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惟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生 而有聖德 ◇◇◇◇◇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 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 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 立碑銘記 勳績以示後世焉 其辭曰 (下略) * ◇ : 판독 불가 |
해 설 |
(광개토대왕비) |
![]() |
◈ [해설]
본 내용은 고구려의 창건설화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연대에 의하면
추모왕(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 삼국사기)의 건국시기는
서기전 37년이며 건국 장소는 홀본(忽本, 혹은 卒本) 서쪽의 성산(城山)이니
이는 현재의 중국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五女山城)에 해당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국시의 국명은 지명을 따서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한 듯하다.(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처음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홀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다.
이후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解扶婁)는 천제의 명에 따라서 이곳을 비우고
동쪽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東扶餘)를 세웠다.
북부여가 가섭원으로 옮겨간 뒤 홀승골성에는 천제의 아들을 자칭하는
해모수(解募漱)가 나타났다. 추모의 어머니인 유화부인(柳花夫人)은
이 때 나타난 자칭 해모수에게 유인되어 임신을 하고 한 개의 알을 낳으니
여기에서 곧 추모왕이 태어났다. 해부루가 죽은 뒤 그의 양자(養子)인
금와(金蛙)가 동부여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추모왕은 금와왕의
아들들과 경쟁하다가 위험을 피해 졸본으로 도망친 뒤
졸본부여왕(卒本扶餘王)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았고
졸본부여왕을 이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다.
중간의 탈락되어 판독되지 않는 부분에는 추측컨데
남행(南行) 이유가 적혀있었을 것이며 그 것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가르침에 따라서 운운"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주석 ▣
* 鄒牟(추모) : 성은 고(高)며 이름은 주몽(朱蒙), 추몽(鄒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등으로 불리우나 모두 차음(借音)에 불과하다. 삼국유사에서는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고 함.
* 女郞 : 여장부, 柳花부인.
* 母河伯女郞 剖卵降世生 而有聖德 : 母河伯女 郞剖卵降世 生而有聖德 (혹은 生子有聖德)로 읽어 "사나이(郞)가 되자 알을 깨뜨리고(剖卵, 孵卵) 세상에 내려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로도 본다.
* 奄利大水 : 삼국사기에서는 엄사수(淹斯水), 개사수(盖斯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는 엄수(淹水), 후한서는 엄한수(淹漢水) 위서는 시엄수(施淹水)로 적고 있다. 현재의 압록강 상류라고도 하며 일설은 북부여의 위치를 지금의 농안으로 보고 송화강을 엄리수로 본다. 엄니,엄내 곧 큰 강이라는 의미.
* 沸流谷(비류곡) : 지금의 혼강(渾江).
* 忽本(홀본) : 혹은 졸본(卒本), 고구려의 첫수도.
* 城山 : 위서(魏書)에서는 이를 홀승골성(訖升骨城)이라 했다. 현재의 환인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니 원래 북부여(北扶餘) 해모수(解募漱)가 도읍하던 곳이다. 동 쪽을 제외한 삼면이 100여미터 높이의 자연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길이 1000미터 너비 300미터의 넓은 평지가 있으니 멀리서 보면 자연 그대로가 높고 거대한 성으로 보인다. 이 산은 그 모습이 성(城)과 같아 성산(城山), 또는 고구려인은 성을 홀(忽)이라 부르니 홀승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 連
고기와 거북이가 떠올랐다고 한다.
[해설]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왕이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고 하니 사망년도는 곧 기원전 20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은 재위 19년 (기원전 19년, 壬寅) 9월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용산(龍山)에 묻혔다고 적고 있으므로 1년의 시차가 발생한다. 동명왕이 죽은 뒤에 이어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 다음으로 유리왕의 셋째아들인 대주류왕(大朱留王, 大解朱留王)이 즉위한다. 유리왕 때 까지도 고구려를 속국(屬國)시하던 부여(夫餘)를 대주류왕이 멸함으로써 비로소 고구려는 온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다.
▣ 주석 ▣ * 黃龍 :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황룡은 회오리 바람이나 황토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장지인 용산(龍山 : 삼국사기)을 의미하거나 혹은 무덤의 현실 입구까지 임시로 쌓은 흙언덕을 연상시킨다.
* 忽本東岡 : 홀본의 동쪽언덕, 지금의 환인현 동쪽에 장사하였다.
* 履龍首昇天 : 黃龍負昇天
* 儒留王 : 유류왕은 곧 추모왕과 예씨(禮氏)부인 사이에서 난 유리왕(類利王, 瑠璃明王 類利)이다. 즉위 22년에 국내성 (國內 尉那巖城)으로 천도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 大朱留王 : 대주류왕은 곧 대무신왕(大武神王)이니 곧 유리왕의 셋째아들로서 유리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부여국(夫餘國)을 멸하고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삼국사기에는 낙랑을 멸하였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고구려의 기초를 다진 왕이다.
[해설] 광개토왕은 소수림왕 4년(374년)에 왕제(王弟)인 이연(伊連), 즉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 태어나 고국양왕(故國壤王) 3년 13세에 태자(太子)로 봉(封)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卽位)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신묘년(辛卯年, 391년) 여름 5월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등극(登極) 시기를 임진년(壬辰年, 392년)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광개토왕비의 기년(紀年)과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즉위 원년(元年)이라는 임진년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조 및 백제조의 신묘년 기사와 일치한다. 따라서 삼국사기 연표에서 광개토왕의 즉위 연도는 한해 끌어올려 신묘년으로 보아야 맞다.
