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0
7월6일[연중 제1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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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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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길을 나서게 되어 05:00에 편집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대여섯 분 신부님의 강론을 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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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o0QBWvVCRY
[의정부교구 김지수 아우구스티노(백석동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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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한 아이의 출생이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저출산 시대인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다들 아이 얼굴 구경하러 가고, 마을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립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이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결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결혼식이 거행되고, 주님 안에 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혼인이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두 가문이 만나고, 두 가치관과 두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아왔는데, 이제는 함께 걸어줄 동반자가 생긴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평생 동지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이토록 기쁨 충만한 혼인 잔칫날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상 쓰고 있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잘 차려진 축하연에 단식한다며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우울하게 앉아있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축제입니다.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은 혼인 당사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딱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세상 멋진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그분과 이 세상, 그분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그분과 우리 죄인의 혼인을 의미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매일 새롭게 결합되고 한 몸이 됩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혼인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주님과 혼인한 우리는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그 혼인을 갱신한다니, 이 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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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hyhrzIpyp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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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깁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 대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3번 죽을 뻔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만은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어머니는 믿어주었습니다. 술과 마약을 하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어머니는 깨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마크는 짜증을 내고 방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대화 한 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믿어준 대로 나쁜 친구들을 끊고 술과 마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프로레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어나가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가 저의 영웅이에요. 저의 모든 것, 제가 되길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저를 믿어준 건 오직 엄마뿐이었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진짜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청년들을 위해 전 세계 강연을 하러 다니는 전직 레슬러 ‘마크 메로’(marc mero)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린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보통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부모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부모 덕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쁜 아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는 밥을 차려줄 때까지만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때 자신을 잡아줄 새로운 부모님, 즉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동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도 대부분 그 이웃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영원한 아기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힘들 때 의지할 신을 찾습니다. 찾아서 그 신을 위해 살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면 덜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식하면서도 그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단식을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같은 단식이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하느님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나, 그 단식만의 가치 때문에 한다면 결국 그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록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나 새로운 가르침인 이유는 그 모든 율법을 당신을 위해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나쁜 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6-9)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자크 라캉이란 학자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창조되었습니다. 성자께서 성부를 위해 사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쁜 놈이 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영광이 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나쁜 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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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2019년 8월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매년 6월에 교구사제모임이 있습니다. 2020년 6월에는 과테말라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고, 교구사제모임은 취소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지 않아서 교구사제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22년에는 댈러스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있던 신부님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신부님만이 저보다 먼저 미국으로 왔습니다. 2023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2019년,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있던 신부님들은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고, 저와 같이 2019년에 미국에 왔던 신부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24년에는 워싱턴 DC에서 교구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의 신문사 일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겼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온 신부님도, 저와 같이 왔던 신부님도 모두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오래 되었고, 제일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시간의 무상함도 느껴집니다. 너무 오래있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고, 새 술도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부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처럼 미국에 온지 오랜 된 사제가 낡은 부대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사제가 새 부대라는 의미도 아닐 겁니다. 저처럼 33년 된 사제가 오래된 술은 아닐 겁니다.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이 새 술은 아닐 겁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 술과 새 부대는 ‘생각’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언제나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오래된 술과 낡은 부대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새 술을 준비하였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비록 많은 지식이 있고,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낡은 부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였던 어부들은 새 부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은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어버린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멍에를 남에게 씌우고 편한 길만 가는 사람도 결코 새 술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도 새 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새 술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술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가 새 술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가 새 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새 술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새 술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던 착한 이웃이 새 술입니다. 겸손한 사람,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능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 술이 되는데 직책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새 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감사 할 수 있다면 저도 새 술과 새 부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병들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깨끗하게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인해서 매일 새로운 세포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들의 신앙생활로 거듭나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밭에는 농부가 원하지 않는 잡초가 함께 자라나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한 것들이 자리 잡곤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악한 세력들입니다. ‘탐욕, 분노, 질투, 게으름, 미색, 교만, 과식’입니다. 이것들은 암세포와 같아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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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별로 단식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묻는다. 예수께서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 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인,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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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헌 옷”과 “헌 가죽 부대”의 공통점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변화도 새로움도 없이 언제나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가장 작은 이’와 나누라는 말씀, 용서하여야 한다는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때때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새 포도주”가 되어 “헌 가죽 부대”인 내 삶을 터뜨려 버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음에요. 예수님, 이 말씀은 저에게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마음이 자주 든다면, 그 믿음은 이미 “헌 옷”과 “헌 가죽 부대”가 되어 버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때, 어느새 기도하는 삶이 사라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고해성사를 한 지 한참 지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세례 때 예수님을 새 옷으로 우리 모두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입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옷이 다시 빛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이 새 부대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담아낼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준비하며 기도하는 삶을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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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4-17)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은 하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는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단식입니다.
