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난 삶의 歷程에서 아찔했던 순간(1)
一 松 韓 吉 洙
“人命은 在天이라” 이 말은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목숨의 길고 짧음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운명론자가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으니 하늘에 맡긴다는 하나의 체념적인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만물 중에 인간이 最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어떻게 처신을 하고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고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인간의 수명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썩 내키지 않는다.
사람의 건강 유지에는 3고라는 말도 있다.
책을 많이 읽고 친구를 많이 두어 자주 만나고 운동을 많이 하여 근육을 키우고를 이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의 인사로 건강하시라는 덕담을 보내기도 하고 <재산을 잃는 것은 작은 손해요 건강을 잃는 것은 큰 손해다>라는 주문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건강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아닌가.
필자는 산수 傘壽에 이르기까지 지난 역정에서 생사의 아찔한 고비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를 정리해서 몇 토막으로 나누어서 기술하려고 한다.
0. 인삼을 달여 먹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
필자가 겨우 돌이 지난 떡 아기 때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펴낸 낙수첩 제8집 [思母曲] 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데 先親께서 시골 사람들의 아픈 곳에 침도 놓고 뜸을 놓고 약을 주는 인술을 베풀자 많은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慈親께서는 필자를 등에 업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고 하는 시중을 들다 보니 아기가 감기가 들었는지 몸에 열이 나고 보채고 있었다. 이때 선친은 출타 중이셨는데 19세 자친께서는 환자에게 달여주던 인삼이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이를 꺼내서 다려서 아기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였던 것이었다. 이것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어서 아기가 열+열로 숨을 멎었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 인삼이라고 하면 상당히 귀한 약제인데 열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에게 19살 철부지 새댁이 인삼이 좋은 약으로 잘못 알고 이를 먹였으니 열이 몇 배 더 상승하여 이제 돌 지난 아기가 죽었다.
저녁 늦게 선친께서 돌아오셨는데 늦게 보신 아들(晩得子)이어서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하룻저녁에 죽어서 강보에 싸여 있었다. 참 기가 막히는 장면이었다. 이는 갑자기 닥친 청천벽력이요, 하늘이 무너지는 참척이었다. 그래서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하나의 운명으로 돌리고 날이 새면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으려고 윗목으로 밀어 놓고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모두가 시름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자께서 선친도 모르게 아기를 업고 가출하였다. 그래서 선친께서 母子를 찾아 나섰다. 선친께서 母子를 찾아 나섰는데 안개가 덥힌 깊은 산중인지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방황하였다. 이때 산 위에서 스님 한 분이 내려오기에 자세히 보니 축성산 佛智寺 주지 스님인지라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였더니 주지 스님께서
“아이를 찾으려고 왔느냐?” 물은 뒤 열쇠 3개를 주면서
“아기를 찾으면 절대로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곧바로 내려오라”기에 명심하고 한참을 올라가니 큰 대문이 나오기에 열쇠 하나로 문을 열고 한참을 들어가니 또 대문이 있어서 열고 들어가서 마지막 세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넓은 별천지가 있는데 아이를 업은 부인들이 많이 모여서 집단으로 작업하는 현장인지라 겨우 아기를 업고 김을 매는 애 엄마를 찾아서 빨리 가자고 팔을 끌고 대문을 나왔단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세 갈래 길이 있는데 길가에 어느 누가 치성을 드리려고 엽전 3냥과 백지 3권이 놓여 있는 걸 선자께서 아까우니 주워가자는 걸 선친께서 만류하며 애 엄마를 앞세우고 돌아오는데, 패랭이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험상궂은 사람 3명이 흘깃거리며 선자를 쳐다보기에 고개를 숙이고 그냥 나오다가 외나무다리에서 넘어져서 개천에 빠지는 순간 잠을 깨고 보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저승사자였는가 보다.
선친께서 시름에 겨워 한탄하시다가 잠깐 졸았는데 이때 꾼 하나의 꿈이었다. 아니 이것은 남가일몽이었는지 모르겠다.
꿈을 깬 선친께서는 수심에 차서 넋을 놓고 있는 장모님과 아이를 받은 병풍 쟁이 할멈 등 모든 분에게
“이 아이는 불에 넣어도 죽지 않을 터이니 염려 말라”고 한 뒤 담배 한 대 태울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아이의 시신에 온기가 돌아오고 숨을 쉬기에 필자의 제2의 삶이 시작된 것이라 한다. 선친께서는 우리가 살았던 고장의 이웃인 나포면에 있는 불지사에 자주 시주를 하시었기에 부처님의 가호로 필자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시었다. 필자는 불자는 아니지마는 어찌 되었건 부처님의 가호로 제2의 삶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洪福인지 모르겠다.
0. 6.25 전란 중에 마구잡이로 몰아간 學徒兵
1950년 미증유의 참상인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불러온 6. 25동란은 우리나라의 발전 동력을 꺼트려서 상당 기간 후퇴시킨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는 중학교 3학년 때 발발한 6·25 동란이기에 기억이 생생하도록 겪었다.
