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모란
150518전라도닷컴 [한송주의 길따라 인연따라] 심리건강연구소 오수성 교수
진상규명→ 화해→ 용서가 트라우마 치유의 순서
그는 대뜸 전단 한 장을 들이밀었다. 극단 토박이가 재공연하는 연극 ‘모란꽃’ 팸플릿이었다. 광주 오월 한 날, 광주시 학동 심리건강연구소. 심리학자 오수성교수를 만난 자리였다.
그는 30년 동안 ‘5월광주’의 상처를 살피고 치료해 온 의인(醫人· 義人)이다. 1980년대 한국의 지배권력에 의해 빚어진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실상을 조사 연구해 세상에 알리고, 치료시설을 세워 환자들을 돌봤다. 그 간고의 내력이 이 연극 전단 한 장에 상징적으로 옹골져 있다.
그가 회고했다.
“518 이후 10여 년 간 계속해 온 연구를 극적으로 표출해 본 것이 바로 ‘모란꽃’입니다. 1993년 당시 토박이 박효선대표와 의기를 모아 국가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 실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보기로 한 거지요. 그동안 광주민중항쟁이 문예로 묘사될 경우 흔히 역사현장 투쟁상황 등을 중심으로 집단적이고 외향적인 형태를 띠었는데 이번에 우리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접근을 시도해보자고 제가 제안을 했어요. 박대표가 흔쾌히 동조해 최초라 할 ‘5월 심리극’이 작업된 겁니다. 제가 ‘5월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심리검사, 면접결과, 심리극 자료 등을 제공하고 박효선씨가 극작 연출해 ‘모란꽃’이 피어났습니다. 저도 극단단원들과 더불어 몇 달 동안 무대 위에서 한덩이로 뒹굴었고요.”
518 항쟁에 참여한 한 여성을 내세워 그의 정신적 외상을 추적하는 내용의 이 심리극은 종래의 거대담론과는 다른 잔잔하고 생생한 감동을 선사했다.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호응을 얻었고 민족예술상 윤상원상 등을 받았다. 물결은 해외에까지 번져 이듬해에는 미국 캐나다 등 7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정신재활센터 광주트라우마 센터 설립 산파역
이 연극공연을 계기로 518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 속의 국가폭력 트라우마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오수성교수는 이 분위기를 활용해 연구에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518 직후 10년 동안 150명에 달하는 트라우마 피해자를 조사 연구해 1990년 ‘광주5월민중항쟁의 심리적 충격’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그는 이후에도 조사를 계속해 518피해자 4000여명의 15%에 달하는 6백여명을 일일이 만나 사례를 정리했다.
이론적 토대를 튼튼히 구축한 그는 외부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실질적인 치유 활동에 홀몸으로 뛰어들어 2002년에 광주정신재활센터 건립이라는 아무도 상상 못했던 역사(役事)를 이루어 냈다. 그동안 전국의 대학이나 기관에 초청받아 강연하고 받은 삯을 푼푼이 모은 8천만원을 투자해서였다.
이 재활센터는 518피해자를 비롯한 만성정신질환자를 치유해 사회에 복귀시키는 시설로 전문의와 임상심리사들이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다. 그래서 예산이 늘 빠듯하다.
2003년에는 전국 최초로 전남대학교 부설 심리건강연구소를 열어 심리건강의 진단과 치유를 일반인들에게까지 넓혀 나갔다. 사단법인 심리건강연구소는 만성정신질환자보다 더 증세가 가볍고 형편도 나은 이들을 대상으로 유료로 정신건강 연구, 심리평가, 심리상담, 심리치료 등을 한다. 이 비용으로 늘 적자에 시달리는 무료재활센터의 경비를 충당하는 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광주트라우마센터 설립이라는 숙원을 성취했다. 오수성교수는 그동안 줄기차게 국가 차원의 트라우마센터를 세워야 한다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촉구해 왔었다. 문민정부를 통해 ‘5월 광주’가 정치적으로는 명예회복을 일정 부분 이루었지만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 왔다. 그러던 것이 외상(外傷) 후 30년이 훌쩍 지나서야 빈약하나마 공공 치유시설이 마련된 것이다. 복지부 산하로 지방시범사업 형식으로 문을 연 것인데 실질적인 산파역은 오수성교수라고 봐야 한다.
그는 이 많은 일을 전남대학교에서 착실하게 후학을 가르치면서 짬짜미 이룩해 냈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서울대학교를 나와 1979년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임용된 후 용봉캠퍼스에서만 3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정년퇴임했다.
광주에 붙박으면서 어떤 광주사람보다도 더 광주사람으로 산 그는 5월정신을 구현하는 뚝일꾼으로 질고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5·18기념재단 이사, 전남대 5·18연구소장, 광주YMCA 이사, 전남사회연구회 회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전남대학위원장, 시민연대모임 공동대표, 시민생활환경회의 이사 등 여러 소임을 거쳤다. 518 트라우마 연구로 임상심리학의 새 장을 연 업적으로 한국임상심리학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일에 초청되어 2년 동안 여러 대학을 돌며 강의하고 연구하는 기회도 누렸다. 그가 만들어 낸 ‘오월증후군(May Syndrome)’이라는 신조어는 세계심리학계의 아이템이 되었다. 현재는 윤한봉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5월을 내려놓으니 5월이 그렇게 아름답습디다
근황을 물었다.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책도 준비하고 자유롭게 지냅니다. 물론 정신재활센터나 심리건강연구소는 꾸준히 나오고요.”
결국 전처럼 바삐 산다는 얘기겠다. ‘5월광주’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지 궁금했다.
