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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문화재를 대할 때는 타개한 최순우 선생의 “나는 우리 것이 아름답다.”고 한 말이 자주 생각이 난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사랑하고 아껴줄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작은 글자에 쪽수가 많은 이 책을 다 읽을지 모르겠기에 출판사 서평을 우선 보면서 독후감으로 삼고자 한다.
「색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주인공은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이 책은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 두 분과의 귀한 만남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감상하기 위한 탐구서이자 안내서이다. 박물관 마니아이자 역사가인 황윤 작가는 오래도록 국립중앙박물관을 보는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으로 ‘금(金)’을 주제로 한 관람을 즐겨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주제로 책을 쓴다면 주인공은 당연히 금동반가사유상이라 생각했던 이유도 금 예술, 불교의 집약체가 바로 ‘사유의 방’에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만난다는 것이 단지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유의 방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4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담은 것은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일종의 준비자 예의다. 1300여 년 전에 등장한 반가사유상! 그리고 그것의 탄생을 위해 준비된 더 많은 시간을 추스르기에는 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지 모르나 ‘사유의 방’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관람자를 위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재밌고 뜻깊은 국립중앙박물관 여행을 위해 여러분을 초대한다. 사유의 방을 감상한다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체를 보는 것, ‘사유의 방’으로 가는 길은 직진이 될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오르내리며 돌고 돌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간은 학습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서부터 3층을 꼼꼼히 오가며 청동과 금의 흐름에서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간 힘의 이동, 그리고 반가사유상의 내면에 깃든 불교의 역사와 형식 등을 알아가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그 시작은 국립중앙박물관 1층 구석기·신석기 전시실에서 시작되어 청동기, 고조선, 고구려 전시실로 이어진다. 청동으로 제작된 몸체에 금을 칠해 완성 시킨 반가사유상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한반도 내 청동과 금의 흐름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동선을 무시하고 고구려에서 신라로 갔다가 다시 백제·가야로 넘어와 안내하는데, 고구려·백제·신라의 유물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삼국과 중국을 둘러싼 외교력과 힘의 이동, 기술력과 심미안 등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3층의 불교 조각 전시실과 인도·동남아 전시실, 중앙아시아 전시실을 넘나들며 불교의 전파, 불교 세계관에서 미륵보살의 의미, 국가 지배에 있어 불교의 역할, 불상의 디자인적인 측면 등, 불교 불상에 관한 가히 총망라된 정보를 풀어낸다.‘사유의 방’에서 우리는 두 점 금동반가사유상이 품은 서사의 깊이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는 고고학적 질문들
1. 같은 종류 국보들의 이름이 같아졌다
2021년 11월 19일을 기준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당시 순서대로 부여했던 지정 번호를 앞으로 표기하지 않도록 하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사유의 방’에 모셔진 두 반가사유상을 부르던 명칭 국보 78호와 국보 83호가 갑자기 사라짐으로 인해 둘 다 국보 반가사유상이 되고 말았다. 지정 번호가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닌 지정된 순서를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치 서열에 따른 순위로 오인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과감히 없애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 책에서는 정부의 지침에 맞추어 가능한 한 지정 번호를 언급 안 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탑형보관 반가사유상’으로, 기존의 83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삼산관 반가사유상’으로 부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SNS를 통해 애칭을 공모했으나 끝내 대상을 정하지 못할 정도로 최종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바 있는데, 우리 유물을 구분하고 친숙하게 부르는 개개의 이름을 갖도록 해결안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2. 고조선을 지나 낙랑 전시실에서 발견한 화려한 옥벽과 허리띠
옥벽 및 여러 옥기와 철로 만든 검과 장신구가 발굴된 석암리 9호분. 그중에서도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라 부르는 국보 금제 허리띠는 세세한 조각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용 장식이 엄청난 공력으로 완성한 것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짜임새 있게 보여주는 것인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출토된 금제 띠고리와 유사하다.
고구려에 의해 낙랑이 추출되고 낙랑인들은 중국으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고구려에 편입하거나 백제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백제 근초고왕은 낙랑 태수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고대 한반도에서 낙랑은 단순히 한나라 군현이라는 의미를 넘어 중국과 연결되는 문화적 다리 이미지로서 존속함으로써 결코 부정적 이이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낙랑을 쫓아낸 후 이미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하고, 백제와 신라 또한 그 변형된 이미지를 사용한 점 역시 한반도의 승리한 역사가 만들어낸 여유 아닐까? 이제 낙랑에 대한 그동안의 불편한 느낌을 일정 부분 지우고 낙랑을 한반도 역사의 흐름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 아닐까?
3. 출토 유물로 황남대총이 어느 왕과 왕비의 묘인지 추론 가능
황남대총의 신라 왕 무덤에서는 은관과 금동관 4개가, 황남대총의 왕비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왔다. 부부총인 황남대총 남분 즉 남성 묘에서 출토된 신라 유일의 은관은 고고학적 추론을 통해 이 묘가 어느 왕의 묘인지 추론이 가능하다. 북분인 왕비의 묘에서 출토된 금관이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녹각 디자인을 닮은 금관이기에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조성 사이에 신라에 대단한 정치적인 변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은관은 고구려의 성향이 강한 디자인으로 신라 왕이 사용했었고, 이는 곧 고구려의 입장과 기준에서 부여된 물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임을 보여준 것이다.
