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11,16-19
행복해지려면 지혜로운 자를 사랑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통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삼구(세속-육신-마귀)를 벗어던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지혜’가 아니면 사랑의 실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이 지혜를 전하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실로 거칠고 힘들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교만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들은 여러 핑계로 세례자 요한의 지혜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합리화를 이렇게 합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지혜, 곧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세대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삼구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거쳐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문에 변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변화된 사람과 머무를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분이 물 위를 걸으면 시도할 용기가 납니다.
그 시도 안에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말로만 들어도 안 되고 인간이 아니어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행복을 사는 사람과 머물 때만 증가합니다.
지혜는 지혜로운 자와 머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십니까?”라고 물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배운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우리가 잘 알듯이 이탈리아 표준어의 시발점이 된 『신곡』(Divina commedia)을 쓴 사람입니다.
『신곡』은 단테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까지 올랐으나 정치적 격변으로 추방당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유랑하다 라벤나에서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랑생활을 하며 지은 이 책은 ‘지옥-연옥-천국’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히 지옥은 35살(당시 평균 연령이 70세) 피렌체의 최고 공직인 프리오리가 된 시점에서 ‘삼구’(三仇)로 길을 잃고 있었던 자신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입구에서 그는 세 무서운 동물을 만납니다.
표범(육욕)과, 사자(권력욕)와, 암늑대(재물욕)가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는 교리를 표현한 것이고, 자신이 그런 처지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옥을 거쳐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때, 그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이는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여인입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9살 때, 그리고 18살 때 딱 두 번 만났을 분인데도 그는 평생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9살 때 그녀를 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딸이 아닌 신의 딸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감히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18살 때 다시 한번 천사와도 같은 그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불행히도 1290년 향년 24세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만남에서는 잠깐 대화를 나눕니다.
단테도 1283년 이미 다른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고 3남 1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단 두 번의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말하기 위해 『새로운 인생』(La vita nuova; 1295)이란 책을 씁니다.
그 이후에 10년 동안 세속-육신-마귀에 빠져 지옥의 삶을 살기는 했지만,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그 여인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외로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 고상한 여인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달콤한 잠에 떨어졌다.”
자신의 아내인 ‘젬마 도나티’에 대해서는 어느 책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는 그가 단 두 번 만난 여인에게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날 그녀의 의상은 매우 고귀한 색상인 예쁜 주홍빛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게 허리띠가 달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과 결혼한 신이라 표현한 것이고 그녀를 심장에 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만큼 어떤 누군가를 심장에 받아들이면 그 누군가가 평생 그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그는 순수했던 시절, 자신의 심장 안에 들어온 그녀를 통해 다시 정화되어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테는 고귀한 사랑만이 그 사람과 함께 머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다는 지혜를
평생을 거쳐 베아트리체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세례자 요한이고 베아트리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면 그분이 심장 안에 머물며 우리를 가난으로 이끌고 이어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을 체험합니다.
먼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삶으로 말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7)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무심할까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것과 머물게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돈이나 쾌락, 명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과 반대의 길로 이끄는 세상의 세례자 요한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인 그리스도께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사라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11,16-19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언행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의 얼굴은 절대로 경건하거나
엄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목이 뻣뻣하다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했으면 가시는 곳마다 아이들이 졸졸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 지도자들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던지 강의를 시작하면 수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 상을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라도 그 하느님 상이 왜곡된 것은 아닙니까?
두려운 하느님, 처벌자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이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둘째 아들, 순식간에 유산을 다 까먹고 맨발의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걱정, 우리 죄에 대한 걱정, 종말에 대한 걱정은 이제 한쪽으로 밀쳐두길 바랍니다.
대신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그분이 차려놓으신 이 세상이란 잔칫상 앞에
기쁜 얼굴로 앉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우리 각자 인생의 잔에 담아 감사하며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 번뿐인 ‘이승의 삶’에 최대한 감사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길 바랍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적응이 안 되었으면 유다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오랜 세월 메시아를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유다인들이 그린 메시아상은 한 마디로 대단한 메시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 하실까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초등학교 다닐 때는 참 많은 놀이가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등장했던 놀이는 모두 제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뽑기 게임,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 게임 등등…. 그 밖에도 많은 게임으로 심심한 줄 몰랐습니다. 워낙 게임을 같이 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참고로 한 반에 70명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심심해할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모이지 못했을 때, 서로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았을 때는 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 할까?”라고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가 “그러면 이거 할까?”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냥 집에 가자.”라는 말에 하나둘씩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장터에서 혼례잔치 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어떤 놀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흥미를 잃은 세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도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함께 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불평불만으로 힘들다고만 말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들은 어디에 흥미를 느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이사 48,18.19)
주님의 계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의로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이 모든 은총이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고 있나요? 세속적인 것에 대한 흥미가 너무 많아서 주님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와 주님 말씀을 외면하는 지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생텍쥐페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를 커다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즉, 기술에 기반을 둔 현대문명은 모든 것과 모든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거짓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알려졌을 때, 일반적으로 앓는 독감보다도 훨씬 약한 바이러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그래서 곧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2년이 거의 지나간 지금도 불안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전능하다고 생각했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도 스스로 전능하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