“5월 증후군 과제는 이제 후학들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5월을 내려놓으니 아이구 5월이 그렇게 아름답습디다. 그동안 5월에 너무 짓눌려 있었나 봐요. 앞으로 우리 2세들을 위한 정신건강 교육에 힘쓸까 해요.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가는 우리 아이들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정신교육이 매우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심리교육운동’이라고 이름붙이고 그 운동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즘 진행하고 있습니다.”
5월을 내려놓았다는 말은 겸사로 읽혔지만 저간의 사정을 살피면 지금쯤은 그런 토로가 생판 엄살은 아니지 싶다. 그는 어쩌면 5월 신드롬의 심각한 당사자일지 모른다. 실제로 518 이후 트라우마를 겪었고 알콜 중독에 빠졌으며 518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간접적인 외상을 체험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심리교육운동’도 본령에서 벗어난 화두가 아니라 유연하지만 호흡이 긴 ‘5월정신’의 미래지향적 계승일지 모른다.
문득 그가 한 때 재미 붙여서 엮어가던 ‘연어사랑’ 두레 생각이 났다.
“1998년인가, 섬진강에 연어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전에 강릉 남대천에 가서 연어 회귀 현장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 체험을 어린이들과 함께 한다면 참 좋겠다 싶어서 연어사랑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환경운동 하는 이들과 두레를 엮어 주말이면 섬진강에 나가 연어를 방류하고 회귀철이 되면 다시 나가 100배쯤 커서 돌아온 연어를 맞이했지요. 호된 시련을 겪으며 먼 물길을 거슬러 돌아온 연어를 보고 우리들은 환호와 감격 속에 휩싸였어요. 광주의 통기타 가수들까지 합세해 즐겁게 노래하며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그 두레잔치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한 5년 아주 즐거운 대동잔치를 가졌지요. 그런데 연어사랑 활동이 좋은 홍보거리라고 보았던 자치단체에서 이 행사에 개입하면서 그 순수하고 신명나는 난장판에 사가 끼어들고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요. 다시 이 두레를 추슬러서 심리교육운동과 연계해 볼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참회 없는 국가폭력
다시 본령으로 돌아갔다. 먼저 용어 정의부터 요구했다.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줄인 말입니다. 흔히 국가 폭력이 자행한 큰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역사적 사실만 남고 그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 특히 정신적인 피해 상황은 잊히기 쉬운데 이 사후 피해를 연구하고 치유하는 것이 임상심리학의 주요 과제입니다. 선진사회의 경우 이런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치유에 관심이 높은데 한국은 이 부분에서 매우 후진적입니다.”
그러니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설립은 늦었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진전이겠다. 현재의 운영상태는 어떨까, 산파역의 평가를 들어보자.
“광주트라우마센터 설립을 위해 나름대로 애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운영에 대해 뭐라고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 저는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피해자인 강용주씨를 그 대표로 추천하는 선에서 역할을 마쳤다고 봐요. 다만 현재 국가적인 지원 상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광주시에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해서 중앙정부에 강력하게 지원을 요청하고 국가에서는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늘려가 달라고 주문합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늘 주장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트라우마 센터의 설립에 눈감았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실책인데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공공 트라우마센터가 없다는 건 한국의 정치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 생각해요.”
외국의 사례에 대해 물어봤다.
“세계적으로 국가가 지원하는 트라우마센터가 2백여 곳에 달합니다. 우리보다 처지가 열악한 나라들도 이 부문에서는 앞서 있어요. 모범적으로 잘 하는 나라로 덴마크와 미국을 들 수 있는데 덴마크는 1974년부터 국제엠네스티 소속 의사들을 주축으로 고문피해적응센터를 설립해 국가지원으로 운영하고 있고 미국의 경우도 1985년에 고문피해자센터를 세우고 1998년에 고문피해자구제법을 제정해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귀감 삼아 광주트라우마센터 운영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현재 광주시가 추진하는 위탁운영은 바람직하지 않고 정부의 지원 하에 재단법인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이를 위해 광주시와 518 관련단체들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사후 35년이 되도록 트라우마가 계속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을 알면 방법이 도출될텐데.
“트라우마가 지속되는 이유는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가해자가 진정한 참회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상규명이 없으니 가해자가 명확히 드러날 리 없고,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참회가 있을 수 없고, 참회가 없으니 화해가 있을 수 없고, 화해가 없으니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트라우마의 치유는 진상규명→화해→용서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518의 경우 아직 발포명령자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형식적인 보상과 명예회복만 진행되었는데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겠습니까. 메이 신드롬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트라우마 환자의 자가치유 노력 중요
트라우마 피해자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전혀 빚이 없는가. 마지막으로 몹시 난감한 화두를 던졌다.
“국가폭력을 자행한 지배권력이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치유 과정에 있어서는 피해자도 한 몫을 해야 합니다. 외부에만 잘못과 책임을 돌리지 말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해요. 518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참 바람직한 치유 사례를 몇 번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사연은 좋은 귀감이 될 겁니다. 한 분은 518 당시 누이동생은 죽고 자기는 겨우 살아나 지금까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도 그걸 봉사활동으로 이겨내고 있었어요. 트럭 행상을 하는데 어려운 형편임에도 독거노인이나 소년가장을 도우며 살아가는 걸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남을 도우며 자신의 아픔을 아물려가는 아름다운 치유 사례였지요.
또 다른 트라우마 피해자는 암 투병까지 하면서 정신재활센터 등에 나가 자원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5월정신을 승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518 피해자들이 이렇게 슬기롭고 아름답게 스스로 치유하는 데 힘썼으면 합니다.”
글 한송주 대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