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스물네 시간 움직이는 뉴욕의 지하철, 그리고 끝없는 이동과 전진만이 가능한 세계인 '언더그라운드'를 배경으로, 사회로부터 도주한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하는 이야기인 서진 장편소설. '객차 같은 속도감과 리듬을 지녔다'라는 평가를 받은 작가의 작품으로,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영상문법인 되감기와 빨리감기, 녹화하기, 건너뛰기 등으로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작가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악몽보다 더 잔인한 삶의 비밀을 하나둘씩 알려주며, 사회로부터 도주한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미국으로 이민 간 주인공 김하진, 지하철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앤디, 지하철에서 먹을 것을 팔면서 소매치기를 하는 빌리(프레디), 언더그라운드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전직 의사 폴, 언더그라운드에서 다친 하진을 돌봐주며 딸과 함께 사는 에이프릴, 아들과 남편을 위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되는 아내 미라의 삶을 통해 작가는 악몽보다 더한 현실을 살아가는 힘은, 가장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향한 희망일 수 있다는, 인간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책속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은 노력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냐. 가질 수 없는 것을 계속 바라다보면 병에 걸려. 위장병이든, 심장마비든, 기억 상실이든. 자넨 사람을 찾아주는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에 가야 돼. 머리에 커다란 상처가 있을 거야.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거나 시커멓게 타버렸을 거라고.”(32-33p)
당신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잠시, 라고 생각할 때 시간은 멈춰주지 않는다. 그 잠시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뀔 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일 뿐이다. 변화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인생은 오르막길이다. 막연한 미래를 기대하며 잠시 다른 일을 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당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당신은 잠깐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런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당신에겐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는다. 버스는 떠났다. 기차도 택시도 오토바이도 모두 떠났다. 인생에 시간표 따위는 없다. 인생은 오르막길이다. 멈추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56p)
자주 들르는 손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그 손님이 좋아하는 노래를 기억하는 것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생존 수단이었다. 손님들은 가끔씩 그 바에 와서 흥겨운 노래를 듣는 것이 다지만, 앤디는 일주일에 네 번, 하루에 여섯 시간동안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방세가 밀려 있더라도,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있더라도, 오디션에 합격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더라도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고 방 값은 매달 나온다. 그 잠시는 그렇게 흘러갔다. 순간은 영원이다. 인생에 시간표 따위는 없다. (57p)
덜컹거리는 진동은 지하철이 만들어내는 자장가다. 그 소리가 너무 익숙하고 규칙적이어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다. 이제 당신도 슬슬 내가 지하철에서 헤매고, 지상으로 올라가다가 몸이 찔리고, 다시 지하철에서 깨어나는 이야기가 질리기 시작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전철의 노선이 바뀌고, 몸에 상처가 나는 부분이 바뀔 뿐,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반복될 뿐이니까. 하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걱정 말길. 나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고? 혹시 당신의 일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승용차를 탄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나간다. 고등학교가 대학교로 변하고, 팀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하고, 애인이 바뀌고 결혼을 한다. 매일 매일 비슷한 과정으로 약간씩 새로운 일이 생기며 반복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끝은 있게 마련이다. (93-94p)
어떻게 한 사람의 말만 믿고 인생을 바꾸게 되었냐고? 당신은 대학교 전공을 어떻게 선택했는가? 직장은 어떻게 선택했는가? 아내는 어떻게 만났나? 인생은 생각보다 사소한 기회로 뒤바뀐다. 당신은 그것이 운명이었다고 믿겠지만, 단지 우연일 뿐이다. 당신의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117p)
당신이 지금 이렇게 된 건 부모님 탓이 아니다. 최고의 효도는 효도 관광이 아니라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라. 부모, 형제, 친구, 아내가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하라. 당신이 하고 싶은 일에 충실하라.(119p)
터닝 포인트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감사하게 여기고 불행이 다가오면 다시 행복해질 미래를 기약하며 참을 줄 안다. 아, 교장 선생님의 훈시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실은 언제나 따분하게 들릴 정도로 단순하다. 당신은 어떤가? 한숨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신은 집값이 오를 때 덩달아 사는 사람이다. 행복할 때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불행할 때는 자기 비하와 연민에 빠지는 사람이다.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는 날들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LA에서 비다운 비는 구경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그래프가 대형 쇼핑물의 천장처럼 평평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131p)
삶의 여유라는 말이 사치로 여겨진다는 말을 그 전엔 실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이와 공원에 산책을 나가는 일마저 사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에 절망하게 되면 세상 모든 것에 절망하게 된다. (148p)
인생은 오르막길. 어차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가까이 있어도 잡지 못하는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아버렸을 때는 보통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때가 많다. 잠시라고 생각했을 때가 위험하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저금하지 마라. 보험에 들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150p)
스무 개 정도의 방이 트랙을 중심으로 양쪽에 완성되자 난쟁이는 그곳에 살 사람들을 한 명씩 데려오기 시작했다. 뉴욕을 배회하는 수많은 홈리스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한 명씩 데려와 방으로 인도했다. 언더그라운드에 도착한 사람들은 한 명씩 한 명씩 늘어났지만 결코 스무 명을 넘는 일은 없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고 어느 날 아침 비어 있는 방에 새로 온 사람도 있었다. (211p)
당신은 중독자다. 하루에 자판기 커피 다섯 잔.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마셔댄다. 장에 싸구려 지방이 쌓이고 위는 헐기 시작한다. 궁금하지 않는 인터넷 뉴스를 짬이 날 때마다 클릭한다. 댓글을 읽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누가 썼는지 궁금한 치사한 댓글일수록 당신은 열광한다. 3초마다 바뀌는 케이블 티브이의 채널. 특별히 보고 싶은 영화를 생각해두지 않았는데도 채널을 바꾼다. 뭔가 나오기를 기다라며 손가락으로, 때로는 발가락으로 버튼을 눌러댄다. 당신은 중독자다. 당신이 그것들에 의지하는 동안 당신의 인생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인정하지 못한다. 결코 인정하지 못한다. (240-241p) --- 본문 중에서
[예스24 제공]
추천평
최근 3년간 나는, 한겨레 문학상을 받고 싶다고 매일 자기 전에 생각했다. 작가의 프로필을 어떻게 쓸 것이고, 책의 말미에 나오는 작가 후기는 어떻게 적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수백 번 반복했다. '뉴욕 할렘의 119번가에는 내가 글을 쓰는 3층 사무실이 있다.' 이것이 작가 후기의 첫 문장이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후버트 셀비 주니어의 을 읽고 몸이 후둘거렸다. 따옴표도 하나 없고 마침표도 없는 브루클린 방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중독에 관한 이야기이자, 절망적인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언어로 만들어진 소설이 신체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나는 미치도록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서진
[알라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