속화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과연 교회가 이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교회가 초월성의 통로, 초월적 가치의 통로가 되기보다는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됐다는 말을 하잖아요.
안: 뼈아픈 이야기인데요. 목회에서도 세속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강: 성장주의가 그것이죠. 목사님들이 ‘일을 제대로 했냐, 안했냐?’ 하는 것을 측정하는 방법이 뭐에요? 두 가지가 있잖아요.
첫째로, 교인 수가 얼마나 되냐?
둘째로 헌금이 얼마나 늘었냐?
기업체에서 업적 평가하는 방식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지요. 물론, 교회는 기업체에서 업적 평가하는 것처럼, 아니면 대학에서 교수 평가를 하는 것처럼 평가지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측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교회 장로님이나 목사님들 대부분이 성도 수가 늘어나고 헌금이 늘어나면 목사님이 목회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이게 목사님의 업적 평가 기준이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져온 기준이지요.
안: 요즘은 교회도 생존을 걱정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강: 그렇죠. ‘개교회주의’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깊숙이 깔려있는 이데올로기 하나를 들라고 하면 개인주의일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교회에 나타난 것이 ‘개교회주의’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라 하면 ‘우리 교회’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나 저 교회나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지체라는 의식이 없잖아요. 달리 말하면 공교회 의식이 없거든요.
어떤 분이 사랑의 교회 문제를 지적했더니 그 교회 권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왜 우리 교회 문제에 당신이 개입하시오. 이건 우리 교회고 당신은 당신 교회나 잘하시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거지요. 내 교회만 생각하는 것, 이것도 교회 안에 들어와 자리 잡은 세속의 방식입니다.
안: 교회도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교인들의 관심도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에 온통 사로잡혀 있지요. 이렇게 세속화된 교회, 세상을 닮은 교회가 되어서는 세속사회의 테이블에 놓고 “이거 무조건 사세요” 라고 얘기할 수가 없는 거죠. 오늘날은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나 의식이 많이 발전했죠. 수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수준도 높아졌죠.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도덕의식도 높아졌어요. 과거 같으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이야기하거든요. 오늘날 경영학 이론을 보면요, 기업체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배려, 공감, 심지어 감사, 용서 같은 가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을 해요. 교회는 오히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배려라든지, 감사라든지, 용서라는 것들은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게 교회가 세속화됐다는 표징이지요. 아까 이야기한 세속화와는 물론 다른 의미죠. 교회가 세상처럼 되었다는 말이지요.
안: 사실, 목사는 세상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답을 내놓습니다.
강: 이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지요.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 현존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은 목사님들께는 그렇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어요. 목사님들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예배 참석 잘하고, 기도 잘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전도하고, 헌금 잘하면 좋은 교인이라 목사님들은 생각하기 쉬워요. 교회 안의 활동만 놓고 생각하면요.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교회 생활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잖아요. 목사님들은 교회가 일터에요. 목사님들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교인들을 잘 돌보고,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그분들을 말씀으로 위로하는 일에 충실했냐를 가지고 얘기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장로들과 성도들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세상이잖아요.
안: 참된 신자 됨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 결정된다는 말인데요.
강: ‘결정된다’기보다 ‘드러난다’는 것이 옳겠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사느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있느냐는 교회 안에서만 드러나지 않고 세상에서 드러나지요.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교회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도 잘하면 좋은 신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게 성경적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울 서신을 보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계속 강조해요. 복음을 따르는 삶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거든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요.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지요. 이것을 강조하는 신학이 우리 한국교회에는 너무나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안: 교수님 보기에 목사들이 설교에서 세상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강: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성도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 치열하게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는가, 물어보아야 해요.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의 기초는 바로 창조의 신학과 구속과 성화의 신학, 줄여서 말하자면 일상의 신학일텐데요. 이 부분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봐요. 알았다 하더라도 크게 강조를 하지 않죠. “성도의 삶의 자리는 세상”임을 강조하면 교인들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목사님들께 있는 듯해요. 현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위기에 봉착한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독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데는 사실 관심이 없었거나 무시한 탓이 아닌가 해요. 교인들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요. 이것도 힘이 들긴 하지만 세상에서조차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애쓰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어떤 분이 목회에 성공한 분이겠어요? 천 명, 만 명, 십만 명을 교회에 모아서 설교하는 분이 목회에 성공한 분이겠어요? 아니면 비록 백 명, 이백 명의 아주 적은 숫자라 할지라도 세상에 나와서 신자로 살려고 하는 사람, 넘어지고 깨어지고 고민하면서 세상에서 신자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키우는 목사님이 성공한 목회자이겠어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의 참됨은 교회 생활보다는 사실은 삶의 자리인 일상에서, 일터에서 드러난다고 보아요.
