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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묵상글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성전 의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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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9 05:09
- 성전 의식
오늘은 대성전 축일에 성전에 관해 묵상해봤습니다.
성전에 관한 첫 번째 묵상: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오늘 미사에서는 요한복음을 읽었지만, 공관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하느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계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전을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성별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별(聖別. Consecratio)이란 성유 바름을 통하여 사람이든 장소든
그것이 더 이상 다르게 쓰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 받아 사제로 성별이 되면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듯이
성전도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도록 성유를 발라 성별한 곳이기에
성전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는 하느님만 만나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의식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비난하시는 강도들에게는
이런 의식과 의지가 없기에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 아닐 것입니다.
강도들은 어디를 가나 훔칠 생각이나 하고,
그러기에 성전에 들어가서도 금붙이로서 성작이나 찾지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을 만날 리도 없을 겁니다.
성전에 관한 두 번째 묵상: 나도 성전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느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니 나도 또 너도 성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전 의식이 중요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여러분이 성전이란 것을 모릅니까?
하고 물음으로써 우리가 성전이란 것을 의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한 의지와도 연결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니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또 아무것도 내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지 못하게 하겠다!
악감정들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겠다!
유혹자와 악령들이 내 안에 똬리를 틀지 못하게 하겠다! 이렇게.
성전에 관한 세 번째 묵상: 성전은 생명과 구원의 장소다.
오늘 독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해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우리가 성전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하고
마침내 사랑과 생명이 넘칠 것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나에게서는 생기가 나오나 살기가 나오나?
내 주변 사람들은 활기찬가? 기죽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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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이름의 발음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인데, 늘 ‘조명현’으로 부릅니다(아직도 동창 신부 중에서는 ‘조명현’으로 부르는 신부가 있습니다). 이름에 받침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부모님께서 지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밝을 명(明)자와 뻗을 연(衍)자를 씁니다. 밝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밝음을 지향하며 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이런 생각으로 제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만 불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이름대로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됩니다. 저의 경우,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조명연’ 외에도 별명인 빠다킹, 제 신분을 나타내는 ‘신부’, 책 냈다고 ‘작가’, 강의한다고 ‘강사’ 등…. 제가 하는 일에 따라 이름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름이 붙일지는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가 될 것이고, 사기를 치면 ‘사기꾼’, 살인을 하면 ‘살인범’….
어떤 이름을 바로 세울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환경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값을 남이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을 갖도록 내가 노력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늘 사랑만을 이야기하셨고,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랑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 각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다는 표징으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면서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각자에게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전에 걸맞은 이름을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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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보다 조금만 더 매일 행하라(로웰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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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 온 유다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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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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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6년 캐나다 토론토에 살 때입니다. 한국에서 온 형제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이제 영어 많이 느셨겠네요?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나요?” 저는 그때 당황했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Because of Jesus, I can live well in Toronto.”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즘 비슷한 일이 생겼습니다. 5년 동안 본당 신부로 있었던 전임 신부님이 달라스를 방문했습니다. 저하고는 동창 신부입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하는 자리에 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했는데,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서 못 왔습니다. 이왕 약속을 잡았으니, 제가 대신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잔치를 마련한 주인은 자리가 남으니, 길가에 있는 사람이라도 초대하라고 종에게 말했습니다. 멀리서 벗이 왔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3년 후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세울 때까지 2번의 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성당은 시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독일계 이민자들이 세운 성당을 얻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당시의 성당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새로운 성당을 찾았고, 임시로 성당을 얻었는데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교우들은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교우들은 지금의 성당 터를 매입했고, 4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성당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공동체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친교실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운동할 수 있는 농구장이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피정 강의를 왔던 수녀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당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성당이라는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수녀님 집무실 앞에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제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형제처럼 함께 찍은 사진, 수도자와 성직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함께 찍은 사진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교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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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내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라고 소리치시는 주님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성전 안은 희생 제물로 바쳐질 동물들과 그 상인들 그리고 사고파는 돈을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그들을 내쫓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주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우리 마음 성전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기도와 선함의 노래가 늘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간혹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끄러운 성전처럼 우리 마음 성전도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속 고난에 시끄럽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끄럽습니다. 아픔 때문에 시끄럽고 미움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그렇게 시끌시끌하다면 우리 마음 성전에 머무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아마도 주님은 오늘 복음처럼 우리 마음 성전을 깨끗이 하시려고 부단히 노력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아름다움은 세상이 이야기하는 외면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창조된 순간부터 간직된 하느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성전에 오늘도 주님께서 기쁘게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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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은 어디서?