2) ‘새 옷’과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등을 뜻합니다.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바리사이들의 규정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헌 옷을 꿰매려고 새 옷을 조각내지 마라.”입니다. 16절의 표현만 보면, 헌 옷이 찢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은 표현인데, 예수님 말씀의 뜻은 ‘헌 옷’을 잘 보존하라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은 그냥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도 같은 뜻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라는 말씀 때문에, ‘헌 가죽 부대’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헌 가죽 부대’는 그냥 버리고, ‘새 포도주’를 잘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구약은 버리고 신약만 잘 보존하여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은 신약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들을 실천하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성경과 구약의 율법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복잡한 규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규정들을 모두 무시하셨고,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새 옷’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킨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또는 ‘의무감’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옷’을 ‘헌 옷’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통해서 참된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얻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에 기쁨은 없고 부담감만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습니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또 신자들의 여러 가지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느냐고 야단만 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 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신자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은 ‘목자’들의 임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 문제에 관한 유대인들의 규정들을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는 유대인들의 잡다하고 복잡한 규정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뜻은, “규정들만 잘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들어간다.”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치유와 화해의 기쁨을 말해야 합니다.
사실 의무감으로 보는 고해성사는 회개도 아니고, 그것으로는 치유와 화해의 은총을 얻지도 못합니다. 판공 때에 의무적으로, 억지로 고해성사를 보면서, 점점 더 고해성사가 부담스러워지고, 그래서 고해성사를 기피하게 되는 것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잘못입니다. 단식재, 금육재, 여러 전례와 기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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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단순히 ‘단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전통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모습에서 순수한 궁금증보다는 묘한 우월감과 비판 의식이 느껴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신앙생활을 정해진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정도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요즘 여성 신자들은 미사보를 안 쓰나요?” “왜 요즘 신자들은 묵주 기도를 무릎 꿇고 바치지 않나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앙의 핵심을 마주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규칙과 전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새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따르는 규칙과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규칙과 전통으로 이루어 놓은 개인과 공동체를 찢어지고 터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닿는데도 어떤 찢어짐이나 터짐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고요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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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것을 헌것에 담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것을 잘 보존하려면 찢어지지 않는 새 부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사이들과 단식에 대해 논쟁하실 때였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신심 깊기로 소문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축일에 하는 의무적인 단식 말고도 자발적으로 단식을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단식이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진정한 표지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려는 위선적 행위가 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본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식은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에 비유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는 복음의 기쁨을 맛보는 제자들이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시며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깊이 섬기면서 단식으로 재계를 지켰지만, 그들의 낡은 율법에 대한 열정이 예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시는 복음의 새 부대에 담겨질 수는 없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허물어진 성읍을 다시 세우고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는 새 날을 희망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되돌려질 날을 예언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새로운 계약에 담아내는 제자들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비록 교회가 역사 안에서 박해와 타락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새 부대에 담겨진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일은 여전히 교회의 소중한 소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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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올바른 이라면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단식을 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에 ‘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음을 슬퍼하며 행하는 참회의 표지였는데, 예수님 당신을 통하여 이미 혼인 잔치, 곧 메시아 시대가 열렸고, 혼인 잔치의 신랑인 메시아가 그들과 함께 있으니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곧 신랑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길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백성이 슬퍼하듯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비록 신랑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을 곧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아니 그 신랑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는 단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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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9,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9,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도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표현인데 굳이 그렇게 강조해야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씀하신 표현 역시도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은 표현으로, 이를 체험하지 않으면 헷갈린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살다 보면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과 당연하지 않은 것의 당연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 ~하게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라고, 즉 들어 온 대로, 늘 하던 대로, 반응하고 처신하다 보면 당연한 일도 당연하게 인식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반응합니다. 그러기에 경험하지 않으면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느낀 것들로 말미암아 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겪어보고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며 슬퍼할 수 없다.”(9,15)라는 예수님의 말씀 의도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9,14)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9,16,17)라고 답변하신 그 근저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새 천 조각이며 새 포도주인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빗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꿰맨다면 그 헌 옷이 새 천 조각에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는 것도 같은 논리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새로운 내용물은 새로운 용기에 담아야 한다는 것. 복음을 율법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는 말씀을 통해서 옛 가치가 아니라 새 가치를 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지금껏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의 당연하지 않음이고 당연하지 않는 것의 당연함이 지금은 바로 정답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려고 하는 사람이나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는 사람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옛사람이며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사실 새 옷엔 새 천 조각이,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가 어울리고 적당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죽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란 새 옷을 입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존재 의식과 행동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때만이 자기 몸과 영혼 안에 새 포도주인 주님을 온전히 모실 수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9,17)
*성녀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자 축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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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일 자정이 되면 누군가 당신에게 24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매시간 1만 원씩 어떤 주식이든 사야 합니다.
