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06월07일(일요일) [안동시 (봉정사&안동중앙신시장&임청각&법흥사지 7층전탑&월영교)&예천군 삼강주막] 탐방일정
회비 18,967원 5월11일 국민은행 노블레스클럽 계좌 750602-01-190920로 송금 완료,
3열2번 좌석 예약
탐방지 : 안동시 [봉정사&안동중앙신시장&임청각&법흥사지 7층전탑&월영교] &예천군 삼강주막
탐방일 : 2026년06월07일(일요일)
날씨 : 날씨 [안동시 서후면 최저기온 도C, 최고기온 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55분 소요)
08:10~11:35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교대역 13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번지에 있는 안동 봉정사로 이동 [3시간25분, 218.1km]
[천등산 봉정사
천등산 봉정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도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곳은 우리들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누구나 봉정사에 오면 심신의 피로를 다 잊어버리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등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좋은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 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 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창건 후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 극락전, 국보 제311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고려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가기도 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11:35~12:10 봉정사에서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5호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과 조선 시대의 건축물로서 2009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11호로 지정된 안동 봉정사 대웅전(安東 鳳停寺 大雄殿)을 사진촬영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5호이다. 극락전은 영주시의 부석사와 함께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건립 시기는 주심포식인 점에서 고려 중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말기로 추측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의 건물이다.
개요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통일신라 대 신문왕 능인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부석사를 세운 능인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安東 鳳停寺 大雄殿)
안동 봉정사 대웅전(安東 鳳停寺 大雄殿)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건축물이다. 2009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능인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만들어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이곳에 내려 앉아 봉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보 승격사유
보물 제55호 봉정사 대웅전은 그 동안 조선초기 건물로 추정되어 오다가 근래의 해체조사 시 발견된 묵서명에서 ‘1435년(조선 세종17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 그 연혁이 밝혀졌다. 이 건물의 공포는 힘있고 가식없는 수법을 가지고 있으며, 건물의 가구형식(架構形式)과 세부기법은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工法)으로 전형적인 초기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청(丹靑) 또한 고려적(高麗的) 요소(要素)를 지니고 있어 창건(創建)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여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繪畵資料)로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봉정사 대웅전은 건축양식과 단청 등에서도 조선초기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서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安東 鳳停寺 華嚴講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67년 6월 2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인데 대웅전보다 간결한 형태의 장식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기둥은 낮지만 공포를 크게 잡아 겉모습의 균형을 살리고 있다. 2칸은 방이고 1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安東 鳳停寺 古金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67년 6월 2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 복원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16년에 고쳐 지은 사실이 있으나 처음 건립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당초 남쪽에는 우화루가 있어서 남쪽 지붕이 이 건물과 연결되고 그 아래쪽을 부엌으로 사용하였는데, 1969년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해체하면서 철거하였다.
개요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든 봉황새를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건물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안동 봉정사 영산회상벽화(安東 鳳停寺 靈山會上壁畵)는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영산회상도이다. 2009년 4월 2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1997년 1월 16일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보존처리 한 후 사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화면은 중방부분이 휘어지면서 부분적으로 균열이 생기고,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아 제 모습을 상당히 잃었으나 구도 및 색채 그리고 일부의 문양 등은 판별이 가능하다. 내용은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는 도상으로,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실 때의 장면을 도해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전반에 걸친 무거운 적·녹색 위주의 채색을 사용하여 다소 묵직한 느낌이 강하지만, 본존불의 선홍색 법의와 호분이 많이 가미된 연하늘색과 연분홍색 등이 잘 조화를 이루며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고 뛰어난 필치와 밀도 높은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벽화는 현재 정확한 제작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대웅전 해체수리 때 종보 하단에 덧댄 통보아지 상면에서 발견된 1435년의 「대웅전중창기」, 1436년의 정면 어칸 기둥 묵서명 등을 통해서 볼 때 1435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봉정사 대웅전벽화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산회상도>로서 1476년 <강진무위사아미타후불벽화>와 함께 조선 초기 불화의 쌍벽을 이루는 벽화이며 이후 전개될 군도형식의 영산회상도는 물론 여타 불회도(佛會圖)의 조형(祖型)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安東 鳳停寺 木造觀音菩薩坐像)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보살상이다.
2004년 10월 14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351호 봉정사 목조관세음보살좌상(鳳停寺 木造觀世音菩薩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0월 2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20호로 승격되었다.
안동 봉정사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여러 개의 나무들을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으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수정을 감입하였다. 사찰에 전하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과 1753년의 중수원문(重修願文)을 통하여 1199년에 처음 조성되어 1363년에서 1364년 사이와 1751년에서 1753년 사이에 중수된 상임을 알 수 있다.
