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천년향
180123전라도닷컴[한송주 괴나리봇짐] 법성포 매향비
천년 묵은 침향 건지러 남녘 갯가로 간다
영광 법성포로 천년향(千年香)을 건지러 간다. 우리 선인들은 향나무를 갯물에 묻었다. 매향(埋香). 짠 물에 잠긴 향나무는 억겁을 눅어 있다가 천년 뒷손님들에게 깊은 향기를 베푼다.
그 경개를 기자는 이렇게 풀어본 적이 있다.
숲의 높은 자리에 남몰래 나무 한 그루 심어
푸른 그늘 멀리 드리우게 하고 비바람 밤이슬 고루 머금어
크고 거룩하게 늙어 갔을 때 조선낫톱으로 정히 잘라서
세상 만귀 사뭇 잠잠한 날, 눈물보다 더 짠 서해바다에 깊이 가라앉히는 일
내가 이 추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 다만 그뿐.
꿈꾸듯 나무 한 그루 정성껏 키워 겨울 갯가 찾으실 어떤 이를 위해
깊은 물 속에 천년 그리움을 묻는 일.
공양 중에 향공양(香供養)이 으뜸이다. 향(香) 등(燈) 차(茶) 꽃(華) 열매(果) 쌀(米) 여섯가지 공양 중에 부처님은 향을 제일 반겨하신다. 예수님도 향유 족욕을 즐겨하셨다. 유가의 선비들도 책을 대하기 전에 향으로 머리를 적시는 훈목(薰沐)을 버릇했다.
우리나라 자체가 향나무에서 태어났다. 신단수(神檀樹)가 원조 향나무다. 대대로 국가기관으로 향을 관리하는 향실(香室)이 있었고 민간에서도 두레를 이뤄 향을 즐기는 문향계(聞香契)가 성행했다.
좋은 향 다섯 가지로 침수향(沈水香) 백단향(白檀香) 자단향(紫檀香) 사라라향(沙羅羅香)을 드는 데 그 중 침수향을 최상으로 친다. 침수향은 물에 오래 담가 향기가 농익은 향나무를 이른다.
향을 받들고(戒香) 향을 즐기고(聞香) 향을 베푸는(施香) 행향 가운데 제일 큰 공덕은 물론 시향일 터. 시향의 한 풍습이 바로 매향(埋香)이다. 단단한 향나무 조각을 짠 물에 담가 놓으면 파도에 씻겨 목질이 물러지면서 향기가 우러나오고 거기에 삼라만상의 원기가 서려 그야말로 오묘한 묘향(妙香)이 생성된단다.
매향 풍습은 불교의 행향의식과 섞여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향을 묻고 나서는 그 뜻과 위치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지금 남아있는 매향비는 한반도 통틀어 10여 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전라도 해안지방에만 7매가 몰려 있다. 신안군 암태면, 영광군 법성포, 해남군 마산면, 영암군 서호면, 장흥군 용산면 등에 있다.
칠산바다 소금바람이 쓰리게 서걱인다. 오사리조기 입하사리조기를 떼로 몰아 만선가를 부르던 법성포의 풍요는 이제 없다. 딱돔 오가제비 장대들로 갯바닥 가득 펄럭이던 굴비걸대장도 이미 시들었다. 맨땅에 두름두름 섶을 깔고 간을 들이던 섶장 풍경도 옛그림이 된 지 오래다. 황량한 포구에 휴선 몇 척 강쇠바람에 후달리고 있다. 낮술 한 잔이 행복인 뱃꾼들은 기운 주막 앞에서 해바라기 중이다.
입암리 입정부락 갯가에 매향비가 서 있다. 높이 1m 남짓, 폭 0.5m 되는 작달막한 화강석이다. 비 옆면과 앞면에 7행 60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매향 시기와 장소, 동참자 등을 밝혀놓은 것이다. 비문이 삭아 화주 등은 판독하기 힘들다. 내용인 즉, 홍무(洪武) 4년(고려 공민왕 20년, 1371) 여기에서 동쪽으로 2백 보 떨어진 곳에 향목을 묻었으며 또 영풍(永豊) 8년( 조선 태종 10년, 1410) 여기에서 남쪽으로 2백 보 떨어진 곳에 향도(香徒) 우두머리 한 아무개의 시주로 향목을 묻었다.. 운운. 그러니까 고려말과 조선초에 법성포의 불교신행단체에서 매향의식을 하고 그 표지로 이 비석을 세웠다는 얘기다.
주막에 들러 한 사발 박주를 권하고 마을 원로에게서 매향비 곡절을 듣는다.
“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는데 이 입석은 배를 매는 데 썼다고 합디다. 사람들이 뭔 독인지 몰랐응께. 그러다가 칠십년 대에 새마을사업 함시로 들에 내다가 묻어부렀재. 근디 나중에 경지정리할 때 그것이 걸려 나왔어요. 관에 신고가 되어 당시 영광향토문화연구회 이기태 회장과 목포대 이해준교수가 조사 연구를 한 뒤에 1987년에 본 자리에 다시 입석이 되얐어요.”
앞에서 살폈듯 매향은 대개 불교향도들이 용화회주인 미륵보살의 왕생을 기원해 이루어졌다. 미륵신앙이 성행했던 고려말과 조선초 사이에 매향비가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산곡수와 해수가 만나는 개어름에 향목을 묻은 것도 산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 길상처라는 불교의 풍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매향 풍속이 한창일 때는 자잘한 지방 향도두레 뿐아니라 관주도로 거창하게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고려말엽에 길지로 꼽히는 강릉의 정동진 일대에서는 지방 수령들이 회주가 되어 무려 3천 그루가 넘는 향나무를 갯물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데 이런 대작불사 뒤안에는 수많은 하류중생들의 노고가 숨어있을 터이니 그게 어찌 무상복덕으로 이어지랴. 한 그루 작은 향목일망정 지극정성으로 묻어보는 빈녀의 마음은 향기로워라!
지금도 맵싸라이 흩날려오는 천년향을 호흡하며 법성포 갯나루에서 뇌어보는 부처님의 한 말씀.
“누구는 향을 팔고 또 누구는 향을 사지만, 팔지도 사지도 않는 애먼 놈이 향기는 다 누리는구나.”
글 한송주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