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가 없는 스님의 방엔 커다란 항아리에 부채들이 줄지어 꽂혀 있다. 한 낮의 햇살 속, 비탈길을 걸어 오른 뒤라 커다란 부채로 땀을 식혔다. 열려진 창으로 보이는 대숲을 바라보며 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스님은 한 잔의 차를 우려 건네주셨다. “따끈한 차 한 잔 마시면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다”는 말씀을 곁들였지만 차를 주신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따뜻하지? <서장(書狀)>에 냉난자지(冷暖自知)라는 법문이 있어. 따스하고 차가운 것을 스스로 안다는 뜻이지. 차를 마시면 차다 뜨겁다를 금방 알잖아. 뜨겁고 차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을까?”
갑작스런 스님의 질문, 쉽사리 그 시작을 가늠할 수 없다. ‘차고 따뜻한 것을 언제부터 알았을까?’를 되뇌이고 있자니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어린 시절을 거쳐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태(胎) 안에서 배운 것은 아니니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 태중 이전부터 아는 이 자리는 그럼 어디에 있나? 어디 있다 하고 고정시켜 버리면 그건 기독교 논리야. 동쪽, 북쪽, 서쪽 어디에 고정시켜 버리면 맞지가 않아. 어디에 있다고 점을 찍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어. 그러니까 이 자리는 무처소(無處所)라. 그런데 처소가 없지만은 내가 말하고 싶을 때 입에 응해주고 보고 싶을 때 눈에 응해 주잖아. 그렇지만 입에서 찾으면 입에 없고, 눈에서 찾아도 눈에는 없거든. 없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어. 그러니 있다고 하면 상(相)에 떨어지고 없다고 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져. 그러니 ‘냉난자지’의 이 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묘한 법이야.”
스님은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는 그 자리, 처소가 없지만 분명히 있는 그 자리를 일러주기 위해 ‘차 한 잔’ 건네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냉난자지의 그 자리를 탐구하는 거야. 불교는 독거락(獨居樂), 독거안식(獨居安息)을 추구해. 그러나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냐. 직접 증득해야지. 처소도 모양도 빛깔도 없는 냉난자지의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만 해당되는 자리가 아냐. 차다, 따뜻하다를 아는 그 자리는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축생에게도 벌레에게도 다 해당되는 자리야. 말이 다르고 표현이 다를 뿐이지 따뜻한 것은 따뜻한 것으로, 찬 것은 찬 것으로 알기 때문에 본래지(本來知)야. 본래부터 아는 자리, 그러니까 본래부터 성불이라는 말이 나오지. 그러나 나와 닿는 연(緣)이 없으면 따뜻한지 찬지 모르잖아? 연에 의해 나한테 닿아 인식이 생기면 그 인식 때문에 차다 뜨겁다, 산다 죽는다가 생겨. 그러니 인식을 벗어나면 죽음이 없어. 그러니 본래지에 죽음은 없는 거지.”
생사가 없고, 시공이 없으며 공포도 없는 이 본래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깨워 주기 위해 스님은 <죽음이 없는 낙(樂)>이라는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혼탁한 세상, 방향을 잃고 돌아가는 세상에 바른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에서다.
스님은 바른 견해가 절실한 시대에 와 있지만 그것에 눈뜬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 법을 널리 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불교는 정견(正見)에서 출발해. 바로 보란 말이야. 육신은 이슬 같고 물거품 같고 번갯불 같다는 각성이 있어야 해. 진리는 영원이지만 육체는 잠깐이라는 감각이 있어야 존재가치를 살릴 수 있는 거야. 무감각과 나태는 성불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야.”
스님은 무감각한 사람은 성불할 수 없고 불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말을 할 만큼 평소 ‘깨어있는 정신’을 강조해 왔다. 올바른 감각이 있어야, 즉 깨어있어야 자기 방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감각이 있으면 조금 이탈해도 곧바로 돌아올 수 있지만 감각이 없으면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한 정관 스님만의 방편이 하나 더 있다. 매일 불(佛)자를 열 번 쓰는 것이다. 벌써 30년을 한결같이 이어온 일과다. 그만큼 스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정진에 게으르지 않다.
“간절한 신심이 제일 중요해. 신심은, 몸은 시한부이고 결국 변한다는 ‘변함’의 인식에서 비롯돼. 우리의 몸이 늙음, 병듬, 죽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정확한 인식 말이야. 오전에 먹던 김치가 오후에 맛이 다르면 우리는 그저 김치 맛이 변했다고 하지?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김치 맛만 변한 게 아냐. 우리 몸의 세포도 변했어. 한순간도 고정됨이 없이 변해가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대처하기 위해 영원불멸의 자리를 찾게 돼. 신심은 불교의 첫 관문이야.”
