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따는 날의 동화
屹然 황인복
10월의 중순을 넘어섰는데도 아직은 감 잎이 푸르며. 짙은 녹색의 두텁고 윤기가 흐르는 무성한 잎사귀 속에 주먹만한 감들이 매달려 있다. 결실기의 주황색으로 변해서. 올려다 보니 마치 짙은 색의 브래지어를 살짝 들어 올려, 수줍은 듯 하나 윤기가 흐르고 탐스런 젖 가슴 일부가 드러난 것 같은 모습이다. 입안에 고이는 침은 그 옆의 빨갛게 익은 홍시 때문 임을 마른 기침으로 자신에게 일러둔다. 드높은 하늘아래 사선으로 내리 쬐는 햇살이 따스하다. 세안 후 거울을 들여다 보고 탱글탱글한 자신의 볼을 바라보며 미소 짖는 여인처럼, 밤새 물 서리에 목욕한 감들이 쏟아지는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다투어 뽐내고 있다. 문의 향교, 고색창연한 명륜당 앞에 위의 풍경을 보이며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서 있는 감나무들의 모습이다.
대청호 호반의 마을 뒤편에 푸른 솔 문인협회 회원들의 문학의 열정을 키워나가는 산실이 있다. 문의 향교에 이렇게 터전을 마련해 놨고. 문학에 입문한 사람들을 지속적인 배움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지도 교수님의 뜻이 실현된 우리 수강생들의 거접(居接) 장소이다. 이곳에 오늘 문우(文友)들이 모였다. 대청호에 수몰된 고향을 두고 계신 교수님과 가장 연세가 많으신 문학회, 현 회장님을 비롯해 전 회장님. 이미 공직이나 생활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청년과 젊디젊은 여사로 대접받는, 그리고 나처럼 꿈이 있는 작가 지망생과 이미 작가반열에 오른 분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향교 마당의 감나무에서 감을 따기 위해 모인 것이다.
대봉 시! 말 그대로 주먹보다 큰 것도 있다. 우선 홍시부터 따서 액상 진액을 빨아 들이니, 밤의 냉기에 차가워진 달콤한 과즙이 혀를 녹이는 맛이다. 전날의 숙취가 말끔히 가시며. 문득 고향의 옛 정경(情景)이 떠오른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외양간의 소가 여물을 먹으며 코와 입에서 내뿜는 하얀 입김이 피어 오르는 서릿가을의 이른 아침 이였다. 아버지는 대나무 장대를 메게 한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향하신다. 그곳에 줄지어 서 있는 감나무에는 이미 떨어져 내리고 몇 안 남은 곱게 채색된 잎사귀 사이에, 빨간 홍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따 내려 주신 홍시를 입으로 가져가는 내게, 아버지 는 “이 놈 봐라! 그건 할아버지 드려야 할 것 아니냐!” 부끄러움에 떨어진 감 잎 중에서도 예쁘게 단풍이든 깨끗한 잎을 골라, 식구들 수대로 홍시를 감싸 바구니에 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가장 볼품없고 깨진 홍시를 집어 드는 아들의 손을 제지하며 제일 먹음직스런 홍시를 쥐어 주시던 아버지. 잠시 감나무를 뒤로하고 끝없이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운 아버지께 혼잣말을 하는 나를 발견 한다. “한 없는 사랑을 담은 아버지의 따듯한 눈빛과 미소. 그리고 산을 내려오며 붙잡은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일깨워 주신 효(孝)를 실천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유명을 달리 하셨지요. 무엇보다 술을 즐기신 아버지께 새벽에 내린 된서리에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고 시원한 홍시를, 따 드리지 못했음이 오늘 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네요.”
감나무 사이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오리발 잎새와 노오 란 열매를 수북이 잔디 위에 쏟아내고 있다. 작업하는 우리의 발에 밟혀 냄새를 피우는 데도 역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수한 냄새가 전원을 느끼게 한다. 부침개와 막걸리가 흥을 돋우며 맛 또한 천하일미로 손색이 없다. 이때 덕망이 높으신 한 문우님께서 “젊어서 얘기야! 길가에 떨어진 은행 두 개를 가을이다 하고 주워 만지고 소변을 보았는데, 다음날부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 장관이더군. 옻 탓이지만, 내 그렇게 큰 물건도 소유해 본 사람이야!” “그래요? 은행 덕에 사모님께서 횡재 하셨겠네요. 선생님의 가려움도 해결하시고.” 나의 짓궂은 답변에 온통 웃음 바다가 되었다. 문우님 또한 동안(童顔)에 지으신 함박웃음 속에는 그때의 잊을 수 없는 즐거움도 포함돼 있는 것 같다.
