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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묵상글 (연중 제32주일. - 중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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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0 03:57
- 중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 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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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이름의 발음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인데, 늘 ‘조명현’으로 부릅니다(아직도 동창 신부 중에서는 ‘조명현’으로 부르는 신부가 있습니다). 이름에 받침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부모님께서 지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밝을 명(明)자와 뻗을 연(衍)자를 씁니다. 밝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밝음을 지향하며 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이런 생각으로 제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만 불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이름대로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됩니다. 저의 경우,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조명연’ 외에도 별명인 빠다킹, 제 신분을 나타내는 ‘신부’, 책 냈다고 ‘작가’, 강의한다고 ‘강사’ 등…. 제가 하는 일에 따라 이름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름이 붙일지는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가 될 것이고, 사기를 치면 ‘사기꾼’, 살인을 하면 ‘살인범’….
어떤 이름을 바로 세울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환경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값을 남이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을 갖도록 내가 노력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늘 사랑만을 이야기하셨고,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랑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 각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다는 표징으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면서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각자에게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전에 걸맞은 이름을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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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보다 조금만 더 매일 행하라(로웰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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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32 주일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서로의 눈빛 만으로도/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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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계산법을 달리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또 부족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시고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 성직자들이 돈에 얽매인 것을 보면 매우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초연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큰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오늘날 200원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4).
부자들은 가진 것의‘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전부’를 바쳤습니다. ‘일부’는 그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 결코 많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각자 자기 분수대로 하면 되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분수나 여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계산법을 달리하면 값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의 돈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겉모양은 환원이지만 속을 보면 재산축적입니다. 세계 부자 워렌버핏은 재산(440억달러)의99%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자기 부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지 않고 세계 부자 2위인 빌게이츠재단에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재단, 부인의 재단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더 잘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은 가족의 생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이나 교회에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나 시간,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음식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그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접했는데 그로 인해 그 집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1열왕7,16). 그는 그야말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음식만을 의지했다면 아마도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예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말라기3장10).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행함을 통해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2,44-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또한 공간도 살펴보십시오. 우리 집이 넓은데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지요? 그저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모님을 모셔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과 공간, 물질,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봉헌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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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학 시간에 ‘공약수와 교집합’을 배웠습니다. 공약수는 두 수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수를 의미합니다. 교집합은 두 개 이상의 집합에서 공통으로 포함된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의미합니다. 즉, 두 집합에 모두 속한 원소들의 모임이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가 다르더라도 인간으로서 공통된 가치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의 공약수와 같습니다. 여러 사회와 문화가 다르게 작동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가 바로 공약수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교집합’은 새로운 통찰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집합을 통해 사회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도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장미를 달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성부인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인 하느님은 몸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인 하느님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효경, 굳셈, 의견, 지혜, 지식, 통달, 두려움의 은사를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대공약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귀를 쫓아냅니다. 예언의 직무, 성사의 직무, 봉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정결, 순종, 청빈의 삶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신도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가진 걸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최대공약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반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겁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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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느 마을에 건설사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장에게는 양팔과 같은 든든한 직원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궂은일을 해주었습니다. 회사는 날로 번창했고, 사장님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장이 그 직원 둘을 불러서 고급 저택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비싼 값에 팔 저택을 지으라고 말입니다.
두 직원은 따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은 좋은 재료로만 집을 지었고, 지으면서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 집은 100년 이상 써도 문제가 없을 것처럼 튼튼했습니다. 다른 한 명의 것은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속은 텅텅 빈 집을 지었습니다. 10년도 못 되어 쓰러질 것이 뻔했습니다. 집이 다 되었을 때 사장이 말했습니다. ‘이 집은 자네들에 대한 내 고마움의 선물이네, 여기서 오래오래 살게나.’라고 말입니다.
한 명은 겉뿐만이 아닌 마음까지 쏟아부었고, 다른 한 명은 겉치레만 하였으니 그 결과는 뻔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가진 돈을 모두 봉헌한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만 봉헌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정성을 봉헌했고, 자신의 앞으로의 삶을 봉헌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하느님 손에 맡긴 것입니다. 겉만 봉헌하는 모습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영혼도 봉헌하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보았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자기 삶의 시간과 재물, 이 모두를 봉헌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봉헌했으니,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더 좋은 삶을, 그리고 하늘나라를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우리가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그것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 말입니다.
