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강서농수산물시장에 안주거리를 사러 갔다가 이름이 재미있어 계획에 없던 낙지를 사온
적이 있었다. 비실거리는 낙지를 여러 무더기 쌓아놓고 ‘기절 낙지’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도
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반명사로 통용되어온 이름인 모양이었다. ‘이 녀석들 어젯밤에 나처럼 인
사불성이 되도록 퍼마신 모양이군요.’ 내 농담에 어물전 아낙은 가가대소하면서 만 원에 다섯 마리를
싸주었다. 아내도 ‘기절 낙지’란 이름을 듣고 퍽 재미있어 했다. 그런데 함께 낙지를 먹은 아내가 한밤
중에 심한 알레르기반응을 일으켜 미즈메디병원 응급실에 데려가는 등 한바탕 소동을 부렸다. 아내
는 전에도 낙지를 먹고 난리를 피운 전과가 있었다. 이후 집에서는 그 좋아하는 낙지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낙지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는 아내는 사오면 요리는 해주겠다고 했지만, 야박하게 뭘
그렇게까지야…
며칠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기절 낙지’보다 더 기발한 작명을 보았다. 역시 남도의 어느 어물전에
푯말을 세워놓은 사진이었는데, 비실거리는 낙지에 붙인 이름이 ‘죽은척 하는 낙지’였다. 이 역시 나
만 처음 보았을 뿐 그쪽에서는 오래 전부터 통용되는 해학일 터, 일부러 내려가서라도 한 무더기 사
오고 싶을 만큼 유쾌한 생활의 여유였다. -
당분간 뉴욕에 살기로 작정하고 도미한 오리아나는 주상복합건물 21층에 주거지를 정했다. 방 두 개
에 주방과 욕실이 딸린 아파트였다. 그녀는 누가 월세를 물으면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월세를 말할
때마다 혈압이 올라 병원신세를 져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적어도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의사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오리아나가 뉴욕에 둥지를 틀었을 때는 아마도 여러 권의 책에서 들어오는 인세
가 매우 쏠쏠했던 듯 비서를 두었다는 얘기를 했다. 비서를 시켜 예약을 해두면 의사가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증세를 물어본 뒤, 증세와 상관없이 무조건 아스피린을 한 알 먹으라고 말하고는 10달러짜
리 상담료 청구서를 보냈다.
운이 나쁜 날은 의사가 왕진을 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증세를 물어보지도 않고 처방전을 써준 뒤 30
달러짜리 왕진료 청구서를 보냈다. 청구서를 가지고 약국에 가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면 약사가 환자
이름이 적힌 병을 하나 내주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알약이 한데 얽혀 들어있는데, 의사나 약사나
환자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권리가 없다는 듯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게 오리아나가 주거
지의 월세가 얼마인지 대답하고싶지 않은 이유였다.
오리아나는 자신이 쓴 소설 「만약 태양이 죽는다면」과 관련한 인터뷰에 응하기 위해 한 TV쇼에 출
연했다. 평소 그녀는 TV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출연료로 지급하겠
다는 320달러가 아파트 한 달 월세에 해당하는 거금이었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던 것이다. 12분 출
연에 320달러면 제법 쏠쏠한 수입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뷰를 마쳤는데, 막상 송금된 수표는 20달러가
전부였다. 당장 방송사로 전화를 걸어 따져 물었다.
“320달러에 계약하고 출연했는데 왜 20달러밖에 안 보냈지요?”
“예, 세금으로 90달러를 공제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210달러는요?”
“아, 그건 노동조합 가입비로 공제했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적이 없는데요.”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방송에 출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출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미리 얘기해줬어야지요.”
“법에 정해져 있는 일들을 일일이 다시 얘기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오리아나는 그쯤에서 전화를 끊었다. 더 얘기해봐야 얻을 게 별로 없을 듯해서였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20달러짜리 청구서가 도착했다. 방송사로 전화했더니 노동조합 월회비라고 했다. 미리 공제해
야 되는데 경리담당 직원이 실수를 했다나? 보낼 수 없다고 버티자 마음대로 하라며, 그러면 노동조
합에서 소송을 제기할텐데 그쪽에서 변호사 비용 300달러를 별도로 청구할 것이라고 했다. 오리아나
는 아얏 소리도 못하고 20달러를 송금했다. 결국 오리아나는 무료로 TV쇼에 출연하여 미국인들의 궁
금증을 해소시켜준 셈이 되고 말았다. 오리아나는 이차대전 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준 미군을 보면
서 품어오던 오랜 아메리칸 드림이 아스라이 부서지는 걸 느꼈다. 참으로 가혹한 통과의례였다. TV
쇼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와중에도 책은 잘 팔려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기절 낙지야 중앙시장(태평동) 어물전에서도 명찰을 달고 시판되고 있지만 죽은척 하는 낙지는 처음 듣는 이름 입니다. 날것을 참기름에 찍어 먹기는 하지만 별반 요리 품목이 아니어서 라면에 넣어 같이 끓여먹는 맛으로 그 풍미를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