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해피 몽(夢) 1

[서은준범]

눈을 떴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하얀 천정에 형광등이 보였다. 눈을 감자 암흑 속으로 잔상이 사라졌다.

다시 눈을 뜨고 조금 옆을 바라보니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뭔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점점 소리가 정확해지면서 바로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천천히 반복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여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을 뜨자

하얀 가운을 입은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에 그다지 단정해 보이지 않은 남자가 보였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그 남자의 손가락이 눈꺼풀을 벌리고 밝은 손전등으로 눈을 비추었다.

인상을 찡그렸다. 다시 눈을 감았을 때에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은 의사의 손길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거 맞지?”

꽤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 같다. 다행이네.”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난 여자다.. 늦은 시간에 호출해서 미안해. 수고했다.”

“내가 뭘..”

낯선 남자들이 주고받는 목소리에 다시 눈을 뜨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만큼 낯선 얼굴의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사가운이 아닌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쓴 채로

목소리만큼 싸늘한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신 들었으면 집으로 가지?”

“...”

전혀 걱정했다는 것 같지 않은 차가운 표정과 짜증이 나 있지만 의무감으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 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이상했는지

남자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왜.”

그가 고개를 돌려 의사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 임유진..”

‘임 유..진..?’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소한 이름을 머릿속에서 기억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전혀.. 그 이름은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누..”

그녀는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당황했다.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한 사람은 병실 안에 그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가

미간에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녀가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유진씨.. 저예요. 강연우. 서완이 친구 강연우.. 한율이도 저희 병원에서 낳으셨잖아요..”

“강.. 연우.. 서완.. 한율..”

그녀는 눈을 감고 방금 의사로부터 들은 세 명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찾아내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한 숨과 함께 눈을 뜨고 의사와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죠?”

의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죄송해요..”

당황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진짜.. 지금 결혼기념일 그냥 지나쳤다고 시위하는 거야?”

화를 내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 했어요?”

남자는 턱에 힘을 주고는 뒤로 몸을 돌리며 짜증을 참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유진씨.. 가볍게 가로수를 들이받고 병원에 오셨거든요. 몸에 특별한 이상이 전혀 없었는데.. 정말 저랑 서완이를 못 알아보시겠어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의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죄송해요..”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특별히 아픈 곳이 있어요?”

그녀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쉬어요. 생각이 떠오르면 말해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여전히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뜨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낯선 두 개의 손이 보였다. 그러다 눈이 갑자기 커졌다.

기다란 손톱이 왼손 4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만큼 화려한 네일아트가 되어 있었다.

짙은 바이올렛 컬러의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고, 반짝이 같은 것도 붙어 있고, 심지어 오른 손

검지 손톱 위에는 커다란 자개처럼 보이는 장식도 있었다.

“이게.. 무슨.. 이런 손으로 뭘 할 수 있지?”

고생은 전혀 안 해 본 손인 것 같았다.

“이게.. 내 손이라고..?”

그녀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불을 젖혔다.

여전히 생소한 그녀의 발톱에도 비슷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거울 앞으로 갔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오른 쪽 눈을 조금 뜰 수 있었다.

천천히 양 쪽 눈을 다 뜨고 거울 속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가 탄력있는 웨이브를 자랑하며 허리께까지 내려가 있었다.

손톱만큼이나 화려한 여자였다.

‘가로수를 들이받을 때 이 모습이었나보다. 아직도 풍성한 속눈썹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면대를 잡고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다시 거울 속 여자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너.. 누구지..? 정말.. 나야..?”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화가 난 표정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없어서 놀랐잖아.”

“저기요..”

“뭐.”

“내가.. 누구.. 누구라구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턱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화를 억누르는 듯 한 숨을 내쉰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기 그만하지? 미안해. 바빠서 결혼기념일 못 챙겨서.. 퇴원하면 당신이 원하는 그.. 뭐야.. 크리스챤 루부탱 주문 해. 그걸 사고 싶어서 그렇게 징징거렸잖아. 사라고.”

그녀가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챤.. 뭐요?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당신이 나나 한율이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아가들이지.”

차갑게 들리는 그의 경멸에 찬 설명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연기자 출신 아니랄까봐.. 하아.. 그만 하지.”

“내가.. 연기자였어요?”

그가 오른 손을 조금 들었다.

“그만. 내가 떠나라고 할 때는 옆에 있더니.. 왜 이러는 건데?”

그가 턱에 힘을 주고 먼저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갔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정에 뒤로 물러나며 숨을 내쉬었다.

“나.. 사랑받지 못한 아내였나..?”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다 벽에 등이 닿자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지는 손길치고는 너무 거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고! 당신 사고 소식에 모든 일을 젖혀두고 왔더니..