저를 포함함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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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공포는…?
가장 큰 공포를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귀신? 전쟁? 굶주림?
가장 큰 공포는 ‘끝을 알 수 없을 때’라고 말합니다.
끝 모를 일들이 사람을 가장 공포스럽게 만든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끝을 알면 다른 것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면 끝 너머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끝을 모르면 희망할 수 없고, 꿈을 꿀 수 없는 것이지요.
혹시 지금 그대가 끝 모를 공포를 안고 있다면….
끝을 만들어주세요. 끝 모를 무언가에 잡혀 끌려가지 말고
스스로 끝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희망을 주세요.
이것만 넘어가면 끝난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어쩌면 공포의 반대말은 희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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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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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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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숨김없이
그대로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늘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기꺼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오롯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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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면서 봉헌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는가를 먼저 성서적 배경을 통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홀어미가 된(바룩 4,12-16) 불행의 전형적인 표상입니다(이사 47,9). 과부의 옷차림은(창세 38,14; 유딧 10,3) 두 가지 슬픔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재혼을 하지 않는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과 보호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아나 이방인처럼 과부는 법을 통해 특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탈출 22,20-23; 신명 14,28-29; 24,17-22).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예배에서 과부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조달해주고 있었음을 사도행전은 전해줍니다(사도 6,1). 만일 과부들이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로 지낼 경우 초대공동체는 신앙의 사명감을 갖고 참된 신앙심으로 과부들을 도와주었습니다(사도 9,36-39).
이러한 배경 위에 과부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신앙공동체로부터 영적, 물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더욱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부는 진정으로 마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왔고 십일조의 규정을 넘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헌금의 의미를 겸허히 성찰케 합니다. 헌금은 보통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체의 물적예물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예식 중에 봉헌하는 돈입니다. 이 봉헌금은 교회의 봉직자, 각종 단체들의 활동, 교회의 관리와 운영, 신앙교육, 가난하고 헐벗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 등에 씌여집니다.
봉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데 있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는 주님의 말씀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재물이나 시간 봉헌을 통해 참된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히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올 때 아까워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헌금을 봉헌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우리가 교회에 바치는 교무금이나 헌금은 단순히 교회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의 결과로 나오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신앙행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무금이나 헌금은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는 고귀하고 귀중한 삶의 결실의 선물이며 거저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거룩한 의무이며 사랑의 행위입니다.
물, 공기, 온갖 종류의 과일과 곡식 등은 우리가 거저 받은 직접 피부로 느끼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큰 그분의 무상의 선물은 감사와 기쁨과 행복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해 주시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을 깊이 인식하고 체험한 사람만이 복음에 나오는 과부처럼 받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온전히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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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란치아노(Lanciano)의 성변화 기적
아마도 750 년경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한 젊은 신부가 성 레곤찌아노(Legonzianano)에게 봉헌된 란치아노 성당에서 성찬식의 제물을 올리고 있었다 .
그가 축성할 때에 손에 들고 있던 한 조각의 빵이 실제로 신인(神人) 예수님의 살로 변하는지 또 성작에 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지에 대해 늘 애매한 의심이 그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그는 심한 놀라움에 사로잡혔고 영혼의 전율을 느꼈다. 즉 성반 위에 축성되어 놓여 있던 흰 성체가 그의 눈 앞에서 색깔이 변하기 시작하여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부풀어 올랐다.
금으로 된 작은 성반 위에 피묻은 살 한 점이 놓여 있었고 성작속에 든 붉은 피에 거품이 일었다. 신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었고 그 옛날 성 토마스(St. Thomas)가 한 말과 같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시여 ! " 라고 속삭였다. 그는 온 몸이 떨려서 더 이상 미사를 계속하여 끝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기적은 살이 담긴 성반과 성혈이 담긴 성작은 조심스레 보존되고 간직되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란치아노의 기적은 영원불변의 기적이다. 그 축성된 성체는 훼손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수백 년 동안 보존되어 남아 있다.
1970년에 란치아노의 대주교는 일단의 전문학자들에게 이 성스러운 유물에 대해 의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 연구결과는 다음의 첨부된 증거 기록 속에 있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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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강만연 베드로님.