오늘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저 말고도 몇 명 있었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의 청년도 있었고 산뜻한 옷차림의 여성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어폰을 끼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저의 이어폰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기 어깨가 움직이고 발끝이 꼼지락거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의 발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신나는 음악을 듣고 있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발도 꼼지락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감정은 발가락 끝에서 발현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다 숨겨도 발가락 끝은 감출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오늘 하루 신나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여러분의 발가락도 춤을 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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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정화
“건물성전, 공동체성전, 개인성전”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시편46,2)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12세기부터 오늘 11월9일에 지내게 됩니다.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로마교구 교구장은 교황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당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성당 중앙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베드로 대 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교회는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공동체 삶의 중심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다음 시편 84장 고백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성전이 속화되는 현실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분노는 하느님 사랑에서 발단된 의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차없이 성전을 정화하시던 주님은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다소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을 이해했으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성전은 바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합니다. 건물 성전이 아닌 당신의 몸인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임을 천명하신 주님입니다. 문득 매월 첫주일 미사중 성수예식이 생각납니다. 성수예식후 주례사제가 성수를 성전안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있는 곳곳에 뿌릴 때 부르는 성가67장이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 근거합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
바로 성전정화가 3차원에 걸쳐 이뤄짐을 보여주는 참 은혜로운 성수예식 장면입니다. 성수은총으로 성전건물이, 공동체성전이, 개인성전이 동시에 정화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3차원의 성전이 하나로 이뤄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공동체가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비로소 온전한 성전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3차원에 걸쳐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성전정화에 성전성화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세상을 살리는 풍요로운 은총의 강, 생명의 강같은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예언이 그대로 성전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성전의 정화와 성화와 더불어 그 지체들인 개인의 정화와 성화도 참 은혜로롭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참으로 거룩하게 살아야하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만남중의 만남이 미사전례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전건물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을 정화하고, 주님의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의 성전을 정화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의 성전이 되어 살게 합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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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0)
작은 벗
기꺼이 북돋아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낮은 벗
한껏 받들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갇힌 벗
활짝 풀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어두운 벗
환하게 밝혀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외로운 벗
따뜻하게 품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보잘것없는 벗
정성스레 보살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아파하는 벗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웅크린 벗
살며시 다독여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쓰러진 벗
조심스레 일으켜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버림받은 벗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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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2,13)
유대인들의 파스카 축제
몹시도 지혜로운 요한의 꼼꼼함을 살펴보다가 나는 요한이 ‘유다인들의’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다른 어떤 민족에게 파스카라는 축제가 있습니까? 어떤 민족에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그냥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라고만 했어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파스카 축제를 성경의 의도대로 거행하지 않는 이들의 인간적 파스카가 있는 한편,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요한 4,24 참조)이 영과 진리 안에서 거행하는 참된 파스카 축제, 곧 거룩한 파스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유다인들의 파스카를 거룩한 파스카와 대비시킨 듯합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엑카르트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버리고 가라앉고 하느님을 무심코 사랑하는 행위가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는 영혼의 가장 높은 지체를 가리켜 형상을 담거나 형태를 띤 이미지 - 관념 -를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이 역동적인 기능은 영혼과 아버지 사이의 닮은 것이 자리하는 터전이다. 바꾸어서, 하느님의 형상 내지는 사람과 창조주의 닮은 모습이야말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참된 능력이다. 엑카르트는 우리 정신의 가장 신적인 면에서 보배로운 이미지들이 흩러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이매지네이션”(imaginalion) 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히면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이매지네이션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엑카르트의 용어인 멘스(mens)를 대개 글자 그대로 마음(mind)으로 번역하지만. 본 설교에서는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엑카르트는 비록 상상력이 위대하고 이미지를 낳는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바꾸어서, 우리의 이미지마저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때가 부정의 길을 구성한다. 부정의 길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처럼 이름이 없고 영원히 젊은 속 사람에게 충실하게 한다.