이건 뭐하자는 거야? 우리사이에 결혼기념일이 그렇게 중요한 날이었나?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미리 프랑스에 주문 넣었지.. 500만원짜리 당신의 신상 아기를 결혼기념일에 맞춰

당신에게 안겨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만하자구.. 응?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병원에서 있고..

내일 한실장 보낼 테니까 집에 가서 더 쉬도록 해.”

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나는 당신 안중에도 없는 한율이가 당신 걱정으로 아직 잠을 못 자고 있다고 해서 가 봐야 해. 아주머니도 집으로 가셔야 하는데.. 여러 사람 피해 입히면서까지 그렇게 관심받고 싶었어? 후우... 내일 보자고..”

그가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녀는 힘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기분 속에서 저런 사람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문 밖에 서 있던 서완은 인상을 찡그리며 문을 노려보고는 “쯧!”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겨 병실을 나갔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빠?>

“응. 한율아..”

<엄마는요? 많이 다치셨어요?>

“아니. 깨어나셨는데..”

순간 서완이 입을 다물었다.

<깨어나셨어요?>

“응.”

<그럼 아줌마랑 병원에 가 봐도 돼요?>

“안 돼.”

<안.. 되요?>

“응. 오늘은 늦었고.. 내일 퇴원하실 거야.”

<네..>

한율이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서완은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내일 퇴원하실 테니까 하루만 기다려 주자.”

<네..>

“아주머니 좀 바꿔 줄래?”

<네.. 아줌마.. 사장님?>

“네. 제가 지금 출발해요. 한.. 30분? 아니 20분 안에 갈 테니까요.. 그 때까지 계셔 주실 수 있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서완이 눈을 감고 머리를 시트에 기대었다. 그리고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나올 때 울고 있던 유진이 떠올랐다.

“후우.. 어쩌자는 거야..”

****

전화를 끊은 한율이 아주머니에게 안겼다.

“엄마는 내일 오신대요.”

“그래요. 사장님 오실 때까지 책 읽어 줄까요?”

한율이가 아주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눕지 못하고 앉아서 한 숨을 내쉬었다.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눈을 들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의사를 바라보았다.

“둘 만 있으니까.. 한 번 말해 봐요. 정말.. 기억이 안나요?”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랑 마음이랑 따로 따로 인 것 같은 기분이에요. 분명히 나는 나인데..

익숙한 게 한 가지도 없어요. 몸도 내 몸 같지 않고, 목소리도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고..

기억나는 것도 없고.. 머릿속이 하얀 백지 같아요.”

의사가 한 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쉬어요. 내일 다시 정밀검사 해 봅시다.”

“제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임유진. 임유진이에요. 아까 그 친구는 유진씨 남편 최서완이고요. 6살 아들이 있어요. 최한율..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날 수도 있으니까 편히 쉬어요.”

그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퉁퉁 부은 그녀를 바라보다 어깨를 토닥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연우는 밖으로 나가 핸드폰으로 서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집에 도착한 서완이 핸드폰 화면에 연우 이름이 뜬 것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

“나다. 왜?”

<집에 도착했냐?>

“방금. 이제 들어가야지.”

<한율이가 걱정 많이 하지? 자기 이뻐하지도 않는 엄마 걱정을 그렇게 하나..>

“후~. 왜 전화했냐? 이번엔 기절하는 쇼라도 했냐?”

<서완아..>

“응?”

잠시 후 모든 행동을 멈춘 서완의 눈이 커졌다.

****

늦은 저녁에 서완은 잠든 한율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을 나왔다.

“늦은 시간까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쉬세요.”

“네.”

아주머니가 나가자 문을 잠그고 냉장고로 향한 그가 병에 담긴 커피를 얼음이 담긴 유리컵에 붓고는 생수를 부어 한 모금 마셨다.

“후우..”

그가 손을 들어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아까 연우가 한 말을 떠올렸다.

“확실하지는 않아서 내일 다시 정밀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억상실증같다.”

“기억상실증?”

“응. 그런데 그게 정밀검사를 해도 정신적인 부분이라서.. 외상에 의한 기억상실이라기 보다는 해리성기억상실증같아. 이름, 가족, 살아온 것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니까..”

“그럼.. 연기가 아니라는 거야?”

“글세.. 유진씨가 워낙 연기를 잘 하니까 조금 두고 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해.”

“진짜.. 질린다..”

“이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다.”

“한율이가 조금 더 크면 할 거야.. 부모님도 이해하실거고..”

“한심한 녀석.. 첫 눈에 반했다 그러더니만..”

“말리지 그랬냐?”

“그때는 이럴 줄 몰랐지.. 여하튼 내일 검사결과 나오면 전화 할게.”

“그래. 좀.. 살펴봐주라. 연기인지 실제로 다친건지..”

“알았다, 인마..”