둘째, 같은 종목에 반복해서 투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단, 1시간에 1만 원씩만 투자할 수 있으며, 1시간이 지나면 1만 원은 소진됩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면 24만 원이 모두 소진됩니다.
넷째, 받은 돈은 모아둘 수 없습니다.
다섯째, 자정에 다시 24만 원이 입금되면 매시간 1만 원씩의 투자를 반복합니다.
실제로 꼬박꼬박 24만 원씩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매일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잠자는 주식에, 누구는 글 쓰는 주식에, 누구는 기도하는 주식에, 누구는 공부하는 주식에, 또 운동하는 주식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투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한 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과연 투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재미만을 위해 스마트폰, 유튜브, 게임 등에 집중하고 있다면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험담과 같은 뒷담화는 또 어떨까요? 역시 좋은 투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면 이 역시 좋은 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위해 매일 받는 24시간으로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가 열렸고 신랑이 잔칫상에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모습이 당시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식만 하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의 모습을 보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득 담아낼 수 있는 잔칫상의 새 부대가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을 과거에 연연하면서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진정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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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하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단식하는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거나,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 4,22-23)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단식의 정신은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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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마태오 9,14-17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로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늘
더욱
밝아오니
새 날
늘
더욱
굳건해지니
새 믿음
늘
더욱
솟아나니
새 희망
늘
더욱
타오르니
새 사랑
늘
더욱
뜨거워지니
새 열정
늘
더욱
여물어가니
새 나
늘
더욱
이루어가니
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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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선물이자 선택>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 85,11-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1면에, “일치와 희망,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로의 사도적 여정을 위한 교황의 일정”이란 톱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일치의 사도’가, ‘희망의 사도’가 되어 2024.9.2.-13일까지 제45차 해외 사도적 여정차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아, 동티모로, 싱가폴을 방문합니다.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열정이 참으로 경이(驚異)롭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현재의 교황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선택이다. 날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시다.”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말마디이자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시는 축제인생의 선물을 선택해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참 좋은 선물이자 선택이된 교황님의 존재입니다. 제가 자주 고백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행복 또한 선택이자 선물입니다. 그러니 행복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바치는 선물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선택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그날의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하면 내일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는 끝납니다. 정의의 예언자이자 희망의 예언자인 아모스입니다. 거의 대부분 예언자가 전하는바 언젠가 그날의 희망입니다. 바로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사는 것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입니다. 그대로 풍요로운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다음 아모스의 희망을 우리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지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밭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바로 오늘 그날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수녀원에서의 하늘나라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감히 하늘나라 체험이라 명명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꽃처럼 환히 웃으며 환대하는 수녀님이 참 반갑고 고마워 살며시 안으며 기쁨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흡사 수녀님이 요즘 수도원 뜨락에 때되어 활짝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수녀님을 뵙는 순간 백합꽃인 줄 착각했네요! 백합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마침 찍어둔 백합사진과 함께 보낸 메시지에 즉시 답을 받았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저에겐 그대로 하늘나라 기쁨의 체험이었고 오후 내내 행복했습니다. 동시에 아주 예전 꽃 한송이를 선물로 갖고 온, 지금은 고인이 된 가난한 자매에게 드린 답시도 생각납니다. 이 답시를 받았을 때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요! 여러번 나눴지만 나눌 때마다 늘 새롭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그날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펼쳐가며 우리 자신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최고의 모범입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예수님 가는 곳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걸어다니는 하늘나라같은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땅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요한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단식이 판단의 잣대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사랑이 그 판단잣대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단식 많이 한다고 구원이 아니요 이런 단식 경쟁은 백해무익할 뿐입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는 옛 장상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요한이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처럼 단식 많이 함을 과시하며 당신의 제자들을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단식의 때 되면 단식할 것이지 주님과 함께 즐겁게 보내야 할 축제인생을 분별없는 단식으로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면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 선물을 선택해 살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기막히게 적절합니다.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마찬가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 천조각을 헌옷에 대고 꿰매는,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꼰대가 되지 말고 발상의 전환, 사고의 전환으로, 예수님처럼 늘 새포도주의 하늘나라 현실을 담아낼 ‘늘 새롭고 좋은, 깊고 넓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새 부대로 참 사람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u)”,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 참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새 날,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하늘 나라의 삶을, ‘에버 오울도, 에버 니유’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걸어가리라.”(시편 85,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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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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