안: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제대로 세속화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강: 그렇지요. ‘잘못된 세속화’와 ‘제대로 된 세속화’를 구별할 수 있겠지요. 잘못된 세속화는 교회가 세상을 닮아,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제대로 된 세속화는 교회가 세상을 품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임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까닭도 잘못된 세속화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세속화를 하자는 것이 아닐까요? 제대로 된 세속화는 ‘세속의 성화’라고 불러야 할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소금과 빛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편지로 사는 것이지요. 세상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줄곧 쓰는 이 은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먹고 잠자고 일하는 일상의 삶을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 앞에서 살아드리는 것, 그게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안: 종교개혁이 성과 속을 구별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요.
강: 중세의 성속 이원론과 방금 이야기한 내용은 서로 구별되지요. 날과 영역과 일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별하는 방식이 중세의 성속 이원론이거든요. 서양 중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비슷한 전통이 있었지요. 성황당은 거룩한 곳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은 속된 것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그런 방식이 날과 장소에 적용되죠. 주일은 거룩하고, 평일은 속되고, 교회는 거룩하고, 집이나 다른 곳은 속되다는 방식 말이지요. 이런 성속 이원론이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사실상 깨어지죠. 중세적인 방식은 일종의 ‘실체론적’인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신부나 수녀, 수도사는 거룩한 직업이고, 거룩한 신분이라고 생각하지요. 교사가 된다든지, 농부가 된다든지, 심지어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속된 일이라 생각했죠. 그런 게 다 실체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루터나 칼뱅을 통해서 발전된 성과 속, 속과 성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관계론적’이고 ‘기능적’이에요. 실체가 아니라 관계 또는 기능.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냐, 아니면 내 영광과 내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냐로 나뉘지요. 내 이익을 위해 하는 거라면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속된 것이 되고, 아무리 속되게 보이는 일이라도 진정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거룩한 것이 되는 거죠. 이렇게 관계론적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속과 성과 속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 먹고 자고 일하고, 아이 키우고, 공부하고 사업하는 일들을 주님 앞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이 일들이 거룩한 일이거든요. 일상의 삶 속에서 세상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요.
안: 우리 사회는 너무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데요. 진리 상대주의는 오래된 이야기이고요.
강: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난 현상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나는 다원성이에요. 다원성은 차이와 관련되어 있어요. 종교도 여러 종교가 있고, 음식도 여러 음식들이 있고, 인종도 여러 인종들이 있잖아요? 서로 다름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에요.
다른 하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페이크 뉴스’(fake news), 곧 ‘가짜 뉴스’들이 등장하면서 말과 사물 사이에 일치가 깨어지는 현상이에요. 모자는 누가 뭐라 해도 모자고, 의자는 누가 뭐라 해도 의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말과 사물의 일치에 대해 의심하는 시대에요. 아무리 ‘모자’를 ‘모자’라 해도 “저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혐의를 가지고 저렇게 부른다”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지요.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라는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내 편, 내 친구, 내 동료들이 “옳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참이고,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면 그게 거짓이라는 것이지요.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어버려요. ‘어느 편이 지지하느냐’가 중요해졌어요. 내 편에서 이야기하면 참이고, 저쪽 편에서 이야기하면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안: 지금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 이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될 건가가 문제에요. 당연히 설교를 통해서, 전도를 통해서, 아니면 삶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을 해야죠. 참된 것을 말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고, 주장해야 하지요. 중요한 것은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거죠. 실천해야지요. 참된 것을 말했다면 말한 대로 행해야지요. 참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말에만 제한하지 않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성경은 진리와 관련해서 ‘참된 것을 말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를 행한다’, ‘참된 것을 행한다’’(요일 1:6; 요이 1:4)라고 하지요. 진리는 그냥 단순히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는 거란 말이죠. 말과 행위. 신앙과 행동. 이것들의 일치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안: 지금은 무관심이 제일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강: 미국 사회나 우리 한국 사회를 보면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 심각해요. 무엇이 참이냐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네 편, 내 편 나누기에 바쁘지요. 그리스도인은 누구 편일 수가 없잖아요. 중요한 것은 참 되냐, 그릇 되냐 하는 것이지요. 옳으냐, 틀리냐가 중요해요.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냐, 기뻐하지 않을 일이냐 말이지요. 거짓되고 옳지 않은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거든요. 그러잖아요? 미가서 6장 8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에게 선한 것을 보이셨으니 그 선한 것,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세 가지라고 말하잖아요.