영혼이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여의고, 단일한 하나를 볼 때, 영혼의 존재가 순수한 하나의 단일성 외에 아무것도 품지 않을 때, 영혼의 순수한 존재는 자기 속에서 쉬면서 순수하고 형상이 없는 하느님의 단일성을 수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인연생기법은 그러므로 다양한 불교 종파와 전통을 그 밑바탕에서 아우르는 주춧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줄여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부르는 이 근본적인 실재관은 삼라만유,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연계 안에 있는 것이나 초자연계에 속하는 것이나, 정신적 인 것이나 물질적 인 것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그 자체가 홀로 불변하는 실체로서 자존하는 것은 없고 직간접적인 인과 관계와 구조적 함수 관계를 통해 ‘지금 여기' 그렇게 현성(現成)할 뿐이 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식론적 전회'인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았고 깨닫고 그래서 마침내 해탈하여 '절대 자유인'이 된 실질 내용은 흔히 동서 종교사에서 말하는 천계의 비밀도 신들의 구원 계획도 아니다. 이 근본적인 ‘인연생기'의 법을 바로 본 자가 곧 진리를 본 자요 해탈자요 깨달은 자이다. 문제는 단순한 인식론적 관점의 변화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들어 이 ‘연기법'을 확철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원시 불교의 가르침을 압축 요약한 ‘네 가지 진리의가르침'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이란, 흔히 불교의 기초를 모르는 일반인이 오해하듯이 허무주의를 주창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삶을 고통으로만 보는 비관주의를 설파하거나 행동 없는 정적주의를 선호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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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모든 생명이 자라는 곳, 모든 것을 살게 하는 기쁨과 평화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을 지어 봉헌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지어 주님께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란 저마다의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헛된 욕망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의미를 깨닫고 되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축일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28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로마 제국의 잔인했던 박해가 313년 밀라노 관용령 선포로 끝난 지 11년 후 324년에 당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성전 봉헌을 시작으로 세상의 모든 성전을 주님께 봉헌할 때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정성, 그리고 기도로 성전을 건립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2,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모든 성전은 성도들의 온갖 정성을 쏟아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했지만, 막상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 탐욕과 착취가 가득 찬 타락한 육의 성전이 되어버렸기 성전을 허물어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며, 그 성전에 하느님께서 머물지 아니하고, 하느님께 진리와 영으로 예배드리지 아니하며, 기도의 집이 되지 못하면 그 성전은 한갓 빈껍데기와 같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착취로 가득 찬 장사꾼의 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루19,46참조)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이들을 향해 성전을 향한 열정에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신 성전은 부활 이후 “당신의 몸”(2,21)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게” (2,22) 됨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말씀으로 성전의 의미가 건축물이 아닌 사람의 몸과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맥락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하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이 곧 성전이라는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공의회 이전 신자들은 성전이나 성당이라고 하면 단순히 교회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모임, 믿는 이들 모임 자체도 교회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성체를 모신 다음엔 우리 몸이 바로 움직이는 감실이다, 라고 해도 결코 영성적으로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전인 우리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을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47,1~2;8~9,12)는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솟아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온갖 생명(생물+물고기 등)이 우글거리며 살아나고, 온갖 과일나무도 자라나 숲이 번창하며 온갖 것들이 살아납니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됩니다.”
바로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 말씀으로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 역시 생명의 물과 같이 되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통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생명과 사랑으로 변하고 마침내 풍요로운 결실맺도록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건물이며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다음 가르침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성전, 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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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위로와 평화를 얻는 성전 /
박윤식 [big-llight] 241108. 21:09 ㅣNo.177439
11월 9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었다. 이 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천 년 동안이나 역대 교황님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는 건, 각 지역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됨을 드러내는 것일 게다. 이 성전의 맞은편에 거지차림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있다.
왜 하필이면 거기에 성인의 동상이 있을까? 그 사연은 이렇다. 로마 출신 인노첸시오 3세 교황님(Innocentius III)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설립에 대해 승인을 앞두고는 다소 망설였단다. 그런 그가 꿈에 당시 교황청이던 그 성전이 허물어져 가는 걸 안타깝게 보았단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당황한 교황님 앞에 보잘것없는 거지 청년이 자신의 두 어깨로 그 무너져가는 성전을 온 힘을 다해 떠받치고 있었다나. 그리하여 이 꿈 덕택에 지금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탄생하게 되었단다. 성인은 과연 교황님 꿈 모습 그대로 어려움에 놓인 교회를 다시 일으켰다. 그 힘은 하느님에 대한 신심 깊은 청빈과 단순함, 겸손의 덕택이었을 게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했다. “이를 짓는 기간이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거요?”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것을 믿게 되었다.’
