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a-Cola의 역사-3】
로빈슨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 음료를 홍보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코카-콜라의 맛에 심취하고 더욱 적극적인 고객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코카-콜라를 무료로 시음할 수 있는 쿠폰을 보냈다.
그는 거리의 전차에 포스터를 붙였고, 소다 디스펜서에는 “코카-콜라를 마시자, 5센트”라고 쓴 배너를 붙였다.
또한 로빈슨은 필기체 스타일로 쓴 독특한 코카-콜라 로고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1887년 6월 16일에 한 신문의 광고에 처음 등장했다.
약국에서의 코카-콜라 시럽의 판매는 최고 성수기인 여름에는 한 달에 약 2만 5천 병 정도였다.
애틀랜타가 1887년 11월에 금주의 실험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기로 결의했지만, 그때는 이미 코카-콜라는 기반을 확고히 확고하게 다진 후였다.
코카-콜라의 전도는 매우 밝았지만 펨버턴의 비즈니스 동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달 동안 코카-콜라의 이름과 제조 공식에 대한 권리를 누가 소유하느냐와 관련해서 많은 다툼이 벌어졌다.
펨버턴이 개발한 특허 약품에 대한 공식적인 소유권을 가진 조직인 펨버턴 케미컬의 지분은 양도되고 다시 양도되었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더 복잡한 문제는 펨버턴이 1887년 7월에 두 명의 비즈니스맨에세 코카-콜라에 대한 그의 지분 3분의 2를 매각하면서 발생했다.
그는 당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따라서 빨리 돈을 벌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거래는 로빈슨 몰래 이루어졌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도 코카-콜라의 제조 방법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후 펨버턴은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고 여러 권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펨버턴으로부터 지분을 매입한 사업가들은 환멸을 느꼈고,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매각했다.
이렇게 어지럽게 얽힌 문제는 또 다른 애틀랜타의 특허 의약품 제조업자이면서 로빈슨의 변호사의 형제인 아사 캔틀러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는 새로운 음료를 둘러싼 분란에 대해 들었고, 로빈슨과 손을 잡고 여러 다른 사람의 권리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1888년 여름까지도 코카-콜라의 소유권은 여전히 분쟁 중에 있었고, 애틀랜타의 약제사들은 3가지 종류의 코카-콜라를 공급받고 있었다.
하나는 캔들러와 로빈슨의 새 회사가 제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펨버턴이 세운 새로운 회사의 것, 마지막 하나는 펨버턴에 반기를 든 아들 할 리가 제조한 것이다.
1888년 8월 16일에 존 펨버턴이 사망하자 캔들러가 코카-콜라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캔들러는 애틀랜타의 약제사들에게 펨버턴의 장례식 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든 약국이 문을 닫을 것을 제안했다.
캔들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펨버턴을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생산하는 코카-콜라가 진정한 원조라고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자료의 출처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톰 스텐디지 지음,캐피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