양식적으로도 이 관음보살상은 아직 고려적으로 변모하지 않은 이국적인 풍모, 마치 배흘림기둥을 연상시키듯 맵시있게 땋아 올린 보계(寶髻), 어깨 위에서 중첩된 고리모양을 이루며 늘어진 보발(寶髮)의 표현, 긴장감 넘치는 옷 주름, 세련된 조각기법과 균형미 넘치는 비례 등에서 중국 남송대의 불상이나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된다. 따라서 이 상은 <대웅전관음중수현판기>에 기록된 대로 승안(承安) 4년, 즉 1199년(高麗 神宗 2) 무렵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관음보살상은 고려후기 새롭게 대두하는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양식 불상의 시원적 형태를 간직한 상으로 이러한 불상 양식의 성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상으로 평가 된다.]
[안동 봉정사 영산회괘불도(安東 鳳停寺 靈山會掛佛圖)는 경상북도 안동시 봉정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탱화이다. 2010년 10월 2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42호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의 화면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 영산회괘불화 도상과 유사하나 좌우 8구의 협시보살을 비교적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화면에 도상들을 부각시켜 꽉차게 묘사하였다.
입상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권속들이 둘러싼 이와 같은 형식은 18세기 경상북도에서 유행하던 것인데, 다른 작품에 비하여 보살이 본존의 어깨부분까지 올라오는 등 크게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불보살상의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양감있게 표현하였으며, 육신선과 옷의 처리는 비교적 굵은 선묘로 힘있고 유연하게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색채는 주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천공에는 백색 화문을 흩뜨리고, 황색과 분홍색, 녹색 채운을 활용하여 화사함을 더하고 있다. 아울러 보살상의 하반신 수식 장식에는 금박으로 처리하여 포인트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 괘불탱 중에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풍도 뛰어난 작품이다.]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安東 鳳停寺 阿彌陀說法圖)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이다. 2010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43호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은 조선조 후기 아미타설법도상의 규범이 되며 또한 17세기와 다른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 도익(道益)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12:10~12:37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봉정사를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경동로 602 번지에 있는 안동 중앙신시장으로 이동
[27분, 15.2km]
12:37~13:10 안동중앙신시장에서 점심식사
13:10~13:30 안동중앙신시장을 탐방
[안동중앙신시장
안동 중앙신시장은 경북 북부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으로 매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짜에 5일장이 열린다. 중앙신시장 앞뒤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마다 이른 새벽부터 인근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가지고 오거나 외지에서 온 상인들로 긴 노점이 늘어서 있다. 이처럼 다양한 업종들이 상설 운영을 하고 있으며, 마늘, 고추, 떡, 젓갈류, 수산물, 간고등어, 안동한우, 문어, 제수용품 등 먹거리와 생활용품들이 가득하다.]
13:30~13:36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안동중앙신시장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 번지에 있는 임청각으로 이동
[6분, 2.9km]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다"…3대 걸쳐 독립운동가 11명 배출
기자명 오종명 기자
경북일보 기사 지면게재일 2023년 08월 14일 월요일 지면 3면
석주 이성룡, 독립운동 위해
임청각·전답 팔아 자금 마련
'호연지기' 정신 후손에 자긍심
일제가 철길을 놓아 반토막이 난 임청각(보물 182호) 복원이 본격화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 집안이 대대로 살던 임청각에서는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석주 가문은 3대 동안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동생 상동·봉희, 아들 준형, 조카 형국·운형·광민, 손자 병화, 당숙 이승화까지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여기에 석주 선생 부인 김우락 여사, 손자 며느리이자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여사까지 11명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석주 이상룡 집안은 3대가 줄줄이 독립운동을 했다. 그들이 겪었을 고생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집안은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치는 바람에 해방 후에는 자녀들이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투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서슬 퍼런 감시로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해방 후에는 가난 탓에 학교에 다니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석주가(家)에는 다른 어떤 가문보다 더 고귀한 유산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이다. 개인적인 손익을 따지지 않고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이와 같은 호연지기의 정신은 오늘날 그 후손들이 다시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구한말 퇴계학통의 유학자였던 석주 이상룡은 고성 이씨 17대 종손으로 안동시 법흥리 안동댐 진입로에 위치한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그는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1911년 1월, 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고 떠나 현재 사당에는 봉인된 신위가 없다.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를 건립했으며 항일독립운동단체 경학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한족회 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했다.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의 유고를 안고 귀국한 아들 이준형은 10여 년 간 일제의 끈질긴 고문·협박과 함께 변절의 요구를 받자 1942년 이상룡 선생의 문집인 ‘석주유고(石洲遺稿)’ 정리를 마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현충원 내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이름 지은 안동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이다. 사당과 별장형 정자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이상룡 선생은 이곳 군자정에서 호연지기를 키웠다.