정의를 행하라(Do justice).
인자를 사랑하라(Love mercy).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라(Walk humbly with your God).
순서대로 보자면 정의 또는 공의가 먼저이고, 다음이 자비 또는 인애, 사랑이고, 마지막으로는 겸손 가운데 보이는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지요.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것은 버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게 뭐예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에요. 새로 번역된 걸로 보면 ‘정의’와 ‘인애’와 ‘믿음’을 버렸다고 되어 있어요. 미가서와 꼭 같지요. 판단할 때 공정해야 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가운데 서로 믿음을 주고받고 나누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한테 주어진 사명인 것 같아요.
안: 우리는 편을 가르는데 익숙해져 있는데요.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저 사람은 좌파다’, ‘아, 이 사람은 우파다’라고 편을 갈라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뭐가 사실이냐’, ‘뭐가 진실이냐’, ‘지금 뭐가 일어나고 있는가’,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가 중요하지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극심한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어요. 인식과 의식에서의 양극화, 소유에서의 양극화, 지식에서의 양극화 등등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분이듯이 화해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싸움 붙이고, 편 가르고, 깃발 들고 하는 게 아니라 양쪽 편을 서로 화해시키는 일이지요.
안: 오늘날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강: 역시 중요한 것은 진실이에요. ‘대체 무엇이 진실이냐.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어보자’는 태도를 갖는 것이지요. 진실에 대한 열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쉽지는 않지요. 대부분의 진실이 가려져 있고, 그게 이런 언론, 저런 언론을 통해서 정반대로 보도될 수도 있어요. 가짜 뉴스인지 진짜 뉴스인지 가려내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크로스 체킹을 할 수 밖에 없죠. 이것도 챙겨보고, 저것도 챙겨보고. 인터넷으로 뭘 보더라도 나는 곧장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얼마 전에 한국 어디 인터넷을 통해서 본 게 ‘미국인들의 30%가 북한을 공격해서 100만 이상이 죽어도 좋다’는 의견을 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어요. 우리 집사람이 처음에 그 이야기를 하기에 이게 가짜 뉴스인지 한번 체크해보자 생각했어요. 계속 검색해서 보니까 워싱턴 포스트에 그 기사가 실려 있더라고요. 미국에서 나온 조사 결과를 워싱턴 포스트에서 실었다면, 그것은 믿어줘야겠죠. “아, 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아, 이 사람들이 전쟁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진짜 뉴스인지 아닌지 우선은 체크해봐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진실에 대한 관심을 비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안: 교회에서는 여전히 중세의 성속 이원론 개념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교회 안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헌금 많이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강: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거죠.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보는 세 가지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요.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것으로 삼은 사람들,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이들은 이 세상에, 이 세상 안에 살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을 보존하사 하나 되게 하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세 번째로, 예수님은 이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하셔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저들을 세상으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두시되, 보냄 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려고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이지요.
안: 여전히 많은 신자들은 이 세상이 죄악 된 곳이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이 세상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반기를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잖아요. 이 세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잖아요. 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이죠. 성경은 세상을 철저히 긍정하지요.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세상이지요. 세상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부정하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긍정과 부정 속에서 보냄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죠.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불러내시고 다시 보내주셨으니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지요.
안: 아직까지 예수 믿고 죽어 천국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 전통적 성속 이원론에 그런 생각이 담겨 있지요. 이 세상은 떠나야 할 대상이지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건짐 받았으니 마치 구명보트, 생명보트를 탄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할 때에도 하늘이 위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하거든요. 이 땅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온전히 회복하시는 것이지요. 그 가운데서 우리가 귀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지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은 남게 될 것이고 더 좋은 상태, 완전한 상태로 전환되겠지요. 우리의 삶은 이러한 종말론적 희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삶이지요. 이 땅의 삶이 영속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회복할 세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이 희망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것이지요.
