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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1477]울산 중구 태화루(太和樓)
울산 태화루(太和樓)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4대누각으로,
울산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대표적 유적이기도 합니다.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태화루(太和樓)가 자리하고 있어,
태화루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온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울산에 도착하여 태화사를 세울 때 함께 건립했으며,
태화강변 황룡연 절벽 위에 위치 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역사와 미래가 있는 태화강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재 탄생하여 태화강대공원, 십리대숲과 산책로로 이어지며,
태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조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태화루(太和樓)는 고려 성종(成宗)이 울산에 행차했을 때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을 정도로 유명한 누각 였으며,
조선 전기에만 해도 두 번의 중수가 있었고 권근(權近)의 기문과
서거정(徐居正)의 중신기를 통해서 누각의 규모와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중수때마다 당대 최고 학자들이 기문(記文)을 썼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 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400년의 역사가 흐른
2014년에야 태화루가 중건하여 복원 되었습니다.
태화강변 쪽에 올려져 있는 태화루(太和樓)의 현판으로,
서거정(徐居正)으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과거 학성관 남문루에 걸려 이휴정에 보관하고 있다가
울산박물관에 기증된 한자 현판을 확대모사하여 걸었다고 하며,
반대쪽에는 한글현판이 걸려있어,
진주출신의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의 글씨 입니다.
다시 중건된 태화루(太和樓)는,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같은 양식인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으로,
누각에 올라오면 대들보 등의 부재들이 곡선이 많고 목재간의 짜임새가 정교하여,
그 멋이 단청과 어우러져 단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극기(金克己) 대화루시서(大和褸詩序)로,
태화루(太和樓)의 내력을 알려주는 기문(記文) 편액이 있고,
권근(權近)의 대화루기(大和褸記)의 기문(記文)이 있으며,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의 태화루중신기(太和樓重新記)의 편액이 있어,
태화루에 대한 고려와 조선 때의 글은 현재까지 시문(詩文)인 제영(題詠) 아흔일곱 편과
산문(散文)인 기문(記文) 열 편이 확인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글로 쓰여진 태화루중창기(太和樓重創記)의 기문(記文)으로,
울산광역시장 박맹우의 찬(撰)이며 김경욱의 서(書)이며,
태화루(太和樓) 에서의 전경으로,
태화강 너머로 십리 대나무숲과 주변 풍광이 시원하게 들어오며,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1734년(영조 10년)에 울산부사로 부임 해 온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이곳에서 지은 시(詩)로,
遺墟只說 太和樓 江水滔滔 日夜流
이 유허지가 태화루터라고 하는구나
강물은 도도히 밤낮으로 흐른다
遠客豈知 當日意 虗舟謾繫 古津頭
멀리서 온 객이 어찌 당시의 뜻을 알리오
/ 빈배만 일 없이 옛 나루에 매었네
晩煙鋪作 平郊色 凉葉粧成 滿壁秋
저녁 연기가 집집마다 오르는 교외의 풍경이라
서늘한 낙엽은 가을 절벽을 단장하였네
從古廢興 皆有數 且呼芳酒 滌閒愁
세우고 무너지는 것이 예로부터 있어온 일
오호라, 좋은 술로서 시름을 달래노라
누각 아래에 태화강의 용소와 태화교가 있고,
너머로 현대화의 일환인 빌딩 숲이 세월의 흐름을 전해주는듯 하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화루는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중국 태화지를 지날 때 홀연히 용이 나와서,
"나를 위해 경기 남쪽에 정사를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덕을 갚으리라"는
말을 하고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당나라에서 받은 사리를,
경주 황룡사 9층탑 기둥속과 통도사의 금강계단,
태화사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여 용의 청을 들어 주었다고 하며,
이 때 지어진 절이 지금 태화루를 포함한 동강병원일대의 태화사이며
당시 태화루는 태화사의 부속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설화에 따라 현재 태화루가 서 있는 태화강 아래는
황룡연 또는 용금소라고 불리고 있으며,
용금소 위에 불쑥솟은 바위를 용두바위라고 부르고 옛날에 울산사람들은
가뭄 때는 용두바위에서 제수를 차리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울주8경" 중 하나로 울산의 명소였던 태화루(太和樓)는,
복원공사에는 목재 425톤 과 석재 806톤, 기와 47,818장 등이 소요 되었으며,
신응수 대목장에 주도로 건립 되었다고 합니다.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48
太和樓. 푸른 강물 굽어보며 풍월(風月)같은
맑고 광대한 도량이 해천(海天)처럼 웅장하네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로 태화강변에 위치한 태화루(太和樓)는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영남지역 삼대루(三大樓)로 이름났다.