서완이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손에 들려 있는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얼음만 남은 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

다음 날. 그녀는 검사를 마치고 의사와 마주보고 있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인 것 같아요.”

“기억상실증..”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시고,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니까요.”

“네..”

“혹시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는 것 같으면 이 번호로 전화 주세요.”

그가 명함을 내밀자 그녀가 받아 들었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여전히 생소한 손과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옷장을 열자 옷과 가방이 보였다.

가방을 꺼내 침대에 앉았다. 가방을 거꾸로 들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소지품들을 침대 위에 쏟았다.

좋아 보이는 가방 안에는 역시 비싸 보이는 지갑과 여러 가지 소지품들이 보였다.

손으로 지갑을 열어 안을 바라보았다.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이 보였다.

“임유진.. 주민등록번호.. 840410.. 82년.. 올해 나이가 32세.. 후우.. 32세란 말이지..”

20대가 아니라 30대라니 더욱 낯설다고 생각한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지갑 안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을 했으면 가족사진이 있어야하지 않나.. 하다못해 아이 사진이라도..”

여러 가지 소지품들이 있었지만 기억을 떠올릴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다가 아직도 눈에 붙어 있는 화장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에

소지품을 다시 가방 안에 넣고는 욕실로 향했다. 샤워까지 마친 그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돌돌 말고 밖으로 나오자 낯선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그녀가 환자복 앞섶을 오른 손으로 여미고 그를 바라보았다.

“누.. 누구세요?”

그가 깍뜻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모님. 댁에 모셔다 드리라는 사장님 말씀에 모시러 왔습니다.”

“아.. 한실장님..?”

그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아.. 몸이 안 상하셔서 다행이십니다.. 기억도 곧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럼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녀에게 다시 인사를 한 한실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기억상실증.. 후우..”

그녀는 한 숨을 내쉬고는 집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연우로부터 전화를 받은 서완이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낀 손위에 이마를 대고 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원하길래 그렇게 완벽하게 연기를 하는 거지? 진짜.. 알 수 없는 여자야..”

그가 고개를 들고는 절레절레 흔들고는 서류파일을 열었다가 소리나게 닫았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아주머니와 함께 있는 한율이에게 서완이 먼저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유진의 상태를 말하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서완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기억상실증.. 그게 뭐에요? 많이 아픈 거예요?”

서완이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쪽 무릎을 꿇고 한율이의 양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엄마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거야.”

“그럼.. 나도 잊어버린거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율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면 안 돼..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엄마겠지? 그러니까 엄마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울거나 떼쓰면 안 돼.. 알았지?”

“영영 날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 아니 아빠가 도와 줘야지. 기억이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한율이가 팔을 들어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응. 나도 도와드릴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요?”

“부담스럽지 않게 편하게 해 줘야겠지? 혹시 엄마가 모르는 게 있으면 네가 도와드리고.. 어때?”

“할 수 있어요.”

“좋아..”

그가 미소를 짓고는 일어나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불편하시겠지만..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는 한율이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완이 한 숨을 내쉬고는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풀었다.

****

집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 숨을 내쉬었다.

“기억나세요?”

한실장이 그녀를 룸미러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하세요.”

“네..”

다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네. 사모님..”

“저에게 아이가 있다고..”

“최한율군 말씀이시군요?”

“최..한율..”

“궁금하세요?”

“네..”

“나이는 6살입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고요.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주로 보살펴주고 계세요.”

“제가.. 아니라 아주머니가 보살펴주신다고요?”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워낙.. 바쁘셔서요..”

“제가.. 일을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대외적인 행사에 많이 참석하세요.”

“대외적인.. 행사..”

그녀가 한숨 섞인 조용한 말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너는 어떤 여자야..? 6살 아이를 일하시는 분에게 맡겨두고 화려한 모습으로 밖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여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되고 점점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서완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전혀 부부라는 느낌이 없었다.

한실장이라고 하는 남자는 그녀를 어려워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은 자신보다

아주머니가 보살피고 그녀는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여자였다.

아직까지 알아낸 바로는 자신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미간을 찌푸렸다.

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도착하셨습니다.”

한실장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저택과

묵직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CCTV가 보였다. 낯선 환경에 숨이 막힐 지경인데

어마어마한 집 안으로 들어가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차에서 내렸다.

묵직한 현관문이 열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봄을 알리는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한실장이 집으로 안내를 했다.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겉모습처럼 건물 내부도 화려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불안한 표정으로 집 안을 살피던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싶다.. 도망치고 싶어..’

그녀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 아이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달려오지 않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인 듯 보이는 어떤 분에게 등을 기대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큰 소리로 부르지 못하고

작게 떨리듯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이고 팔을 벌리자 그제야 아이가 머뭇거리며

아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와 팔에 안겼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마음에 안도감이 생겼다. 안아야 할 아이를 제대로 안은 기분이 들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조그맣게 물었다.