사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다. 그러나 매우 크게 짓고 화려하게 꾸며도 거기에 하느님 마음이 없으면 참된 성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성전이라신다. 이는 그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실현되었다. 그분과 우리 사이의 참된 중개자가 되셨기에.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신다. 다양한 신심행사보다 미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자. 예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기에.
일반적으로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라면 두 가지를 뜻하였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 하느님의 거처라는 거다. 어쩜 우리도 그분 성전이다. 그분 부르심 받은 우리는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만 할게다. 귀한 존재가 된 내 몸을 가꾸도록 맑은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성전을 허물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유다인들은 의아해하지만, 그분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은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이다. 하느님을 더욱 가깝게 만나 뵈면서 그분 말씀을 듣는 은총과 생명이 넘치는 곳이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위로의 힘과 평화를 얻는 곳이다. 그래서 성체를 모신 성전에서 자신도 성전임을 깨달아 그분과 함께 편안히 머물도록 하자. 나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분께 찬미 드리면서, 그분 뜻을 받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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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을 만나 기도하는 장소이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기에(1코린 6,19; 2코린 6,16 참조), 우리도 이러한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몸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께서 머무시도록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속의 정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몸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자주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 머무시는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 내면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 몸은 성전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내면 깊은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처럼 큰 성당은 보이지 않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주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도 장엄한 건축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 웅장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거룩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도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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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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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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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바야흐로 급격한 출산율 감소의 여파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지자체나 교회도 충격이 크겠지만, 저희 살레시오회처럼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단체가 받는 영향을 심각합니다.
신입생 감소로 인해 매년 학급수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이나 교사들, 실무자들의 고초도 만만치 않습니다.
점점 비어가는 큰 규모의 건물들 유지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나 수도회 안에서도 축소 및 통폐합 전문가 양성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이제는 대대적인 성전 건립이나 부속 건물의 신축을 지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건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모교회로서 세상 모든 성전들의 원천이요 규범이 되는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로마에 머물 때 종종 라테라노 대 성당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위용과 규모가 대단합니다.
걸작의 성화들과 예술품들로 가득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제정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성당들을 라떼라노 대성당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에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런 축일에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관련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보십시오.
진정한 의미의 성전은 우리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고색창연한 외형적인 성전이기보다는
내적인 성전이요 영혼의 성전입니다.
어찌보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각자가 또 하나의 성전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죄와 악습으로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이 훼손되고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영혼이지만, 그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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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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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로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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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 건물’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1) ‘성전’이 어떤 곳인가는 솔로몬의 기도가 잘 나타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7-29).”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였고, ‘기도하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기도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1열왕 9,6-7).”
물론 하느님께서 이런 경고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 앞에 축복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떻든 하느님 말씀은, 성전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고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변질된다면, 성전을 버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살아 있는) 경고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성전에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성전’에도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2)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데,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으니(마르 11,17), 하느님께서 이 건물을 다 허물어 버리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운 성전들이 많이 지어져 있고, 앞으로도 지을 텐데,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삶’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었더라도 강도들이 살면 ‘강도들의 소굴’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만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잘 지었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에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우리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들도 정말로 크고 멋있는 건물을
지어놓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3)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허례허식과 탐욕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예배를 폐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생활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니
망해서 없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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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2,13-22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았음을 상징하는,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장소지요. 그런데 그 성전 앞에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점도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당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 규모와 화려함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입니다. ‘정말 대단하다’는 긍정적 의미의 놀라움이 아니라, 돌로 된 성전을 꼭 그렇게나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따져묻는 부정적 의미의 놀라움이지요. 프란치스코 성인이 라테라노 대성전을 방문한 것은 교황을 만나 프란치스코 탁발 수도회의 설립을 인준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거지처럼 구걸하며 지내는, 당시 부유하고 화려했던 교회의 시각으로 보기에 참으로 ‘모양빠지는’ 그런 수도회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일단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전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임을, 하느님께서 그로 하여금 세속과 재물에 물들어 무너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울 소명을 맡기신 것임을 깨달아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하게 됩니다.