안채 튼방 앞에는 여러 명의 정승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우물방이 있다. 우물방은 진음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실제로 임청각의 외손들 중에서 여러 명의 정승이 나왔고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임청각 출신 9명의 독립유공자 모두 이 방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13:36~14:00 3대에 걸쳐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을 포함하여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고성(固城) 이씨 가문의 종택인 안동 임청각을 탐방
[안동 임청각
분 류 : 건물
지 정 : 보물 182호 (1963. 1. 21)
시 대 : 조선시대
이 건물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 영산현감 이중공이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이거하여 그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이다.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온 오래된 건물이다.
대청에 걸려있는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로 알려져 있다.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별당건축이다. 정면 2칸에 측면도 2칸인 대청이며 남향으로 세웠다.
그 서쪽에 연접해서 丁자형으로 온돌방을 부설했는데 그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건물의 주위에는 쪽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다.
온돌방의 한부분은 각주를 세워 굴도리를 얹은 간단한 구조로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청은 원주를 사용하고 그 위에 이익공계통의 공포와 그 사이에 화반을 1개씩 배치하였으며 겹처마로 만들었다.
공포는 건물의 외면에서는 쇠서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간소하게 초공으로 꾸며져 있다. 벽은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에는 판문을,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아 놓았다.
처음에는 대청전체에 단청을 하였던 것 같으나 현재는 내부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청의 대들보 위에 얹은 대공은 접시받침과 첨차 및 초각반을 갖춘 동자주 형식이며, 종량위에는 상부에 첨차가 가로 낀 제형대공이다.
종량을 길게한 3분변작법을 채택하여 지붕의 합각부분이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임청각 서쪽에 위치한 본채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잡았는데 총 50칸을 넘는다.
전면 아래서부터 동서 길이 12칸의 행랑채와 그 후면에 다시 같은 길이를 이룬 두채가 병행되는데 제일 뒤 건물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전면 좌우에는 앞뒤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어서 안마당은 세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서단은 다락방으로 남북을 연결하였으며 이들은 곳간으로 사용되고 부엌도 이쪽편에 위치하였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이고 맞배지붕들인데 대청은 소슬지붕이다.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집이나 안채와 대청은 굴도리집이다. 건축양식상으로는 대청의 가구재로서 포대공이 눈에 띤다. 대청의 규모는 3칸×4칸인데 전면에 퇴가 달렸다.]
14:00~14:04 임청각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103 번지에 있는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으로 걸어서 이동 [4분, 0.2km]
14:04~14:30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인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을 탐방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국보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으로 높이는 17m, 기단부 7.5m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법흥리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다. 또한 기단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는 단층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칠층전탑의 구조는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돌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초층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 단· 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차츰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 탑은 목탑을 모방한 것임을 보여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동오이(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상유금동지식이고철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上有金銅之飾 李股撤面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30~14:32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을 출발하여 경북 안동시 상아동 502-1 번지에 있는 안동 월영교 공영주차장으로 이동 [2분, 1.6km]
14:32~15:40 월영교와 안동민속촌을 탐방
[안동 월영교
월영교란 명칭은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오게된 인연과 월곡면, 음달골의 지명을 참고하여 지어지게 되었다. 낙동강을 감싸듯 하는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들게 한다. 월영교는 이런 자연 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념하고자 했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예능 <나는 솔로> 16기 영식, 현숙이 한복을 입고 산책을 즐기던 장소다. 야간 조명으로 한층 로맨틱해진 분위기 덕분인지, 두 사람은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영식, 현숙처럼 달밤 산책을 즐겨도 좋지만,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문보트를 타고 강 위에서 월영교 풍경을 감상하면 특별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안동민속촌
안동댐의 보조댐 부근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언덕배기에 초가집이 드문드문 들어앉아 있다. 이곳이 바로 안동댐을 조성하면서 수몰된 지역의 가옥 몇 채를 옮겨와 야외박물관으로 만든 민속 경관지이다. 안동민속촌의 야외박물관입구에는 두 개의 장승이 반기고 있고 이어서 이 고장이 낳은 문인 이육사 선생의 시비 앞으로 발걸음이 옮겨진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광야’가 새겨져 있다. 육사시비 앞에는 그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안동댐 주변에는 안동 민속촌과 안동 민속박물관, 이육사 시비,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장, 안동호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안동시립민속박물관(安東市立民俗博物館)
경상북도 안동시 성곡동(민속촌길)에 있는 시립 박물관.
