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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 이형기
모래는 모두가
작지만 고집센 한 알이다
그러나 한 알만의 모래는 없다
한알한알이 무수하게 모여서 모래다
오죽이나 외로워 그랬을까 하고 보면
웬걸 모여서는 서로가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모래
모래를 서로 손잡게 하려고
신이 모래밭에 하루 종일 봄비를 뿌린다
하지만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
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나가 버리는 봄비
자비로운 신은 또 민들레 꽃씨를
모래밭에 한 옴큼 날려 보낸다
싹트는 법이 없다
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군
구제불능이야
신은 드디어 포기를 결정한다
신의 눈 밖에 난 영원한 갈증!
# “작지만 고집센 한 알”의 “모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가까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서로 손잡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에겐 생활공간으로서의 물리적 공간과 내적인 심리적 공간이 존재하며, 우리의 삶은 생활공간과 심리적 공간이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물리적 공간 속에 있어도 심리적 공간 속에 있는 요소인 흥미나 가치관, 관심사나 신념의 체계가 다르면 “신이” “서로 손잡게 하려고” “하루 종일 봄비를 뿌려”주어도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나가 버리는 봄비”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손잡게” 할 수 있을까? 레빈(Kurt Zadek Lewin, 1890-1947)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면, 해빙(Unfreezing), 변화(Changing), 그리고 재결빙(Refreezing)의 과정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변화를 위해서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먹이와 같은 보상기제만을 주기 보다는 변화에 대한 걸림돌 제거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세계 제 2차 대전 중,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음식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기관인 음식습관연구회(Committee on food Habits)에서 평소엔 먹지 않던 동물의 창자, 꼬리, 뇌와 같은 것을 전 국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전환하는 연구를 하였다. 처음 전략은 동물의 특수부위를 먹는 것이 전시 중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레빈은 문제가 되는 요소를 찾아내어 그 문제점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3단계로 체계화 했다.
첫 번째는 해빙(Unfreezing) 단계로 지금까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동물의 특수부위를 먹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국심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동물의 특수부위를 먹지 않았던 것이 어떤 착각이었는지를 계속 설명해 주었다. 이때 반대세력을 관찰하고 이들의 무조건적인 저항을 없애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해빙 단계에서는 저항을 없애는 것이 핵심이었다.
두 번째는 변화(Changing)의 단계로 사람들 간의 역학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식탁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정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바로 주부들이다. 주부들 중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지나가듯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주는 것이었다. 주부들 커뮤니티에서 동물의 특수부위를 맛있게 요리해서 먹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따라서 먹어 보도록 유도했다.
세 번째는 굳히기 단계로 재결빙(Refreezing)을 시도했다. 과거와 다르게 동물의 특수부위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영양도 풍부하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자연스런 상태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실행결과 전 국민이 동물의 특수부위를 거부감 없이 먹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변화를 위한 적확한 전략을 세우지는 않고, 막연히 “봄비를 하루 종일 뿌려준다”거나 “민들레 꽃씨”를 “한 옴큼” 날려준다고” “고집센 한 알”의 “모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변해서 서로 손을 잡지는 않는다. 권력에 기댄 선전이나 파블로프의 개처럼 먹을 것만 퍼준다고 고마워하거나 마음이 돌아서지도 않는다. “구제불능이야”, “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다며 포기하기보다는 변화에 걸림돌이 되는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모래별 / 손택수
귓속에서 모래 우는 소리가 납니다
낙산이라 제 몸이 명사산이 되었나 봅니다
자신만 한 서역이 있을까요
너무 멀다고, 곁에 있어도 한 몸이 될 수 없다고
모래와 모래가 등을 부빌 때마다
행성과 행성 사이로 흐르는 빛들이 서걱거립니다
포옹을 할수록 타는 것은 모래의 혀입니다
당기면서 밀어내는.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반짝이는 모서리
이 적막한 점점을 별자리로 삼을 수 있을까요
틈을 메꿀 때조차 틈을 낳는 게 모래라서
이 꽉 찬 틈들이 도시의 불빛들을 잠시도
잠들지 못하게 하나 봅니다
머물러 있을 때조차 이미 반쯤은 이별의 자세
늘 떠나고 있지만 그 자리 그대로입니다
어느 바위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어느 바다 해변을 찾아가고 있는지
온 지구를 돌아다니다 내 곁으로 온 여행자
모래바람이 귓속을 불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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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꿇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부부론 / 공광규
오늘은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결혼은 삼겹살을 굽는 것이네
타지 않게 골고루 잘 익혀야 하는 것이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불꽃을 조절하고
알맞게 익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이네
결혼은 된장국을 끓이는 것이네
알맞은 양을 물에 풀고
양념을 넣고 자꾸자꾸 간을 보는 것이네
된장과 양념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네
그걸 몰라서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첫사랑/고영민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그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주었다
춘설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시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문장』 3호, 1939.4)
[어휘풀이]
-우수절 : 입춘과 경칩 사이인 24절기 중 두 번째. 양력 2월 19일이나 20일.
-서늘옵고 : 서르렇고
-이마받이 : 이마와 마주 대다. 여기에서는 눈 덮인 산봉우리를 마주대하는 것.
-옹숭거리고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고
-옴짓 : 옴죽, 몸치가 작은 것이 몸을 조금 움직이는 모양
-아니기던 : 아니하던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작품해설]
이 시는 정지용의 후기 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는 초기의 모더니즘 계열에서 벗어나서 카톨릭에 몸담은 종교시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동양적 세계에서 노니는 관조적 서정을 절제된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정지용다운 시어의 세련된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첫 연의 ‘먼 산이 이마에 차라’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그의 장기(長技)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 ‘흰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와 같은 부분들도 그 세련된 언어 맛을 잘 살리고 있는 표현이다.
밤새 춘설이 내려 시적 화자는 문을 연다. 선뜻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절기는 이미 우수를 지났지만 추위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봄기운이 자연 속에 피어나서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이러한 봄향기가 옷 속에까지 스며온다. 겨우내 웅크렸던 생명들이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서러울 정도롤 아름답다. 이러한 봄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는 비록 추위 남아 있더라도 핫옷을 벗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고 싶어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설법이 아닌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맛보게 된다.
정환웅 해설
나 (시의 화자) 는 봄 날씨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먼 산 꼭대기에 춘설이 내려 쌓여있다
쌓여 있는 눈을 보니 내 이마가 다 차가워지는 것 같다.
시절은 2월 19일 아침인데
새삼스럽게 산꼭대기와
서늘하고 빛난 이마받이를 하고 있구나.
얼음에 금이가고
봄 바람은 흡날리는 옷고름 모양의 고운 향기로
피어오르는 것 같구나
지금껏 웅크리며 겨울을 보내며 살아온 것들이
옹송그리고 살아난 모습이
아아!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구나
미나리에 파릇한 새순이 돋고
움직이지 않던 고기가 입을 오물거리누나
때늦은 봄눈이 내린 오늘
나 (시의 화자) 는 솜옷을 벗고
마지막 추위를 몸으로 맞고 싶다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https://lma0135.tistory.com/m/524
무화과(無花果) / 이재무
술안주로 무화과를 먹다가
까닭없이 울컥, 눈에
물이 고였다.
꽃없이 열매 맺는 무화과
이세상에는 꽃시절도 없이
어른을 살아온 이들이 많다.
감자꽃 /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 『위대한 식사』 / 세계사. 2002
안개 / 샌드버그(1878-1967; 미국 시카고)>
작은 고양이 걸음으로
안개가 내리네.
안개는 조용히 다가와
항구와 도시를 허리 굽혀
말없이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떠나가네.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재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 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