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지배하다가 태평양전쟁 때 물러나갔던 프랑스군이 1946년 다시 돌아왔다. 베트남 민족전선을 이끌던 호찌민은 프랑스의 철수를 요구했다. 프랑스가 거부하면서 8년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가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프랑스의 베트남 주둔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베트민 군대를 일거에 소탕하겠다는 야심 찬 전략의 일환으로 디엔비엔푸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1953년 말까지 디엔비엔푸에 1만1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정예 공정부대를 투입했다. “승리는 여자와 같아서, 덮치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만 몸을 맡긴다”면서 나바르는 자신감에 도취돼 있었다. 그러나 나바르 장군이 오히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위의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구릉지대인 디엔비엔푸에는 41번 고속도로를 통해서만 북부베트남과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은 게릴라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 프랑스군은 오로지 항공기에 의해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가장 중대한 실수는 날씨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다. 디엔비엔푸 지역은 열대 몬순 기후구에 속한다.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는 건기로 바람은 주로 북풍이고 산발적인 강수만 보이지만, 4월에 접어들면 바람은 남서풍으로 바뀌고 다섯 달 동안 1500㎜ 이상의 억수 같은 비를 가져오는 몬순기가 시작된다. 인도양과 벵골만으로부터 불어오는 습도가 높은 남서풍은 동남아시아 내륙을 지나는 동안 대류에 의해 상승하면서 무시무시한 비구름을 만들어낸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우기에 접어들면서 매일 격렬한 비가 내린다. 프랑스군의 당초 계획은 건기 중간 무렵에 디엔비엔푸에 공수하고 몬순이 시작되기 전 이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에 공수된 프랑스군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예정된 시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기를 맞이하려면 방어진지를 강화해야 했고, 보급 물량이 대폭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항공기로 탄약과 식량을 보급받고 있던 프랑스군에 보급 물량의 대폭적 확대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공격보다는 방어에 중점을 두게 된다. 다시 말해 공격하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우기가 오면 이곳의 방어기지는 범람하는 강에 의해 침수될 것입니다. 폭우로 인한 악시정과 저고도 구름으로 적의 공격을 막기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공중보급에 치명타를 맞을 수 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주둔군이 하노이의 프랑스 지휘부에 보고한 내용은 불행하게도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1954년 3월 보구엔지압이 이끄는 베트민들이 디엔비엔푸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됐다. 이 해의 몬순은 예년보다 빨리 시작돼 3월 하순부터 호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로 인해 프랑스군의 참호에는 물이 차기 시작했고, 물이 찬 참호에서 적의 포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보급항공기는 두껍고 낮은 비구름으로 인해 매우 낮게 날 수밖에 없었고, 산에 숨겨져 있던 베트민들의 대공포에 의해 수많은 항공기가 격추됐다. 집중호우가 계속되자 프랑스의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공수작전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적으로 항공기 공수에 의존하는 프랑스의 식량과 의약품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남움 강이 범람하면서 활주로를 따라 형성된 방어기지는 거의 전 지역이 물에 잠겨 버렸다. “하나님, 이 참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심한 굶주림과 말라리아와 이질,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병사들의 상처에는 흰 구더기가 득실거리지만 의약품이 없어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마침내 베트민의 공격이 절정에 달한 5월 7일, 8000명의 사상자를 낸 후 지치고 병든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말았다. 전장지역을 선택한 쪽은 프랑스였지만 이기기 위해 전장 특성과 기상을 잘 이용한 것은 베트민이었다. 지혜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폭풍같이 이른다고 잠언은 말한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지형과 날씨로부터 철저히 응징 받은 것이다. 이 전투 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하고 쫓겨나고 만다. “우리의 역사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세계 최강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굴복시켰고, 베트남전에서 패배해 본 적이 없다는 미국을 패퇴시켰으며,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우리는 승리했다. 이것은 싸워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베트남 인민의 단합된 힘과 지도자의 리더십이 합쳐진 결과다.” 2004년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과정에서 같이 공부했던 베트남 ‘도 쑤언 롱’ 대령의 말이다. 베트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뛰어난 군인이었던 그는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 군인들에 대해 정말이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 TIP- 베트남 승리의 비결“재래식 군사로도 이길 수 있다” “우리 인민들은 외세 침략에 맞선 조국의 투쟁 전통을 물려받아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적군을 무찔렀다.” 베트남의 국보라 불리는 보구엔지압 장군의 말이다. 그는 게릴라전과 재래식 군사작전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의 상대인 프랑스와 미국은 막대한 자원과 최신 무기, 뛰어난 화력, 잘 훈련받은 병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군대는 농민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그들은 낡은 총밖에 없었으며, 보급품을 운반할 트럭도 없었고, 통신수단도 19세기 방식이었다. 이때 중국의 마오쩌둥이 트럭과 라디오, 통신수단을 공급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그는 중국의 원조가 덫이라고 생각했다. 장기적으로 덜 중요한 원조물자가 베트남을 더 약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트럭보다는 엄청난 농민 조직을 이용해 등에 보급품을 져 나르게 했다. 정글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적들을 혼란시켰다. 언론을 교묘하게 활용해 국면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전장에서 절대적인 열세는 없는 법이다. 가진 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