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초로(草露)
나는 이슬 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기러기
허드레 허드레 빨래줄을 높이 들어올리는 가을 하늘 늦비 올까 말까 가을걷이 들판을 도르래 도르래 소리로 날아오른 기러기떼 허드레 빨랫줄에 빨래를 걷어가는 분주한 저물녘 먼 어머니
*단풍놀이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성화(聖畵)
별빛은 제일 많이 어두운 어두운 오두막 지붕 위에 뜨고 귀뚜리는 제일 많이 어두운 어 두운 오두막 부엌에서 울고 철없이 늙어버린 숯빛 두 그림자, 귤빛 봉창에 비쳐지고 있었다
*난(蘭)
난을 기르듯 여자를 기른다면 오지게 귀 밝은 요즘 여자가 와서 내 뺨을 치고서 파르르 떨겠지
*낙화시절
누군가가 <이 강산 낙화유슈 흐르는 봄에> 문밖 세상 나온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방 찍고 가자 해 사진을 찍다가 끽다거를 생각했다 그 순간의 빈틈에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고 나도 터진다 빈몸 터진다 <이 강산 낙화유슈 흐르는 봄에>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언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로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낙차(落差) -해우소에서
마음 놓고 듣네 나 똥 떨어지는 소리 대웅전 뒤뜰에 동백나무 똥꽃 떨어지는 소리 노스님 주장자가 텅텅 바닥을 치는 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소리
*늦꽃
들국화는 오래 참고 늦꽃으로 핀다 그러나 말없이 이름 없는 佳人 같아 좋다 아주 조그맣고 예쁘다 예쁘다를 위하여 늦가을 햇볕이 아직 따뜻했음 좋겠는데, 이 꽃이 바람의 무게를 달고 홀린 듯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꽃이 가장 오랜 늦꽃이고 꽃이지만 중생 같다
*죽편. 2 - 공법
하늘은 텅 빈 노다지로구나 노다지를 조심해야지 조심하기 전에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조심하고 나서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잣대 눈금으로 죽절 바로 세워 허허실실 올라가 봐 노다지도 문제 없어 빈 칸 닫고 빈 칸 오르는 푸른 아파트 공법
**서정춘 시인은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죽편》(1996) 《봄, 파르티잔》(2001), 등의 시집을 냈다. 한 편의 시집을 아껴 내고, 28년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한 시인의 말이 부드럽고 날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