“엄마.. 제가 기억이 나세요?”

순간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안도감과 평온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아이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면 아이가 불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조금.. 앞으로 더 많이 생각날 것 같아.. 미안해..”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전혀 기억 못하실까봐 걱정했어요.”

“이렇게 잘 생긴 왕자님을 어떻게 못 알아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기억이 조금 돌아왔나?”

남자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병실에서 그녀에게 화를 내던 그 남자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역시 인상을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는 “조금요..” 라고 대답했다.

“다행이군.”

그는 차갑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아.. 안녕하세요..”

“네. 많이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네..”

“들어오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그녀는 편안함에 한 숨을 내쉬었다.

사실 구두를 신고 병원에서 몇 번이고 쓰러질 뻔했었다. 굽이 엄청 높은 구두는 발목부터 머리까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전혀 쓸리거나 피부가 벗겨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런 구두에

익숙한 발인 듯 싶었다. 발목에 힘을 주고 꺾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주의깊게 한 발 한 발 내딛었는지 모른다.

아이의 손을 잡으려던 그녀는 아이의 작은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손톱장식에

아이의 손등이 긁혔다. 아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바라보다 자신이 잘못한 듯

양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녀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쳤니?”

“아니에요..”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보자..”

“정말 괜찮아요.”

아이는 뒷걸음질을 치며 아주머니에게 달려가 상처를 보였다. 아주머니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구급약상자를 꺼내 아이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그녀는 왠지 모를 상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았다.

‘이런 손으로 저 아이를 어떻게 돌본다는 거야..’

“왜.. 한율이가 당신 손톱을 망쳤나?”

서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아직 아이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다친 아이에게 제가 왜 뭐라고 해요?”

그녀의 말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기억상실증에 이제는 좋은 엄마 역할이 하고 싶은 건가? 뭐.. 좋아.. 조금만 기다려. 기억이 확 한번에 돌아오게 해 줄 테니까.”

그녀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래요? 어떻게요?”

“글세.. 기다려봐.. 집은.. 생각이 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한 숨을 내쉬고는 “따라와.” 라고 말하며 고갯짓을 하고는 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방문을 열자 넓은 방이 깔끔한 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원목마루 바닥에 침대가 놓여있었다. 푸른색 이불과 미끄럼틀이 달린 침대가 없다면

아이방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차가운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여기가 한율이 방인가요?”

“그렇지.”

“방이..”

“방이 왜?”

서완이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방을 바라보느라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 방이라고 하기엔 좀.. 쓸쓸한 것 같아요..”

“훗.. 쓸쓸해? 저 침대가 얼마짜린 줄 알아? 당신이 고집을 피워서 한율이 방이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쓸쓸하다..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뭐.. 마음대로 해..”

남자의 거친 표현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위층에 간 서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내 방. 저쪽이 당신 방.”

“같이.. 안 자요?”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기억상실증 연기를 해도 방은 절대로 같이 안 쓸 거야. 꿈도 꾸지 마..”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연기.. 아니에요.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요. 내가 누군지, 내 가족이 누군지, 내가 뭘 하던 사람인지.. 하지만 뭐가 부당한지는 알죠. 어제부터 느낀 건데요. 아내를 너무 막 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부당? 아내? 마치 제 3자인 듯 이야기 하는데 지난 3년 동안 나눈 대화보다 지금 10분 동안 나누 대화가 훨씬 더

많아. 아내대우를 제대로 받고 싶으면 아내답게 굴어.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남편으로서 제대로 행동하

지.”

‘정말 이 사람이..’

“저도 예의라고는 전혀 모르는 당신같은 남자랑 같은 방 쓰기 싫어요.”

“마찬가지야.”

“다행이네요.”

“나머지는 혼자 돌아보라고.”

“그러죠.”

그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이라고 알려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닫힌 방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어이없어서.. 도대체 저런 남자 어디가 좋아서 결혼한 거지?”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방안을 바라본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도대체..”

프랑스 귀족들이나 사용함직한 물건들이 가득한 넓은 방안을 바라보았다. 온통 방안이 흰색과 금색과

붉은색, 벽지는 푸른 이끼 색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편하게 쉴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오른 손을 들어 관자놀이부근을 손끝으로 만졌다.

“왜..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가구가 마음에 안 들어? 당신 방 인테리어도 새로 하고 싶나?”

아픈 머리를 들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어 서완을 바라보았다. 그가 팔짱을 끼우고 긴 다리를 꼬고 문설주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바꿀 수.. 있어요?”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저런 방에서는 단 1분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콧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지맘]

다른 인격이 들어온건가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여주인공이네요

[단군자손]

재미 있을것 같네요.
열심히 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