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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지중해 인문 여행
‘地中海 육지 가운데 바다’라는 이곳은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멀고 관심도 덜 하지만 분명히 그렇다. 기원전 1100년경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이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를 점령하여 식민 도시를 건설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그중 가장 번창한 도시가 튀지니의 수도 튀니스로 거기가 카르타고의 거점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700년경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지중해를 누비고 다니면서 흑해에서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스페인까지 방대한 영역을 휩쓸고 다녔다. 이로써 지중해 서쪽은 카르타고 - 동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지배했다. 두 세력은 지중해 한가운데 시칠리아섬에서 부딪쳤고, 기원전 257년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는 기원전 146년까지 3회에 걸쳐 소위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고, 로마가 승리하여 지중해를 차지한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
전성기 로마제국은 지중해와 접한 세 대륙(아시아·유럽·아프리카)을 모두 지배하면서 지중해를 내해(內海), 즉 로마 바다로 만들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 로마가 476년 서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여러 왕국이 난입한 중세로 접어들고,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족은 로마제국과 문명을 계승하지는 못했으나 중세는 사회통합을 위한 이념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서양문명에 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가 중첩돼 중세를 지나 근세까지도 이어졌다. 유럽 제국이 식민 지배를 두고 벌였던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중해는 여러 부침을 거치다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지금의 국경으로 나누어졌는데, 지도를 보면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이집트와 모르코, 튀지니와 이스라엘과 중동의 국가들까지 접해 있어서 항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저자도 이들 국가 역사까지 살피지는 않았으므로 저자를 따라서 몇 나라를 여행하듯이 다가가 본다. 저자 진우석 선생은 시인이 되려고 하다가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자연에 미쳐서 여행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전국의 명산대천은 물론 히말리아와 알프스까지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풍경을 건드리기를 좋아하고 감성에도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의 명물이다. 피사 출신인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여기서 자유낙하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통설을 깨기 위해 무게가 다른 두 개의 공을 떨어뜨려 본 것인데, 같은 높이에서 자유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낙체법칙’을 입증했다. 누구나 여기에 오면 기울어진 사탑을 바로 세우는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다. 지중해와 접한 피사는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한 아르노강이 굽이쳐 도심을 적신 다음 빠져나간다. 고대 로마 시대는 해군기지 역할을, 중세에는 이탈리아 4대 해상세력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1016년과 1063년에는 사르데냐섬과 시칠리아섬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거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피사탑이 있는 피사 대성당은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화려함에 11세기 피사의 영광이 담겨 있다. 13세기 들어 지중해 주도권이 제노바로 넘어가면서 피사는 쇠퇴했고, 지금도 관광객들이 피렌체에 숙소를 정하고 피사는 사탑을 구경하러 잠시 들러는 정도라고 한다. 피사에는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 관문공항이 있지만, 피렌체에 묻혀서 우리나라 지방 공항처럼 한산하다. 파리가 세련되었다면 피사는 고풍스럽다. 사탑을 보기 위한 미라콜리 광장 앞에 서면 거대한 성문 안에 비딱하게 고개를 내민 사탑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 앞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두오모, 즉 피사 대성당의 모습이 더 압도적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레무스가 세웠다고 전한다. 로마라는 이름도 처음 왕이 된 로물루스에서 따온 것이다. 로마 건국신화에 따르면 두 형제의 어머니는 전쟁의 신 마르스,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멸망시킨 후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레이 실비아가 아이들의 종조부 아물리아우스가 종조카들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까 봐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숲속에 버리게 했다. 그러나 암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고, 쌍둥이는 어른으로 자라 아물리우스를 폐위시키고 자신들의 할아버지 누미토르를 왕위에 다시 오르게 하고, 자신들은 팔라티노 언덕 위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로마’가 되었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는 황제 궁전과 귀족들의 거주지였으나 지금은 고즈넉한 폐허로 남았다.
