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어둠이 저녁의 꼬리를 물고 가던 유월 어느 날 나는 그대를 찾아가다 넘어지고 말았다
기적 소리가 울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사방엔 연초록의 흔들림만 분명한데,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대를 찾아가다 넘어지고 말았다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가다 비의 방지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비가 내리고 꽃이 졌다는 건 한 사람의 영혼이 길을 떠났다는 뜻이다
달을 꿈꾸던 꽃의 심장 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영혼이 어둠의 건너편을 향해 손을 흔든다
적막한 저녁이 저물고 있다 -「적막한 저녁」 전문
■ 차례
서시 _ 화양연화
제1부 마량에 가야 한다/모기사냥/우표 없는 편지/곱빼기는 안 팔아요/모논/적막한 저녁/어느 환경운동가의 죽음/슬픔변경선/오후 세 시의 낮달/그대, 지리산으로 가라/신 사랑가/마지막 김장/아그배나무 세 그루가 있는 풍경/정치인의 자격/첫 키스/첫사랑/초침에서 분침까지/반달의 사랑
제2부 주상절리에 가야 한다/처녀 장례지도사 선미 씨/마지막 광부/등을 읽었다/빈집/펜혹을 벗다/하얀 민들레의 귀환/개 같은 날의 아침/별에서 온 여자/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결/활화산/나팔꽃 소녀에게/나비의 꿈/응답하라 1991/청량리시장 홍두깨 칼국숫집/2월의 별빛 사리/함박눈
제3부 달이 돌아왔다/사랑의 마피아/오우도/최초의 꽃빛/우리는 지금 청령포역으로 가야 한다/진달래꽃 필 무렵/꽃춘기/물고기의 변명/종점/진달래꽃의 변명/소금 연인/아버지의 꼬리/바람난 유월/달이 기울다/하얗다/명자꽃의 비밀/이름의 의미/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릉역에 내리면/자아와 초자아 사이
제4부 희망을 파는 사월/두부 장수/소쩍새를 조문하다/밑장 빼기/그늘/정암사 적멸보궁에 비가 내리면/평창 오일장/61년생 김영호에게/부르지 못한 별의 노래/봉투/밥 한번 먹자/바람의 사형수/독獨, 毒/검룡소 가는 길/불/비자림/몽유도화도/마지막 인사
■ 시집 속의 시 한 편
등이 닿았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인생의 무늬가 새겨진
그 사람의 등에서 물고기가 파드득거렸다
사람의 온도를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등에서도 별 냄새가 났다
말 한마디 없어도 수많은 말이 오고 갔다
등을 맞댔는데 심장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등이 맞닿은 동안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무늬가
그대로 카피되어 내 등에 새겨졌다
이렇게 빨리 한 사람의 일생이
건너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의 등으로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가 읽고 있는 시집 속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 녹고 있었다 -「등을 읽었다」 전문
■ 서시
화양연화
까마득한 공중에서
연분홍 꽃잎 한 장 날아와
내 가슴에 닿았다
노을이 부드LOVE게 출렁거렸다
삶이 꽃이 된 이 순간,
이젠 아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김남권
경기도 가평 출생.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타는 학의 날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