신라 때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 성종이 이곳에 행차하여 잔치를 열었다.
조선조 두 번 고쳐지었으며 임란(壬亂)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갑오년(2014)에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다시 지은 정면7칸, 측면4칸의 주심포 팔작지붕의 누각이다.
태화루 주위 풍광의 아름다움은 장춘오(藏春塢), 평원각(平遠閣),
망해대(望海臺) 등과 함께 울주팔경(蔚州八景)으로 이름났다.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기문과
설곡(雪谷) 정포(鄭誧),
가정(稼亭) 이곡(李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등의 선비들이
태화루의 아름다움을 노래
울산(蔚山)은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파사왕(婆娑王) 때 현(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하곡(河曲) 또는 하서(河西)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태조 때 동진(東津)과 우풍(虞風) 두 고을을 합쳐서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켰다.
그 후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 방어사를 두었다.
조선 태조(太祖) 6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로서 지주사를 겸하게 했다.
선조(宣祖) 31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병마절도사로써 부사를 겸하였고,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1997년 7월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고을의 별칭으로 굴아화(屈阿火), 하곡(河曲), 울주(蔚州), 학성(鶴城), 흥려(興麗),
흥례(興禮)라 불렀다. 고을 서쪽은 밀양(密陽)과 청도(靑道),
남쪽은 기장(機張)과 양산(梁山), 북쪽은 경주(慶州)와 인접해 있다.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종주하여 가지산(加智山), 신불산(神佛山), 재약산(載藥山) 등의
준령(峻嶺)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고 고을은 태화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울산광역시 중구 교동에 울산향교(蔚山鄕校),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언양향교(彦陽鄕校)가 있다.
울산향교 남서쪽 울산 고을을 감싸 흐르는 태화강변에 유서 깊은 누각이 있으니 태화루(太和樓)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고려 성종(成宗) 16년(997) 9월에 흥례부(興禮府)에 행차하고
누각에 거둥하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바다 가운데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라고
하여 이름난 누각이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기문에
누각의 연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울주(蔚州)는 동남쪽 큰 바닷가에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가장 멀다. 고을에서 서쪽으로 두어 마장에 큰 내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어져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동쪽으로 꺾이는 데가 물이 가장 많고 넓으며 맑고 깊으니, 곧 황룡연(黃龍淵)이다.
그 북쪽에 돌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절벽처럼 서 있는데,
역시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동쪽으로 돌면서 우뚝한 산이 되어 강 남쪽에 서 있고,
이름난 꽃 기이한 화초와 매화, 대나무, 동백[山茶] 등이 겨울을 지나면서도 향기롭고 무성하니,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 신라 때에 처음으로 북쪽 벼랑 위에 절을 세웠는데 이름이‘대화사’이고,
그 서남쪽에 누각(樓閣)을 세웠는데 아래로 깊은 못[淵]에 임하였고,
뜰 밖으로 산이 가로질렀으며 바다는 하늘가에 닿은 듯하여, 올라가면 구경하는 맛이 가장 기이하다.”