로마에 가게 되면 반드시 보게 되는 것이 콜로세움인데, 이 역사유물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10년 만에 완공되어 100일 동안 아들 티투스 황제의 개막식이 여기서 열렸다 한다. 침전물인 대리석으로 건축된 커다란 이 건축물에서 검투사 경기가 열리기도 했지만, 사파리나 서커스 같은 볼거리도 열었다고 한다. 무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중세에는 교회로 또는 요새로 쓰였다고 한다.
지중해 가운데 시칠리아섬에는 팔레르모 대성당이 있는데, 성당이 조금 특별하다. 화려한 고딕양식에도 불구하고 돔을 올리는 비잔틴 양식과 마치 성채 같은 느낌을 주는 아랍식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칠리아의 역사를 웅변하는 것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세력이 시칠리아를 지배했다는 말이다. 고대 카르타고,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에 이어 아랍, 노르만족,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이 차례로 주인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탈리아다.
6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비잔티움 예술과 문화가 시칠리아로 들어왔고 이후 11세기까지 북아프리카를 이슬람 세력이 차지했는데 이슬람 통치자들은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 덕에 시칠리아에는 그리스인, 유대인 등이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91년 북유럽 노르만족이 정복함으로써 섬의 주인이 다시 그리스도로 바뀌었으나, 노르만 역시 종교적 관용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특히 루지에로 2세(1130∼1154)는 그리스도 군주였음에도 이슬람 문화를 수용하고 아랍어를 익히는 등 시칠리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이었음에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올리브 나무*는 북아프리카가 원산지이자 주산지로 길섶에는 온통 올리브나무 밭이다. 나무가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넘어갔고, 북아프리카 튀지니에서는 올리브 없는 식탁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다. 스페인도 그렇다. 7세기 초 메카에서 발생한 이슬람 세력이 670년 튀지니로 진격해 제2의 모스크라고 일컫는 대모스크를 카이로우안에 짓고 파죽지세로 지브랄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남부를 점령하고 거침없이 북쪽으로 진격했다. 북유럽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에 샤를마뉴 황제가 있었다. 그가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낸 덕분에 서유럽은 지금처럼 기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 : 지중해 일대에서 나는 물푸레나무과 과수. 열매를 생으로 혹은 절여 먹거나 압착해 기름으로 만들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최초로 대량 재배한 과수로 보고 있다. 직접 먹기도 하고 용도가 다양한 식물성 기름. 가슐이라는 중동의 8000여 년 전 도시 유적에서 올리브 과수원 흔적이 있고, 이를 위한 수로가 건설된 흔적도 대량생산된 올리브유를 보관하기 위해 제작된 도자기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올리브가 토목과 요업 등 여러 가지 부가 산업들을 견인한 것이다.
우리는 로마 원형 경기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로마나 그리스에만 있는 줄 알지만, 아프리카 튀지니에도 있다. 콜로세움보다 앞서 38년경 세워진 튀지니 엘젬 경기장은 3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당시 엘젬의 인구가 35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경기장이다. 이 원형 경기장은 남아 있는 것 중에서 세계 세 번째로 크고 보존상태도 좋아 영화에서는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데, 2000년 막시무스 역으로 러셀크로우가 주연한 영화 〈글레드에이트〉도 여기서 찍었다.
튀지니의 수도 튀니스는 고대 가르타고의 땅으로 인구 30만에 전함을 200척이나 거느린 강국이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 해군에 패한 가르타고는 로마가 그리스 침공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국력을 키워 에스파냐를 점령하면서 팽창했다. 에스파냐를 점령한 장군 아들인 한니발은 무모하게도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다. 2차 포에니 전쟁이고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로마군이 연전연패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지구전과 포위전으로 한니발을 무너뜨렸는데, 이 3차 포에니 전쟁으로 가르타고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모르코는 작은 나라지만, 보석의 나라로 느껴지는데 그레이스 켈리가 그 나라 왕과 결혼하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었다. 모르코의 사막은 광활하지만, 사하라와는 다르고 접근하기도 쉽다. 모르코에서 사막의 별을 보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생텍쥐페리는 비행기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지 않았다면 〈어린 왕자〉를 탄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사막체험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다.
