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서 있다.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지난날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지난날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시며 그녀를 보내신다(복음).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돌을 움켜쥐고
간음한 여인을 향해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수 있었고
비로소 왜곡된 정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자리에서 떠나 버렸지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생각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용서받아 지난 잘못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달랐습니다.
군중이 모두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여인은 끝까지 예수님께 남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홀로 남겨 두고 조용히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군중과 달리 죄를 깨달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학가인 로이 레신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생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업가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사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오락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셨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세주의 자비를 청하며 회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지난날의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감동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알려질 리 없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겠습니까?
용서입니다.
여인과 함께 ‘위선의 남자들’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율법에서 간음은 사형이었습니다.
하늘의 벌이 ‘내릴까 봐’ 돌을 던져 죽게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거해 버림으로써 재앙을 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끝내십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반대하시면 율법을 어기시는 것이고,
묵인하시면 용서를 외치시는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고발인뿐 아니라 구경꾼의 가슴까지
철렁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니, 오늘의 우리까지 서늘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뒤 그분께서는 무엇인가 땅에 쓰셨습니다.
악의에 찬 질문 앞에서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배려’입니다.
마침내 고발하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았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은 되돌아와서 삶을 축복으로 감싸 줍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를 원합니다.”
- 코페르니쿠스 묘비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