양촌의 외손자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중신기문(重新記文)에서“
내가 일찍이 남도(南道)를 유람하며 이름난 곳을 두루 찾아다닐 적에,
누각으로는 촉석루(矗石樓), 영남루(嶺南樓), 명원루(明遠樓), 영호루(映湖樓),
쌍벽루(雙碧樓)를, 누대로는 해운대(海雲臺), 월영대(月影臺), 관어대(觀魚臺)를 보았는데,
참으로 이른바 경관이 아주 특별한 명승들이었다. 맨 뒤에 울산(蔚山)을 가려던 참에
태화루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한번 시원스레 올라 보고 싶었다.
울강(蔚江)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누각 하나가 층암절벽 위에
우뚝 솟아 맑고 푸른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물어보니, 태화루라고 했다. 강을 건너 배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걸어
누각 아래에 이르러 바라보니, 용마루와 지붕, 난간과 기둥이 모두 썩어 부러졌고
또한 층계를 딛고 오를 수도 없었다. <中略> 설곡(雪谷) 정(鄭) 선생[정포(鄭誧)]이
부(賦) 여덟 수[八詠]를 지었고 가정(稼亭) 이(李) 선생[이곡(李穀)]이 여기에 대한
화운시(和韻詩)를 지었으며 우리 외조부인 양촌(陽村) 권(權) 선생이 또한 기문을 지었던
사실이 생각이 나서, 현판을 우러러보았더니 그 현판이 모두 없었다”라고 했다.
또한 기문에 태화루의 중신(重新)의 뜻을 밝혔다
. “얼마 뒤에 다시 누각에서 내려와서 땅에 앉아 간소하게 주연을 열었다.
제군들에게 말하기를,‘누각의 경관이 이와 같이 훌륭하고 앞뒤로 수령을 지낸
이로서 영웅호걸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한 사람도
누각을 중신(重新)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물며 설곡, 가정, 양촌 세 선생의 시와 기문은 이 누각의 영광으로
응당 등왕각(滕王閣)의 삼왕(三王: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왕발(王勃), 등왕각부(滕王閣賦)를 지은 왕서(王緖), 중수등왕각기(重修滕王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지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터인데,
이제 어찌 차마 민멸하여 전해지지 않게 한단 말인가.’또 웃으며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황학루(黃鶴樓)를 때려 부수려고 한 이가 있었는데,
지금 이 누각이 중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허물에 걸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다행히 여러 선생들처럼 풍류스럽고 문아(文雅)한 분들과 이 누각에 왔는데도
, 마치 희문(希文: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字)이 악양루(岳陽樓)에서,
당나라의 최호(崔顥)가 황학루에서, 당나라의 조하(趙嘏)가 위남(渭南)에서,
송나라의 왕반산(王半山: 半山은 왕안석(王安石)의 號)과
송나라의 곽공보(郭功甫: 곽상정(郭祥正)의 字)가 봉황대(鳳凰臺)에서 했던 것처럼 올라가
시를 짓지 못하고 붓을 던지고 돌아가니 또한 살풍경(殺風景)이라 이르지 않겠는가.’하니
제군들도 크게 웃었다.”