안: 사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말하기 전에 우리 자신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든데요.
강: 우리 힘으로 도무지 살 수 없지요. 예수님의 기도처럼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존해 주셔야지요. 하나 되게 해 주셔야 하지요.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셔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보냄 받은 자로서 살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보존, 하나 됨, 진리로 거룩하여짐이 드러나는 곳이 무엇보다 교회여야 하는 것이지요. (1) 악으로부터 보존 받고, (2) 사랑으로 하나 되고, (3) 하나님 말씀, 곧 진리로 거룩해지는 곳이 교회 공동체이지요.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공동체이지요. 이 교회에서 훈련받고, 싸맴 받고, 그래서 보냄 받아 나가는 데가 세상이에요. 우리 개혁신앙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했다는 것이 아닐까 해요. 굳이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카이퍼 신학이 가지고 있는 삼중구조를 좋아해요. 한편으로는 이 세상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과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거든요. 우리가 숨 쉬고 자연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나,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나, 지적 활동을 하는 것이나, 도덕적인 것, 법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공통으로 나누어주신 은혜가 있잖아요. 그것을 ‘common grace’라고 하지요. 나는 이것을 ‘공통은혜’라고 번역하는데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주신 은혜이지요. ‘일반은총’이라 번역해 쓰는 게 일반적인데 ‘일반’이라는 말이 이 용어의 뜻을 잘 드러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안: ‘일반’이라는 말 보다는 ‘공통’이라는 말이 더 좋겠네요.
강: 네. ‘공통은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 통치를 통해서 모두에게 다같이, 공통으로 나누어 주신 은혜를 통해 마련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에는 대립이 있잖아요.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티테제를 걸잖아요. 하나님에 대해서 대립하고, 반대하고, 저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세상의 삶의 방식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대립’을 이야기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불러내 주셨어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공통은혜가 바탕에 깔려 있지만 삶의 동기는 공통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불러 내 주시고, 주인 되어 주시고 왕이 되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지요.
이것을 카이퍼는 프로 레게(Pro Rege), 곧 ‘왕을 위하여’라고 표현해요. 왜 그리스도인이 학문을 해야 하고, 왜 교사로서 학교에서 일해야 하고, 왜 상인으로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고, 왜 부모가 아이를 키워야 되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주 되신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왕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보냄 받은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기이고 사명과 책임의 근거이지요. 이 삼중 개념, ‘공통은혜’(common grace)와 ‘대립’(antithesis)과 ‘왕을 위한 삶’(Pro Rege)을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 카이퍼였죠.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의 삶이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부름 받았어요. 세상에서 불려 나왔지만 다시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기 때문에 ‘왕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안: 고신교회가 교수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까?
강: 그렇지요. 이것이 저는 개혁신앙의 핵심이라 생각해요. 이 신학 전통을 나는 고신교회의 SFC 운동에서 배웠지요. 이 점에서 나는 늘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고려학원 이사로, 그리고 이사장으로 일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지요. 다같이 SFC를 했다 하더라도 이 전통을 공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고신 교회에 깊숙이 들어가 보았더니 이 정신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요즘 SFC가 영역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을 볼 때 이 정신이 그래도 면면히 흘러내려 오고 있는 게 아닌게 생각해요.
안: 오늘 인터뷰를 통해 교회가 세상 속에 있고, 교회가 성도들을 세상으로 파송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세워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귀한 통찰력을 주셨는데요.
