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3행은 정형성이 아니다.
시조의 3행 유지를 고수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입니다. 시는 다른 문학 장
르와 다르게 행갈이와 연갈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행과 연의
분절이 시라는 장르가 가진 고유하고 특수한 속성인데, 이 속
성은 그저 시와 산문을 나누는 표기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행연의 분절이 바로 시 자체이기 때문이죠.
“시는 모든 것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6쪽)
그렇습니다. 분절된 문장 사이의 부족함과 의미의 공백을 독
자의 공간으로 남겨두면서 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끝까
지 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데, 다 형용하기 어려워
리듬으로 보여주고 그 리듬도 부족하여 공백을 남겨둡니다. 그 공
백이 바로 시. 시의 형식과 내용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형식
이 곧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입니다. 형식 자체에, 행과 연의 분
절에 의미가 있습니다. 시의 의미는 활자에만 있지 않습니다.
시조 역시 마찬가지. 시조의 장은 말할 것도 없고, 행갈이와
연갈이를 통해 리듬을 보여줘야 합니다. 무분별한 행과 연의 분절
이 시조의 정형성을 무너뜨린다고요? 3행이 정형성인가요? 4마디
를 한 행에 보여줘야 정형성인가요? 물론 시조시인들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작품에 알맞은 행과 연을 분절하면서 초, 중장과
전혀 다른 종장의 반전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반전은 단순히 글자 수의 변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장, 중장, 종장 모두가 비슷한 내용, 같은 ‘톤 앤 매너
(tone & manner)’를 보인다면, 시조가 아닙니다. 그냥 3행시죠. 아
니면 4구체 가사(歌辭)입니다. 종장은 초장과 중장과 다르게 반전
이 있어야 하고 충격과 공포가 있어야 합니다. 무릎을 ‘탁’치게 하
는 묘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조의 정형성입니다. 정형
성은 형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3행은 정형성이 아닙니다.
시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변형과 모든 시
도가 가능한데, 4마디 초-중-종장의 미학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
이 관건이죠. 얼마나 멀리 가서 되돌아올 수 있느냐에 시조의 겅패
가 달려 있습니다. 즉, 어린이 놀이 땅따먹기와 시조는 같은 원리
입니다. 3번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야 땅을 먹을 수 있듯, 시조 역시
초-중-종장 3번으로 끝내야 합니다. 너무 멀리 가면 3번에 돌아올
수 없죠. 행갈이와 연갈이로 만들어진 리듬을 저 멀리 보내서 3번
만에 종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이고 가슴 벅찬
일인가요.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입니다.
무궁무진한 시조의 리듬을 3행으로 가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3행으로 하기에 시조는 너무 넓고 웅숭깊습니다. 시조의 정형성은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듬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리듬은 형식
으로부터 시작해 의미 형성에 관여하며, 리듬이 바로 시조 자체입
니다. 시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당신처럼 말입니다.
현대시조 입문서, ‘오늘부터 쓰시조 김남규, 헤겔의 휴일
8. 시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111~113중에서
첫댓글
세번만에
종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무한 건필
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