지중해 여행의 매력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건너다니는 재미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 여행 코스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조선이 왜의 침략을 받은 임진왜란을 겪기 100년 전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져온 금과 은, 각종 자원을 몰빵해서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스페인 세비야에는 1440년부터 1560년까지 무려 80년이 걸려 만든 모스크와 유사한 세비야 탑과 성당을 만들었다. 중앙제단은 금 20톤을 사용한 황금 제단으로 이들 금은 모두 신대륙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세비아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콜럼버스의 관이다. 스페인 4개 왕국인 레온, 나바라, 아라곤, 키스티야 왕이 콜럼버스의 관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앞쪽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한 왕들로 인자한 모습이지만, 뒤쪽 두 왕은 고개를 떨군 채 관을 받들고 있다. 콜럼버스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콜럼버스에 대한 지원이 끊기고 심지어 멸시가 이어져 콜럼버스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로 관을 공중에 떠 있게 한 것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의 무덤이 왜 여기 세비아에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1492년은 지중해 세계를 대서양의 세계로 바퀴는 시점이고, 유럽 주도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신호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세비야다. 1492년 9월 콜럼버스가 이끈 3척의 배는 세비야 서쪽으로 100㎞ 떨어진 팔로스항을 출항한다. 이를 계기로 남아메리카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다. 또 이 해는 800년간의 이슬람의 지배를 끝내고 스페인이 비로소 통일되었다. 통일과 신대륙으로 인한 부 덕택에 스페인은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입장에서는 재앙의 출발이었다. 재앙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 식민지 쟁탈권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2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스페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투우(鬪牛)와 플라멩코 춤이다. 현대 들어서 투우는 많이 쇠퇴해 거의 사라졌지만, 플라멩코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춤이다. 집시의 영혼이 깃든 춤, 이것은 스페인 남부 안달로시아 지방에서 발달했는데 그곳이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된 무슬림과 유대인들, 그리고 토착인들의 문화가 융합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한이 담긴 판소리처럼 떨림과 슬픔이 가득한 춤이다. 플라멩코 공연자는 기타리스트, 칸타오르(남자 가수), 칸타오라(여자 가수), 바일라오르(남자 무용수), 바일라오라(여성 무용수)가 전부다. 기타 선율에 실려오는 칸타오르의 구성진 목소리가 퍼지면 쿵쿵∼, 무대를 박차고 바일라오라의 춤이 시작된다. 점점 고조된 그녀의 춤은 거의 신내림 수준이다. 스텝이 우레처럼 몰아치지만, 절제가 있다. 이어 바일라오르가 올라오고 두 사람은 몸을 밀고 당기며 하나가 된다. 두 사람 눈빛은 뇌쇄적이고, 몸은 관능적이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몸동작과 작은 캐스터네츠가 리듬을 더한다. 무대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여자 무용수인 바일라오라에게 있고 춤이 끝나면 박수가 터진다.
세비야의 알카사르 성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분수 옆에 우뚝 솟은 사이프러스(25m까지 자라는 낙우송과) 나무숲을 ‘왕의 길’이라고 하는데 풍광이 사람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길 가운데에 두 왕을 접견하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있고, 이것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을 알리는 동상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 건설은 또 다른 레콩키스트(유대교와 이슬람을 몰아내려는 스페인의 국권회복운동)로써 얼마나 많은 원주민이 죽고 그들의 고유문화가 말살되었던가.
(저자는 지중해 여행 일부에 대해 썼는데, 아마 이집트, 그리스, 터키(키르키예) 등에 대해서는 차후로 미룬 것인지 모르겠다. 2023.7.7. 오전)
세비아 대성당
콜럼버스의 관
황금의 탑
첫댓글 청풍명월님!~난 큰딸애가족이 살고 있는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를 두번씩이나 다녀 왔는데
유럽은 좋은 곳입니다. 딸아이를 바로셀로나에서 차편으로 3시간 지중해를 따라 올라가면
카다케스란 곳(화가 달리의 고향)에서 딸아이 결혼식을 올리고 3박을 지내다 온 추억이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