강: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우리가 세우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다스려주실 때 가능하지요.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죠.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하나님이어요.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어느 곳이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때, 그 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꾸시는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우리를 이런 방식의 동역자로 불러주셨다고 나는 믿어요. ‘동역자’라는 말을 바울도 고린도후서(6:1)에 쓰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회복과 화해의 동역자로 부르셨지요. 이것이 나는 세상에서, 각자 처한 삶의 자리에서 성도가 누리는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안: 저도 예배 같은 경우에도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요. 하나님 나라도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강: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홀로 저 하늘 위 어디엔가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거든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반가워하고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믿음이지요.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일하느라 노력은 하지만 무엇 하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아닌 게 없거든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마시는 공기,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게 아니잖아요. 나 같이 공부하고 글 쓰고 가르치는 학자의 삶도 남들이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고 써놓은 글이 없으면 해나갈 수 없거든요. 그것이 다 타자의 존재, 타자가 한 노력을 내가 선물로 받아 누리고, 나도 같이 생각하고 같이 생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나누는 일을 하지요. 우리의 삶이라는 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없이 살 수가 없지요. 우리가 정말 신실하게 주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이 되는 거지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삶을 선물을 받았으니,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자비 안에 살아가는 삶이라고 보아요.
안: 교회문제로 다시 돌아가면 아까 말씀 하셨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훈련해서 세상으로 내 보내어야 되는데, 과연 교회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숙제인데요.
강: 나는 목사님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장로님들의 생각이 우선 바뀌어야 된다고 믿어요. 교회를 세상처럼 만드는 데는 장로님들의 기여가 크다고 보아요. 나도 장로이긴 하지만 장로들이 세상사는 방식을 교회에 가져와 교회를 세상판으로 만들어 버린 거에요. 목사님들도 덩달아서 함께 놀아났고요.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어버린 주요 원인이 여기 있다고 봐요. 세상에서 일하던 방식, 세상에서 사업하던 방식, 세상에서 뇌물주고 받던 방식, 세상에서 일 처리하던 방식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망쳐놓은 것이지요. 과거에는 장로 안 하려고 다들 피했잖아요. 요즘은 왜 서로 장로 하려고 그래요? 덕이 되고 이익이 되니까 그렇지요.
안: 우리가 배운 언어와 신학이 교인을 세상에서 제대로 살도록 만드는 것에 부적합한 것일까요?
강: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신학교육이에요. 신학교수들의 의식도 관련이 있겠지요. 말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곧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거든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세상으로 바꾸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지요. 신학자들이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한다고 하면서 잊어먹고 있는 게 교회는 세상을 위한 존재이고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 해요. 이걸 만일 깊이 생각하면 지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이나 내용, 훈련하는 방식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어요. 아까 얘기했던 대로 작년 10월에 북미개혁교회(CRCNA) 한인 목사님들과 일주일 씨름을 해보니까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나와 그 분들과 함께 나눈 내용이 성경과 개혁 신학 전통을 통해서 볼 때 마땅히 옳은데, 신학교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지 않았고, 교회에서도 자신들이 그렇게 목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안: 수많은 목회 방법론, 목회세미나가 있는데, 어떻게 목회해야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강: 목사님들의 역할은 일차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쳐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이지요. 여기에 역점은 ‘교인들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 갈 수 있도록’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넘어지고 깨어지지요. 교회에서는 별을 하나 달고 둘 달고 있다 해도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일등병보다 못해요. 팍팍 넘어지고 쓰러지지요. 여기에 교회의 존재이유가 있고, 목사님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넘어지고 상처입은 성도들을 싸매주고 힘내게 만들어 주는 역할이지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잘못을 같이 고백하는 은혜를 구하고, 그래서 다시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죠.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절을 보면 예수님은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죠. 이미 이겼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으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죠(요한 19: 29).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최종 승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다 이루신 그 때와 완전한 완성을 볼 때의 사이 시대, 곧 ‘중간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완성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종말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더욱더 필요한 게 교회이지요. 교회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키워주고 힘을 북돋아주는 곳이지요. 목사를 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에베소서 4장 11절 말씀을 얘기해야 하겠지만 그러면 다시 한참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안: 교수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기회에 신학교의 문제를 포함하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훈련시켜서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는가에 대해 심도 깊이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강: 내가 일상의 철학과 신학을 생각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는 목적이 방금 한 질문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다음에 또 만나지요.
강교수는 ‘교회의 세속화, 그리고 세속의 성화’라는 강연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2. 세속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크게는 사회의 세속화와 교회의 세속화가 있다. 3.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는 이제 하나의 옵션이다. 옵션이 된 사회에서 기독교가 보여야 할 삶은 세상과 다른 삶, 세상을 품는 삶, 세상으로 보냄받은 자로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삶이다. 4. 세속화된 오늘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신자인 그리스도인과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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