돌로 된 성전은 크고 화려해질수록 재물이라는 맘몬을 섬기는 ‘굿당’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 외적인 부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물이 들어가기에 자연스레 하느님보다는 재물에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 대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에 장사꾼들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무르며 조용히 기도하는 성전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늘 장사꾼들이 물건 파는 소리, 다른 상인과 이권을 놓고 다투는 소리 등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낸 수많은 소음들로 가득차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그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곳으로,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누는 곳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찾아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며 위로와 힘을 얻는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시려고 채찍과 폭력이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하신 겁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다인들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거냐고 따져묻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이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체면을 세우는 공간으로 변질된다면, 그래서 그 안에 하느님도 참된 신앙인도 없어 건물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면, 그런 허울 뿐인 성전은 즉시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머무르실 참된 성전을 그분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제대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성전에 하느님 대신 재물이 들어가 주인 행세를 했더니 46년이나 고생해가며 지은 예루살렘 대성전이 욕망과 폭력으로 가득한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영혼이 그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나의 욕심과 고집을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 뜻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나 자신이 주님의 거룩한 현존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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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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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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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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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공동체를 세우는 일꾼으로 사는 삶
<2024.11.9>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5:17~6:2절)
❝공동체를 세우는 일꾼으로 사는 삶❞
❚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신실하고 정직한 일꾼이 되어 건강하고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 어떠한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 공평하게 차별하지 않는 일꾼이어야 합니다(17~20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하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말씀과 가르침의 직임을 감당하는 장로, 즉 목사를 더욱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며 동시에 그들에게 경제적인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17절). 바울은 신 25: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고, 일꾼에게 삯을 주는 것이 마땅하듯이, 말씀 사역자인 목사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18절). 장로에 대한 송사는 일반인들과 같이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아야 하며, 만약 잘못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에는 온 교회 앞에서 꾸짖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19~20절).
교회는 영적 지도자에 대하여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며, 생계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전심전력할 수 있도록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은 교회를 잘 다스려 존경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움을 받은 일꾼은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치우침 없이 공평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공평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빈부귀천에 의해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일꾼이라면 언제나 공평하게 판단함으로 공동체를 잘 세워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로 세움을 받은 나 역시나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공평하게 차별 없이 섬김으로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 일꾼이어야 합니다(21~25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명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승인을 얻어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편견이 없이...불공평하게 하지 말며...’(21절).. 바울은 편견을 드러내 보이는 불공정한 책망을 하지 말 것을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충분한 사실들이 확보되지도 않았는데, 목회자가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여 버리면 오히려 교회 내의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공정한 입장을 취할 것을 디모데에게 강력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안수를 행한다는 것은 특별한 임무와 역할을 감당할 교회 지도자들을 세운다는 의미인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지도자들을 뽑을 때 경솔하지 말고 신중하라고 충고합니다(22절).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할 때 건강을 잘 돌볼 것을 권면합니다. 디모데는 위장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병의 호전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23절). 아울러 모든 사람의 죄가 속히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곧 드러나는 것처럼 선행도 반드시 밝히 드러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24~25절).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일꾼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경솔하면 반드시 실수하게 마련이며, 이러한 실수는 공동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불순한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 함부로 장로를 세우거나 안수를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섬김에 있어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늘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잘 들을 줄 아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세우는 일에는 결코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충분하게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준비하고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일꾼은 권위를 내세움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자신을 살피며 공동체를 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결함과 경건함을 잃지 않도록 하여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는 일꾼이어야 합니다(6:1~2절).
바울은 종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주인을 존경해야 함을 권면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6:1절). 또한 그 상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를 가볍게 대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더욱 잘 섬겨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상전이 인격적으로 훌륭하거나 잘 대해 주기 때문에 공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경하는 것이요, 복음의 진리가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윗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진실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소위 꼰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뒤에서 험담하거나 수군거리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상전을 공경해야 하며, 불합리하고 불공평해 보여도 자기 신분에 충실하게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자세입니다. 더욱이 믿음의 상전에 대해서는 더욱 잘 섬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내 잘난 맛에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나의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려 하지 말고 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으로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함을 기억하여,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5:17~6: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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