개설 및 설립목적
경상북도 북부지방 안동문화권의 민속 문화 전반에 대한 수집, 조사, 연구, 보존, 전시를 통하여 시민 및 관람객들에게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사회 교육 및 전통문화 체험교육 기회 및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시민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낙동강 주변 수몰지역 내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 중 일부를 이건하여 민속경관지를 조성하였다. 그 후 1978년 11월최규하 국무총리가 안동댐을 순회할 때 민속경관지 내에 민속박물관 건립을 건의하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79년 8월 도립안동민속박물관 건립계획을 확정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시립민속박물관으로 변경추진되었다. 1982년 5월 4일 박물관 건물 기공식이 이루어졌고 1992년 6월 26일 안동시립민속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008년에는 안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정자, 재사, 서원, 고택 등 건축물 10여 동을 이건하여 고건축박물관을 구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기능과 역할
전시와 사회교육과 학술조사사업을 중심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전시는 3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로 구성된 실내전시실과 야외박물관, 고건축박물관 등에서 안동지역의 역사와 관혼상제나 전통놀이 등 생활풍습에 관한 자료 및 안동지역의 오래되고 특색있는 건축 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학술 조사와 연구 활동으로는 해마다 학술총서를 발간하고 있는데 2011년까지 『안동의 재사』1, 2 · 『안동의 계』1· 2· 3· 『안동의 무속』 · 『안동의 사찰』 · 『안동의 서원향사』 · 『안동의 동제』 등 20여권의 학술총서를 발간하였다. 사회교육사업으로는 박물관대학 운영, 어린이민속교실운영, 전통문화체험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박물관 대학은 3월에서부터 12월까지 둘째, 넷째 금요일에 전통문화에 대한 전문강사의 강좌와 전국 역사유적지에 대한 답사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공예품을 체험하고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교육프로그램과 방학기간동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 민속교실을 운영함으로서,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안동지역을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교육과 이해에 폭을 넓히는 박물관으로서의 교육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현황
대지면적 211,050㎡ 에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전시실 · 시청각실 · 수장고 · 교육시설 · 연구실을 갖추고 있다. 전시의 주제는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어서 땅에 묻히고 제사지내는 일련의 과정 즉 통과의례(일생의례)로, 제1전시실에는 안동의 선사문화와 불교문화 그리고 조선시대 행정중심지임을 밝히는 전시를 통해 안동의 역사변천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동제당, 기자, 산속(産俗), 성장, 복식과 음식문화, 수공업과 농업, 농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혼례, 교육, 취미, 주생활문화(안방, 상방, 사랑방), 환갑, 상장례, 제례, 묘제 등 생활문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안동문화권의 민간신앙과 민속놀이인 차전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놋다리밟기, 가마싸움, 원놀음, 화전놀이 등이 모형으로 연출되어 있다. 야외박물관은 민속경관지와 고건축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고건축박물관에는 계남고택, 북강정, 애련정, 박산정, 고성이씨 재사, 우향각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품을 포함하여 현재 약 4,600여 점의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석빙고(보물, 1963년 지정), 월영대, 선성현객사, 안동의촌동초가도토마리집, 안동토계동계남고택, 안동사월동초가토담집 등 6점의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월영대, 선성현객사는 197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안동의촌동초가도토마리집, 안동토계동계남고택, 안동사월동초가토담집은 197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조직은 관장 아래 관리담당과 민속향토사연구담당을 두고 있으며, 총 14명의 직원이 소장유물 및 수장고 관리, 전시실관리, 유물구입, 전시사업 추진과 시설관리 및 방호업무에 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안동지역에 깊이 뿌리 내려있는 각 시대별 문화현상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를 통해, 전통성과 다양성을 지닌 안동 문화의 특징을 살려 지역 문화의 중심에 서서 세계로의 비상을 모색하는데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아울러 사회교육을 통해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의 유구한 문화를 향유하고 새 천년을 이끌어갈 새 시대의 문화인을 양성하는데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15:40~16:44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안동 월영교 공영주차장을 출발하여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17 번지에 있는 삼강주막마을로 이동 [54분, 61.1km]
16:44~17:30 삼강(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모이는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주막인 삼강주막에서 휴식
[예천 삼강주막
삼강주막은 삼강나루 나들이객의 허기를 달래주며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건물이다. 주막의 부엌에는 글자를 모르는 주모 할머니가 막걸리 주전자의 숫자를 벽면에 젓가락으로 금을 그어 표시한 외상 장부가 눈에 띈다. 1900년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유옥연 주모 할머니가 지난 2006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가 2007년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새로운 주모와 함께 나들이객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17:30~20:10 “노블레스 클럽” 버스를 타고 예천 삼강주막을 출발하여 서울 교대역으로 귀경 [2시간40분, 191.5km]
안동 봉정사 지도
안동 [임청각&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지도
[안동 월영교&안동민속촌] 지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