4.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 전시의 아쉬움
불교의 전래와 미륵 사상을 살피기 위해 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3층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 조각을 전시 중인 조각·공예관이 있다. 여기서 금동으로 만든 부처 조각을 통해 불교문화가 도입된 삼국 시대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중국, 일본, 인도 등 해외 유물을 전시한 세계문화관과 연계해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 분야 A급 문화재 수집이 잘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불교 조각 이야기를 할 때 한반도에 영향을 준 인도, 중국 불교조각을 직접 보면서 관찰해야 하는데, 인도전시실에 간다라 미술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지만, 놀랍게도 부처 조각이 없다. 그러니까 깨진 부위로 머리나 몸통, 또는 작은 조각에서 등장하는 부처 말고, 전체적인 디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큰 크기의 부처 조각이 없다. 큰 크기로는 오직 보살 조각만 3점 정도 있을 뿐이다. 보살이 중요하긴 하나 그래도 불교 조각의 꽃은 부처인데 완전한 형태의 A급 부처 조각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없다는 것은 큰 취약점이다.
중국 불교 조각도 마찬가지다. 중국 전시실에서 6세기 한반도 불상 디자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 조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7세기부터 통일신라까지 영향을 준 수나라, 당나라 불교 조각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왕가박물관이 수집한 작품 몇 개만 있을 뿐인데, 그나마 1~2개를 제외하면 중요 부분이 깨지거나 질이 높지 않아 불상 디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반대로 일본 불교 조각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전시를 관람함으로써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 속 한반도 역사를 머리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런 부분이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
세계사 속에서 한국 유물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한다. 이 부분이 충분히 채워져야 비로소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적 경쟁력이 생겨나고, 더 나아가 한반도에 국한된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세계관을 키워주는 교육 역시 가능할 것이다.
5. 서울에 집중된 국보와 보물 문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현재 2층 ‘사유의 방’에 전시 중인 각기 82cm, 93.5cm의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2점 외에도 20~30cm 정도 크기의 금동반가사유상을 여러 점 소장하여 전시 중이다. 문제는 이들 금동 반가사유상의 경우 한반도 전역에서 A급만 골라 모았기에, 서울과 달리 지방 박물관에서는 수준급 금동반가사유상을 거의 만나볼 수가 없다. 오죽하면 국립경주박물관에도 경주 성건동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을 포함하여 작은 크기의 금동 4점만 존재하며, 국립대구박물관에 15cm의 금동반가사유상이 2점 정도 있을 뿐이다. 즉, 유독 작거나 부서지거나 깨진 형태의 반가사유상만 지방에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주요 유물을 서울에 집중시킨 현 상황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전쟁 등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지면 동산 형태의 국보, 보물 중 60~70%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번 금동반가사유상의 예처럼 대부분의 A급 유물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먼 미래까지 안전하게 유물을 보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다. 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을 평화 시기에 미리 여러 지역에 배분해둠으로써 임·병 왜란으로 수도를 포함한 전 국토가 참화를 경험했음에도 그 역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단 전쟁이 아니라도 유물에 대한 개별 파손은 지금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2008년 국보 1호로 누구나 중요한 유적으로 여겼던 숭례문(남대문) 방화사건이 있었고, 해외 예로는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의 1911년 도난 사건, 2022년 30대 남성이 모나리자를 향해 케이크를 던진 테러 사건, 2011년 이집트 시위 과정에 국립박물관이 털려 투탕카멘 금박 목상이 사라져 아직도 찾지 못한 상태 등이다. 무조건 다양한 예방만이 최선의 노력일 뿐이다.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국보급 작품을 오직 우리 세대만 볼 것은 아니지 않은가? 1300여 년 전 작품을 볼 수 있는 우리처럼 1300년 뒤의 후손들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이상 출판사 서평)
구석기를 지나고 신석기, 청동기 그리고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 중에 어느 시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 나름대로 특징과 특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글자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집단생활과 농경생활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보다 문명이 크게 발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보여진다. 청동기 시대가 중요한 것은 금속을 사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금속이 녹는 비등점은 금이 1064℃, 은은 961℃, 동(구리) 1084℃, 주석이 합금 된 청동은 700∼900℃, 철이 1538℃다. 이집트의 투탕가멘 황금가면은 기원전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금세공 기술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1972년 불가리아의 항구도시 ‘바르나’ 유적에서는 기원전 4800∼4200년 전에 만들어진 황금 세공품이 대거 출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부싯돌을 정교하게 깎아 창과 칼 모양으로 만든 장신구, 토기와 옥으로 만든 장신구, 붉은 보석으로 만든 목걸이, 무기 모양의 도구 등이 그것인데, 이중 황금으로 된 것이 1.5㎏나 되었다고 한다. 양도 양이지만 목걸이, 팔찌, 옷과 모자 장식, 활 장식, 금싸게, 금장식 돌도끼 등이 그것이었다.
