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말씀입니다.
일전에 서울 사시는 누님과 전화로 고향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이야기라 함은, 예전에 우리들이 고향에 살 때에, 앞집 뒷집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누님의 어릴적 친구들이 궁금하여, 기억하고 있는 이름들을 열거했습니다. 붙들이는? 샘이는? 끝장이는? 순자는? 어디 살고 있으며, 연락을 하고 사느냐? 하고 죽 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한 이름들은 전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 이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 이름이 되었건,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되었건 우리들에게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불러도 누구를 말하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적 고향에 살때 수없이 불렀으며, 수없이 그 얼굴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가 자주 듣고 자주 읽고 자주 묵상하면 말씀을 알아듣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편 백십 구편, 136절 말씀을 읽고 들으심으로 알아들으시는 은혜가 함게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136절 :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아멘
' 눈물이 필요합니다 '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남자아이가 울면 으례껏 하는 말이 있습니다. "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번만 우는 거야. 사내자식이 울긴 왜 울어~, 뚝 "하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만든 법인 가요? 울고 싶으면, 세번 아니라 수백 번이라도 울어야 합니다. 악어의 눈물 빼고는 언제든지 마음이 북받치면 울어도 됩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우셨던 적이 있으십니다. 평소에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이었던,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심을 믿지 못하고 슬퍼만 하는 그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려고 세상에 오신 구주가 앞에 계심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자가 죽었다는 것을 슬퍼하는 그것을 비통하게 여기셨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울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시편 성도는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 때문에, 눈물이 시냇물 처럼 흐릅니다 라고 할 정도로 울었습니다. 이런 눈물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날에 방탕했습니다.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이러하던 어거스틴이 예수 그리스도깨로 돌아온 것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였던 것은 기독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떠난 아들딸이 있습니까? 혹은 사랑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또는 말씀으로부터 떠나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를 정도로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가기 위해 강물을 타고 올라오듯이,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의 강물을 타고, 죽은 영혼들이 복음을 만나려고 올라올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말씀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눈물을 흘릴 때까지 냉랭한 가슴을 쥐고 기도하도록 합시다.
축복의 씨앗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심령들을 위하여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를 수 있도록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해 주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