감 따기 작업과정을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문우님께서 특유의 해학을 날리며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이 즐거운 장면을 내일이면 화면을 통해 바라보며 다시 한번 더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 까치 밥으로 몇 개 남기라고 나무 밑에 선 분들의 이구동성 성화와 함께 작업은 끝이 났다.
감나무 바로 앞 길가에 이미 잎은 지고, 작은 모과처럼 모양과 향이 꼭 닮은 열매가 매달려 있다. 명자 나무다. 명자 과는 차로 우려 마실 수 있고 불임인 여성에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약으로 쓰였다는 속설이 있다. 땅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문학회 사무실 앞 햇살 비치는 뜰에 놓았다. 이때 우리 수필 반에서 여류 문인으로서는 가장 서정적이고 감성이 묻어나는 글을 쓰는 작가 분이 명자 과 몇 개를 집어 든다. 그러면서 하는 말. “차로 만들어 마시고 늦둥이 하나 낳아 볼까?” 그 말을 듣자 “내 아기? 낳아 줄 꺼야?” 우리들의 철 지난 노래였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파안대소하는 주름진 얼굴에는 즐거움만 가득 담겨 있었다. 전혀 공허의 늦은 울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을을 거두어 들이며 그 결실을 매듭짓는 노동이 이렇게 즐겁고 유쾌할 수 있음을 만끽한 하루였다. 더욱이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신 문우는, 운세가 밝아져 하는 일마다 척척 잘 진행되고 이득을 보며, 혹은 이성과 연애를 하게 될 수도 있다. 하는 길한 감 꿈 해몽이 있으니 한 상자씩 나누어 갖은 감을 식구들과 맛있게 드시며 마지막 운은 기대로만 그쳐야 평정(平靜)을 찾으실 듯. 그리고 탐스런 감을 보고 만지기만 한 분들은, 미인이나 매력 남을 보고 매료가 되어 넋이 빠질 운세이니 그 또한 알아서 수신제가(修身齊家)하시길 바랍니다.
*수강생 여러분께 미리 알려 드립니다. 감을 따서 내려줄 때 밑에서 제대로 받지 못해 깨어진 감들은 썰어 말리고 있습니다. 점자, 미화 두 작가 분의 노고가 느껴지시지요? 제가 대신 치하했고요. 다음주 수강 일에는 맛 있는 감 말랭이를 드시며 행복해 하시는 여러분들을 뵐 수 있겠지요. 아-참! 한가지 지금 생각났는데 한해 전인가? 향교 우리 문학의 산실에서 요번처럼 썰어 말린 감 말랭이를 먹으며, 소감을 표현해 발표한 글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작가가 되신 분이 있습니다. 아울러 그리고 모쪼록 다음해 감 따는 날에는 … 아셨지요?
첫댓글 정이랑 맛이 담뿍 들어있는 글이구요. 또다시 감을 따고 싶다는 느낌이 저절로 드는 멋진 글입니다.
못하시는 건 없고 모두다 잘하시는 흘연선생님 늘 부럽습니다.
좋은 글 많이 들려 주시고 잘하시는 모든걸 조금은 나눠주시면 좋겠죠? 1/100만이라도. 우리 화이팅 하시죠!!
"입안에 고이는 침은 그 옆의 빨갛게 익은 홍시 때문 임을 마른 기침으로 자신에게 일러둔다.
드높은 하늘아래 사선으로 내리 쬐는 햇살이 따스하다. 세안 후 거울을 들여다 보고 탱글탱글한
자신의 볼을 바라보며 미소 짖는 여인처럼, 밤새 물 서리에 목욕한 감들이 쏟아지는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다투어 뽐내고 있다..."
감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표현하시다니요... 훌륭한 작가의 기질이 보이십니다. 감상 잘했습니다. 선생님.
'가을을 거두어 들이며 그 결실을 매듭짓는 노동이 이렇게 즐겁고 유쾌할 수 있음을 만끽한 하루였다.' 등 무척 멋지고 좋은 글 잘 읽고 많이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하하 지금 읽었네요, 그 감말랭이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