스님에게 신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몸소 보여주신 분은 은사 동산 스님이었다. “우리 스님의 특기는 신심이었어. 사람 몸만 빌린 것이지 그냥 사람은 아니다 생각했을 정도였지.” 은사스님을 회고하던 스님의 눈길이 벽에 걸린 은사스님의 사진에 한동안 머물렀다. 신심을 일으킨 후엔 어떻게 공부를 이어가야 할까?
“우리나라 불교에 혼란이 오고 있어요. 간화선을 해 보다 안 되니까 간화선 불신(不信) 운동이 나올 정도가 됐지? 간화선이 안 된다고 하는데 나는 돼. 안 되는 자기들 합리화시키려고 전체를 부인하고 있으니 그건 위험한 발상이지. 간화선으로 가야 사상(思想)이 나오거든.
사상이란 맑은 물과 같아. 밑에 뻘 물이 있다 해도 맑은 물이 내려가면 뻘 물이 차츰차츰 맑아지잖아. 간화선은 풍요로운 사상의 근원이야.”
그렇다면 왜 일각에서 간화선 무용론이 일고 제3 수행법이 물밀 듯 밀려드는 것일까? 스님은 그 원인을 ‘의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진리에 대한 의심이 확고해야 간화선이 되는 것인데 그것 없이 앉아 있으니 재미도 없고 갑갑해서 열이 올라 상기병이 생기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거야. 어떤 것이든 의문이 하나 딱 걸리면 그 의문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가 돼. 그게 화두야. 그건 고기가 낚시 바늘을 문 것과 같아. 낚시 바늘을 물고 나면 고기는 꼼짝을 못해.
의문에 걸리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세월이 어찌 가는지 몰라. 그러니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자기 몰두에 심취하고 자기 성찰이 깊어지면 그것이 자기 낙이 되는 것이지. 그러나 의문이 없으면 감각도 없고 아무 진전이 없는 거지.”
스님은 묵조선, 간화선, 염불선에 대한 차이를 분명하게 짚어 주며 간화선의 생명은 의심이며 그 의심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아서 간화선의 생명과 같다고 거듭 강조했다. 스님이 화두가 잘 잡히지 않는 사람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의지적 작용으로 권하는 것이 염불이나 주력이다. 자동차 시동을 거는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의문이 들지 않는 사람한테는 의지적으로 의문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염불, 주력을 권해. 염불선(念佛禪)을 하라는 것이지. 염불이면 염불이지 무슨 염불선이냐고 비판하는 스님들도 있지만 해보면 알게 돼.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 주력을 꾸준히 해 봐. 화두선이 되는 사람은 만 명에 한 명이 어려워. 그러니 화두가 안 될 때는 의지적인 염불선을 하란 말이지. 어느 순간 ‘관세음보살 하는 이게 뭔가?’하는 의심이 생기고 그때부터 의지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염불선이라고 하는 거야. 염불선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 해보면 분명히 돼. 내가 그 장본인이야.”
스님도 처음엔 염불로 시작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서서 관세음보살 주력을 ‘죽도록’ 했다.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주력을 하다보니 염주 줄이 자꾸 끊어져 나중엔 철사로 바꿨지만 그것마저 끊어질 정도였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일주일 단식기도를 하며 주력을 하던 어느 순간 ‘관세음보살 하는 이 놈이 무언가’하는 의심이 올라왔고 스님은 동산 스님께 달려가 여쭈었다. “그대로 하면 돼.” 은사스님의 대답이 아니었더라도 스님은 계속 그 길을 갔을 것이라고 할 만큼 공부 힘을 얻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야. 고통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지. 여기서 즐거움이란 말은 즐기는 것과는 천지 차이야. 그 즐거움이란 앞서 말했던 죽음이 없는 낙을 찾는 것을 말해.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은 순간을 즐기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 이고득락을 원한다고는 하지만 이고득락이 결코 될 수 없는 길로만 가고 있단 말이지. 이고득락은 자기 성찰, 생각하는 나, 자기를 알고자 하는 나, 자기를 깨닫고자 하는 나를 일깨워 자기를 살피고 자기를 증득하는 것을 말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이것이 자기 성찰이거든. 자기 성찰이 아니고서는 이고득락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이고득락의 길로 가는 것이 불교야. 이고득락의 길로 가기 위해 몸부림을 쳐봐. 그러면 분명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