과부의 헌금의 본질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05644&menu=4770 강만연 [fisherpeter] 2024-11-09 ㅣNo.177468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과부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부의 헌금 복음을 좀 이상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우리는 액수의 중요도를 따지기보다는 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식의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복음을 해석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복음은 철저히 예수님과 과부 사이에서 예수님이 과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설정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묵상할 때 흔히들 간과하는 부분이 우리의 시각에서 과부를 바라보고 자신의 입장을 과부의 입장에서 서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듯이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의 본질이 '정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까요?
저도 지금까지 13년 정도 가톨릭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본당 교우들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다가 대화 도중에 이 과부의 헌금을 예로 들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교우들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곡해를 해도 심한 곡해를 하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까운 입장입니다. 어쩌면 이 복음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경제와 관련된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베풀려고 해도 가진 게 없으면 베풀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가령 단순하고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천주교의 교무금을 납부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제가 빗대어 편의상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흔히들 수입의 몇 분의 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봤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 방법으로 교무금을 산출하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물론 한국 천주교 교회법에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명시적으로 이렇게 산출한다면 보이지 않는 차별이 전제됐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단순히 수입을 가지고 계산을 한다면 수입 이전에 가지고 있는 자산이 배제된다면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에게는 동등한 비율로 교무금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실상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 실제 액수는 적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교무금을 내는 형국과 같게 됩니다.
제가 봤을 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을 그런 맥락에서 보시고 해석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단적인 예가 다른 부유한 사람의 헌금을 표현할 때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 만큼'이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경제법칙에 대입해 보면 제가 조금 전에 해석한 방법이 전혀 틀린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소유지분의 가치를 보신 것이고 예수님을 제외한 사람은 그 액수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들여다봐야 실제 과부의 헌금 복음이 왜곡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이 복음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왜곡해 해석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해서 볼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과부의 헌금 복음을 묵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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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봉헌은 ‘많이’가 아닌, ‘정성’ /
박윤식 [big-llight] 2024-11-09 ㅣNo.177465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손수 선택한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서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지정된 날을 정해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이는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 사명을 깨닫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다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해서, 2017년부터 한 주 당겨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이르셨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신중히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는 매우 정성스럽게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것은 다른 이들보다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넣었지만, 그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다.”’
그리스도교는 많은 이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비움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시고, 죄와 죽음을 이겨 내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희망을 두는 종교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가난한 이만이 오로지 ‘하느님 나라’를 본단다.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믿는 대로 이를 실천하면 그분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이것은 분명 다 사실이리라. 그래서 궁핍한 가운데 생활비 모두를 헌금함에 넣는 과부 모습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매우 중요한지 가르치셨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게 생존의 문제라며 중요시 해온 이들은, 도덕 가치나 윤리 규범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가끔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도덕적으로 남에게 흠 없는 것처럼 보이고, 윗자리에 앉아 존경받으려는 위선적 삶이 곳곳에 드러난다.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결코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할 게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그분께 봉헌할 수 있는 것은 비단 돈만이 아닐 게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시간 등 우리가 마음만 먹고 잘 따져보면 봉헌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많다. 적게 가졌기 때문에 하느님께 드릴 것이 궁핍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예수님 시대의 저 율법학자마냥 솔직하지 못하고 가식에만 빠진 위선적인 궁핍 때문에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 마음까지 보시는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의 정직함을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신다.
가난을 돈으로만 논할 수는 없듯이, 시간 부족도 가난이다. 주일에 중요한 건 미사 참여로 이를 만사에 앞서 실천한다면, 이는 그분을 향한 대단한 봉헌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보신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어떤 ‘정성으로’ 하는지를 보신다. 돈을 내는 것만이 봉헌은 아니다. 한 주간 받은 감사의 고마움도 함께 바치면 그 봉헌은 값지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해 우리가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예수님의 선교 사명에 적극 참여하는 것 역시 참된 봉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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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연중 제32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였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뜻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봉헌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봉헌이 과부의 봉헌과 같게 되려면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도 자신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봉헌을 서약한 이들만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사명은 평신도를 포함한 온 교회의 책임이며, 온 교회 구성원이 헌신하고 봉헌하여 함께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새로운 교황님 한 분이 일으키시는 변화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앙인이 그 변화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한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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