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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좌절해도 부딪치는 거야. 은혜 갚은 까치처럼 머리가 깨질 때까지 부딪치고 부딪치는 거야. 종소리가 나서 뱀이 승천할 때까지 해보는 거야. 트라우마, 트라우마, 트라우마, 미칠 것 같은 트라우마, 교묘하게 날 위로하는 척하는 그녀랑 끝까지 누구 대가리가 깨지는지 부딪쳐 보는 거지.
K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절대 용서 안돼. 마치 암행어사 박문수처럼 나대던 모습. 그냥 넘어는 가주지. 약속이니까 슬쩍 지나쳐주지.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한다. 내가 죽기를 차라리 니들은 바라겠지. 그게 가장 빠른 익스프레스 코스일 것이다. 삶이란 게 그런 거야. 원래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안위를 채우는데 급급하지. 죽어도 절대 용서 안 한다. 난 가루가 되어도 세상을 날아다니면서 팅커벨처럼 너희를 찾아낼 거니까. 시체냄새를 가장 먼저 맡고 달려드는 검정파리가 될 것이다.
장애인과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 내가 바로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삶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지만 특히 정신장애가 있는 나 같은 미친인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매 순간 상대가 나를 배려해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애를 특권으로 여기고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식이 내면깊이 뿌리 박혀있기 때문이다. 누가 제발 내 피 끓는 슬픈 사연을 이해 좀 해달라고 매달리지! 신의 총아인 니들이 나 좀 제발 봐달라고 소리치지!!
유진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었다. 적어도 그처럼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그는 사후 20년이 지나 책을 출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마저 묵살당했다 그의 아내가 미리 출간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은 언제나 불편하다. 상처나 고통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돌아보면 미리 예약한 코스요리처럼 불행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어디까지 불행할까? 한번 맞짱 떠보고 싶다. 이 끔찍한 난간을 올라서면 또다시 찾아오고 난 소녀 가장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정신장애를 얻고 나니 알겠다. 불행은 너희에게도 찾아갈 것이다. 이제 난 그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뛰는 내 심장에 제어를 걸어야 한다.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미쳐서 날뛴다. 난 언제나 내 인생의 서투른 조련사! 투우에 출전하는 소처럼 24시간 어두운방에 가두어둔다. 끌려 나온 소는 햇살의 화살에 맞아 미쳐 날뛰지.
족쇄를 달고 탈출한 재수처럼 난 늘 삶이 두렵고 거추장스러웠다. 언제 어디서든 끌이 될 것을 찾기 위해 눈을 휘번득거려야 했다.
수백 년간 이끼낀 동굴 속에 잠자던 위대한 경전의 비밀을 엿보듯 삶을 훔쳐본다.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물이 새어 들어오는 섬뜩한 공포를 난 잘 알고 있다. 쫓고 쫓기는 자, 내가 겪은 코로나는 살아 움직이는 망령 그 자체였다. 삶에서 공포가 어디 그뿐이겠냐 마는 정말 그러했다. 메두사의 뗏목에 올라타서 살을 뜯긴 듯한 공포, 그냥 공포스러움 그 자체였다.
슬픔과 공포 무엇보다 살면서 전국에서 택함 받은 번호 안에 들 만큼 난 일생동안 운이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낯선 병동에 끌려가서 확진 문자 두 시간 후, 끌려가서 알 수 없는 질병에 간염 되었다는 이유로 미지의 세계에 버려진 느낌, 극한의 공포와 광기 어린 인간들의 댓글은 내 골수까지 다 빨아들였다. 소리 없이 뿌리로 관을 뚫고 들어와 시체의 썩은 물기를 빨아들인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을 훔쳐 마시는 아카시아 뿌리!
삶의 위대한 비밀을 발견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운이 좋았던 그날, 이후의 내 삶은 겨우살이처럼 변했다. 다른 나무에 운 좋게 빌붙어 산다. 정신과 약을 먹고 자는 잠은 깨어나도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고, 어제와 오늘이 아닌 오늘과 오늘이 헷갈리게 한다. 기생 식물 같다. 입천정은 늘 헐어있고, 손끝엔 사하라 사막이 따라다닌다. 발엔 통풍이 와서 인어공주실사판 체험이다. 빨간 구두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발이 잘릴 때까지 핏물을 흘리며 춤을 추어야 한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빨간 구두를 신고 싶어 한 소박한 소녀의 죄명이 무엇일까? 꿈같다.
지난달만 해도 수시로 전화를 하던 아버님께서 중환자실에서 목이 뚫리고 온갖 장비 두르고 마지막 25일 동안 사투를 벌이게 만든 등골 브래이커 의사가 역겹다. 지성파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육 두 문자가 육자명호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로 들렸다. 가족들 손 한 번씩 잡아가며 작별인사하는 그런 이상적인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수십 년 전 드라마나 사극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현세의 죽음은 산소호흡기나 끼고 공상과학영화 속 돌연변이처럼 온갖 장비 달고 숨만 붙어 겨우 버티다 가는 것이다. 28년 전 결혼하고 바로 입주한 아파트 주차장에 어느 날 텐트가 쳐지고 곡소리가 밤새 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모든 주차장을 자기 것인 양 써도 이웃들은 숨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우리들에겐 이웃과 함께 아파하는 배려심도 있었고 망자에 대한 예의도 있었다. 누구네집 초상일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과거가 새삼 그립다. 그 시절 우리에겐 그래도 배려심이나 측은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난 처음 보는 이웃인데 부조까지 하는 뻔뻔함도 내보였다.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뿌듯한 마음으로 살아가니 얼마나 당당하고 좋은가! 내 장례식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틀 자격이 하나 들었다. 내 삶의 프로필에 한 줄이 더 들어간다. 부고장은 또 다른 초대장이다. 나름 친하다 생각하고 보내주는 것이니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친하지 않음 무시하면 된다. 두려움의 산을 또 하나 넘어섰다.
마침내 장엄한 대지의
제단 위에 나를 눕히고
수십 년간의 쉼 없는
발걸음을 멈추고
마지막 종착지에 도착한
순례자처럼 이제
나를 쉬게 하리라.
어느 날, 근사하게 쉴 권리를 빼앗겨 버렸다. 경악할 만큼의 병원비보다 더 서글픈 현실은 차라리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더라면 마지막 인사는 근사하게 드렸을 텐데 아쉬움이 가슴을 후벼 판다. 작별의 시간도 못 가지고 헤어졌다.
이제 부고장을 V.I.P초대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삶이 신산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엉킨다. 정신과에서 일용할 나의 양식인 약을 타서 나오는 길, 남편이 말했다. "너만 정상인 것 같아!" 과연 그럴까? Nobody knows!!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