그런데 수도 서울도 함락되고 정부도 어디로 인지 피난한 어수선한 마당에 하루는 거리가 편도 10km 정도 떨어진 함열중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소집통지서가 필자에게 전달되었다.
때는 삼복 지경인 7월 중순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전세는 아군에 불리하여 국군이 연일 후퇴하는 중이어서 언제 이곳에도 북쪽 인민군이 몰려올지 모르는 뒤숭숭한 시절이었다. 시국이야 어찌 되었건 국가의 명령이기에 필자는 학생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걸어서 지정된 운동장에 도착했다. 이곳에 와 보니 익산군 16개 면 중 서북에 있는 8개 면의 젊은이와 학생들을 이곳으로 소집한 듯하다. 그날이 마침 함열 장날이어서 그랬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과 같이 따라온 학부모 등으로 중학교 운동장은 흡사 장마당처럼 복잡했다.
그런데 운동장 한쪽에는 군용트럭이 여러 대가 대기 중이었고 교실 한편에서는 징병관인지 모병관인지 모르지만, 입대를 현장 결정하는 판정관이 좌정하고 있었다.
필자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면별로 대상자를 면 직원이 불러 세운 뒤 차례대로 한 사람씩 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면은 언제인지 모르기에 필자는 초조하게 땡볕에 앉아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우리 면사무소에서 총무인지 서무 일을 담당한 외가로 형 되는 분이 나를 찾고 있었다. 필자를 겨우 찾아낸 형이 하는 말
“지금 학생 중에 전쟁에 필요한 현역을 선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뽑히면 바로 전투에 투입될 것이다. 그러니 학생의 때를 벗고 농민행세를 하여야 하니 얼굴을 까맣게 그슬린 것으로 만들고 삼배로 된 잠방이와 적삼으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농부행세를 해야 死地로 가는 걸 면할 수 있으니 빨리 행동을 취하라.”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 어른이나 아는 사람을 찾았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이 근처에 사시는데 함열 장에 볼일을 보러온 이모부를 만났다. 천우신조로 우연한 만남이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이모부를 이끌고 학교의 빈 교실을 찾아가서 필자의 의복과 이모부가 입은 농부의 옷을 바꿔 입고 밀짚모자도 빌려 쓰고 운동장 가에 가서 흙을 손으로 파서 침을 발라 얼굴에 문지르고 나니 천 상 농부 스타일이었다. 갑자기 농부로 변장을 하고 행사장으로 가니 부면장이 문 앞에 서서 마침 필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농부 스타일로 걸음을 걸으며 교실에 들어서니 한가운데에 판정관이 앉아있고 경찰 관계자와 군청 관계관이 양옆으로 배석하고 있었다. 아! 이 순간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판정관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필자는 못 들은 척하고 있으니 재차 묻기에 “한길수인데요” 하고 씩 웃었다.
그랬더니 판정관이 오른쪽 문으로 나가라고 하기에 냉큼 밖으로 나왔다. 그 뒤 바로 부면장이 필자의 이름을 부르며 필자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나 겨우 사지를 벗어났는데 부른다고 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필자는 바로 군중 속에 섞였더니 필자의 이름을 부르다 말았다. 아마도 필자의 모습만 보고 농부로 오인을 하고 손으로 오른 쪽문으로 가라고 한 뒤에 명부를 들여다보니 필자가 중학생임을 알고 판정관이 “아! 나의 실수!”를 외치며 부면장에게 필자를 찾아오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연기 演技를 아주 완벽히 잘한 것 같았다. 필자의 함열중학교 농민 쇼는 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있었던 장면인가.
이날 판정관의 손가락은 아마도 염라대왕의 천당과 지옥을 가리키는 하나의 요술 방망이였다. 이날 필자는 후환이 있을까 보아 고선지에 사는 이모네 집으로 가서 하룻저녁을 유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바로 뒤에 인민군이 쳐들어왔으니 필자의 그 날 쇼는 아무런 뒤탈도 없었다.
이때 우리 마을에 사는 필자보다 3살 연상인 조한욱 청년은 학생도 아닌데도 그날 선발되어 왼쪽 창문으로 나가서 대기 중인 군용트럭에 타고 가서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는데 시신도 못 찾는 총알받이가 된 일이 있다. 이 당시 애꿎은 학생들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엄청난 희생이 있었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인민군이 바로 뒤쫓아 오니 이 닦고 세수하고 똥 눌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급하니까 일정한 훈련도 없이 겨우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만 시킨 뒤 전선에 투입했으니 그 결과야 보지 않아도 다 아는 불문가지 아닌가.
필자도 당일 현장에서 선발되었더라면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아니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른쪽으로 가라는 판정관의 손가락 덕택으로 지금까지 삶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