광개토왕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피살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손자이다. 고국원왕 12년 고구려는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5만여 명이 포로가 됐을 뿐만 아니라 부왕인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탈취 당하고 왕모(王母) 마저 연나라에 포로가 된다. 그리고 다시 고국원왕 41년에는 백제의 침공을 받아 싸우던 중 고국원왕이 유시(流矢)에 피살된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소수림왕에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은 북으로 연나라와 싸워 현도(玄도)를 빼앗고 남으로 백제와 대결하였으나 재위 9년에 아깝게 죽는다.
아버지 고국양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선대의 기초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북쪽에 이미 확보된 영토를 공고(鞏固)히 하고 남으로 백제를 쳐서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꾀하는 한 편 신라를 실질적인 지배 아래 두게 된다.
▣ 주석 ▣ * 十七世孫 :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즉, 19번째)왕이다. 형제간의 왕위 계승을 빼면 광개토왕은 동명왕의 13세손에 해당되는 바 17세손이 되려면 추모왕 이전의 북부여 세수가 합산되어야 한다. 이는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서 확인되는 바 여기에서는 확실하게 광개토왕이 북부여의 17세손 (北夫餘國至十七世孫)임을 밝히고 있다.
* 永樂 : 연호(年號)이자 생시(生時)의 호칭이다. 휘(諱)는 담덕(談德)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국강상(國岡上)은 왕릉이 있는 곳을 가르키며 광개토경평안(廣開土境平安)은 땅을 넓히고 이를 평안케 했음을 기리는 내용이고 호태왕(好太王)은 시호(諡號)이다. 모두루묘(牟頭婁墓)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경주에서 발견된 호우(壺우) 밑면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으로 기록되어있으며 삼국사기에는 휘호(諡號)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적고있다.
[해설] 광개토왕은 서기 412년에 사망하였으며 이 때 나이 39세였다. 광개토왕의 비석은 중국 길림성(吉林城) 집안시(集安市) 태왕향(太王鄕)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높이가 6.39미터에 폭이 1.5 미터 내외이며 1775자가 기록되어있다. 왕의 무덤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이 많다.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장군총(將軍塚)이 있고 그 아래에는 태왕릉(太王陵)이 있으며 서쪽으로 각각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과거에는
1) 태왕릉이 거리상으로 더 가깝고 2) 태왕능 안에서 태왕이라는 글자(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가 쓰인 벽돌이 발견되었으며 3) 장군총은 장수왕(長壽王)릉의 와전(訛傳)된 이름이라고 보아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태왕이라는 호칭은 광개토왕에게만 사용된 호칭이 아니고 위대한 왕이라는 보통명사에 불과하며, 일반적으로 묘는 남향으로 만들고 그 앞에 묘비를 세우므로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능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장군총은 1100개의 잘 다듬어진 돌로 한 변의 길이가 30미터 정도 되도록 쌓은 피라미드형 무덤이고 호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적석(積石)무덤이다.
▣ 주석 ▣ * 昊天不弔(호천불조) : 모두루묘지에는 旻天不弔라 적고있는 바 의미는 같다.
*
二十二年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 宴駕棄國(연가기국) : 야외에서 연회(宴會) 도중 사망하였다는 의미로 보인다. 왕은 이 때 아직 30대 후반이었고 사망하기 두해 전 까지도 직접 부여 정벌에 나섰던 만큼 급사(急死)한 것 같다.
* 遷就山陵 : 고구려에서는 생시에 이미 무덤을 만들었지만 광개토왕은 일찍 죽었으므로 가묘(假墓)를 쓴 상태에서 능묘(陵墓)를 완성하고 사후 2년이 지난 때에 이장(移葬)을 한 것으로 보인다.
▣ 해석 ▣
◈ 옛날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추모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으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성(聖)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중간 해독 불능)
거마(車駕)를 타고 순행(巡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부여(夫餘)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다다랐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河伯)의 딸인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하였다.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물위에 떴다. 그런 뒤에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都邑)을 세웠다. 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忽本)의 동쪽 언덕에서 룡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에게 고명(顧命)하여 도(道)로써 나라를 흥성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대주류왕(大朱留王) 이 기업(基業)을 이어 받았다. (북부여의) 대를 이어 내려와 17세 손(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왕은 18세에(서기391년, 신묘년) 즉위하여 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일컬었다. 은혜는 하늘에 (미치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떨쳐졌다. (불온한 무리를) 제거 하시어, 뭇 백성들이 각자의 업에 평안하도록 하셨고,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번성하였으며 오곡(五穀)은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영락(永樂) 22년(서기 412년) 9월 9일 39세에 수레 위에서 나라를 버리시었다.
갑인년(甲寅年, 서기414년, 長壽王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을 국내성 동쪽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이에 비명(碑銘)을 세워서 공적(功績)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보인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하 생략)
* 보충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 [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
첫댓글 이 자료는 한자박사(유료, 정회원)에서 가져온것이므로 다른곳에 옮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보았습니다. 자료실에 옮겨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