울산 출신의 양희지(楊熙止)가 “지금의 수령 박후(朴侯: 朴復卿)이 고을을 잘 다스려, 복잡한 일들을 잘 처리하여 정사가 이미 닦여지고 폐단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에 관부(官府)와 누관(樓觀)을 점차 수리하여 태화루도 새롭게 다시 지었는데, 크고 넓고 툭 트였으며 새롭게 벽을 칠하여 이전에 비해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선생께서 이전에 이 누각에 대해 결함으로 여겼던 것이 이제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고 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 최해(崔瀣)의 문인인 설곡(雪谷) 정포(鄭誧)가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울주팔경(蔚州八景)을 지었다. “붉은 난간 관도에 임해 있고[丹檻臨官道] 푸른 물결은 절문을 격했어라[蒼波隔寺門] 시끄러운 수레 소리 동헌으로 돌려보내니[喧闐車騎送歸軒] 노랫소리 날마다 끊이지 않네[歌吹日來繁] 가랑비 속에 꽃은 나뭇가지에 피고[細雨花生樹] 봄바람 부는 곳 잔에 술이 가득하네[春風酒滿尊] 고금에 떠가는 한 달은 황혼인데[古今離恨月黃昏] 고기잡이 노랫소리 앞마을에 일어나네[漁唱起前村]”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설곡의 울주팔영(蔚州八詠)에 차운했다. “강 언덕에 배치된 철갑 기병들[鐵騎排江岸] 성곽 문을 나서는 홍색 깃발들[紅旗出郭門] 오두(遨頭 : 수령의 별칭)가 여기 와서 귀빈의 수레 보내는데[遨頭來此送賓軒] 수행원도 어쩌면 그렇게 많이들 붐비는지[賓從亦何繁] 노래하는 부채 따라 일렁이는 물빛이요[水色搖歌扇] 술동이 스치며 코를 찌르는 꽃향기로세[花香撲酒尊] 과객이 조석으로 떠들어 대지만 않는다면[但無過客鬧晨昏] 풍속이 순박해서 살기 좋은 산마을이네[淳朴好山村]”
여말선초의 문신인 용헌(容軒) 이원(李原)은 “공무에서 벗어나 절을 막 찾으니[官解初尋寺] 스님은 한가로워 문도 닫지 않았네[僧閑不閉門] 산수의 경관이 동헌에 비치니[山光水色映晴軒] 시에 드는 경치가 절로 많네[詩景自成繁] 옛 가락을 비파로 타는 소리 들리고[古調聞瑤瑟] 높이 시를 읊으며 좋은 술을 기울이네[高吟倒綠尊] 돌아올 때 피리 소리 달 뜰 무렵 들리는데[歸來長笛月明昏] 앞길은 구불구불 마을로 통하네[前路曲通村]”라고 읊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높은 누각 멀리 대마도가 보이고[高樓直望島夷洲] 푸른 바다 밤낮으로 물결치네滄海無邊日夜浮] 하늘은 더 넓어 구름 한 점 없는데[天闊更無塵半點] 밝아 오는 숲에는 귤나무 우거졌네[林明時見橘千頭] 난간에서 바라보는 서쪽 하늘 먼 고향[倚欄西望鄕關遠] 동쪽 땅에서 시 읊으며 세월만 보냈구나題柱東遊歲月遒] 삼한 땅 두루 다니다 울산까지 왔는데行遍三韓來絶域] 내 마음 아는 이 갈매기뿐이구나[相知唯有一閑鷗]”라고 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황룡연 위에는 신기루가 나타나고[黃龍淵上蜃爲樓] 신학성 머리에는 나무 이미 가을이로세[神鶴城頭樹已秋] 시 읊으니 절로 성부에 있는 건 부끄러우나[嘯詠自慚叨盛府] 누에 오르니 명류에 의탁한 게 기쁘구려[登臨聊喜托名流] 자욱한 저녁 안개는 어시에 희미하고[濛濛晩靄迷魚市] 마구 치는 찬 조수는 방주에 떨어지네[咽咽寒潮落蚌洲] 벽간 향하여 술 취한 붓 휘두르지 않는다면[不向壁間揮醉墨] 그 누가 이 년 동안 질탕히 놀았던 걸 알리오[誰知跌宕二年遊]”라고 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高弟)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곡우에 비가 막 개이자 묵은 안개도 걷혀[穀雨初晴宿霧收] 태화루 아래에 가벼운 배를 놓았네[太和樓下放輕舟] 맑은 내에 꽃다운 풀 우거져도 최호는 없어[晴川芳草無崔顥] 해질 무렵에 부질없이 백로주를 읊조리네[日暮空吟白鷺洲]”라고 노래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는 영남의 산천과 풍속을 적어 유람에 대체하여, “학성의 어느 곳에 태화루가 있는가[鶴城何處太和樓] 지금 남아 있는 물색 없어 서글프네[惆悵今無物色留] 관방으로는 이 부가 으뜸임을 알겠으니[認是關防玆府最]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무방하리[不妨雕飾任姑休]”라는 시를 남겼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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