한반도에서 나온 최초의 금제품은 무엇일까?
국립중앙박물관의 구석기·신석기실을 지나면 〈낙랑 전시실〉이 있는데 여기에는 유물 45%가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둥근 형태의 옥벽(玉璧), 무기, 말 장신구, 청동그릇, 칠기, 토기 항아리, 청동거울 등이다. 옻칠을 한 그릇인 칠기에는 ‘거섭(居攝) 3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언제 제작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칠기는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고 하고, 거섭 3년은 중국 한나라 때 연호로 기원후 8년이다. 이로써 석암리 9호 무덤은 1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금으로 제작된, 한때 국호 89호로 지정됐던 ‘금제 띠고리’(平壤 石巖里 金製 鉸具)가 나왔는데, 띠고리는 버클을 말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이제 국보 제 몇 호라는 개념은 없어졌다. 2021년 11월 19일 국가지정문화재법에 의해 지정 당시 순서대로 부여하던 지정번호를 표기하지 않기로 시행령이 개정된 것이다. 따라서 국보 제1호 남대문(숭례문)이란 개념도 없어졌고, 제78호, 제83호 미륵반가사유상도 ‘탑형보관반가사유상’, ‘삼산관반가사유상’(확정된 이름은 아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금제품은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제 띠고리로 단순히 황금으로 만든 것을 넘어서 조각이 살아 있다. 상징적인 동물인 용이 가운데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 작은 용 6마리가 장식되어 있으며 푸른색 터키석과 용의 비늘처럼 작은 금붙이를 세세히 붙여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인다.(사진 참조) 석암리 9호분 주인공이 누구길래 이런 황금 허리띠를 사용했을까? 그의 일상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낙랑이 설치된 지 100년쯤 지난 1세기 초에(기원전 108년 한사군 설치) 이미 평양에는 중국 문맹의 영향력이 뿌리내리고 강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중국이 우리의 모델은 아니지만, 고대 중국 문화가 한반도로 건너왔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황금문화는 어땠을까? 1986년 중국 쓰촨성의 싼싱두이(三星堆)에서 투탕카멘을 떠올리게 하는 황금가면이 출토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기원전 1,000년쯤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것은 쓰촨성 독자 문명으로 보이지만, 기원전 316년에 쓰촨이 진나라에 정복된 후 중국 역사에 편입된 것을 보면 춘추시대 이전에 이미 황금을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황금 문화가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를 지나면서 황금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엄청난 무기로 탄생하게 되었다.
전국칠웅 중 진나라가 강대해지자 나머지 6국이 합종하기 위해 조나라에 모여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진나라 재상 응후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를 막도록 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개를 보십시오. 개는 자거나, 일어서거나, 걷거나, 서 있거나, 서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뼈다귀 하나를 던져 줘보십시오. 그러면 즉시 벌떡 일어나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립니다.”계책에 따라서 진나라는 당저라는 인물에게 황금 5,000근을 주어서 조나라 무안에 기거하게 하고는 매일 잔치를 벌여 사람들을 대접하도록 했다. 당저는 잔치를 베풀면서 “누가 와서 이 금을 차지할 것인가?”라며 뇌물을 뿌리니 어느 순간부터 조나라에 모인 6국 사람들은 황금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당저가 3,000근도 다 쓰기도 전에 합종책은 결렬되고 말았다고 한다. 『전국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전국시대 1근(斤)은 252.8g이었으므로 5,000근은 약 1.26톤이다. 이것이 현재가치로는 약 900억 원, 지금보다 황금이 귀했던 시대고 보면 더 많은 값으로 읽힌다. 그런데 한나라 때 국가 금고에 황금 60만 근이 있었다고 하니, 이것은 무려 151톤이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2021년 현재 10톤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위기 안전판을 위해 외환보유액의 10% 정도는 금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럴 경우 한국은 최소 1,000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겨우 외환보유액이 1%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독일·프랑스는 60% 수준이라는데도 말이다. 금은 오늘날도 여전히 국제적으로 화폐 기능을 가지는 있다.
고구려로 넘어가 본다. 고구려는 신라만큼 금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박물관에 가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그쪽을 발굴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구려관에 전시된 유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명한 청동 그릇인데, 거기에는 ‘을묘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이 죽은 지 3년째인 을묘년에 광개토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그릇으로 신라 사신이 광개토왕 제사에 참석하고 기념으로 받아온 것으로 짐작되는 이것은 경주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에서 만든 것이 신라에서 나왔으니 무슨 의미일까?
25년부터 220년까지 존속했던 후한은 부여와 달리 고구려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후한서》에 “그들의 공공 모임에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라고 했다. 미루어 고구려는 황금을 위세품으로 혹은 장식품으로 오래전부터 사용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물론 장수왕 때도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아부해야만 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황남대총에 묻힌 이가 왕이 되었을 무렵에는 고구려와 대립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힘을 갖추었다. 그 과정에 황금으로 위세를 떨치고, 그 위세를 지키려 했다. 황남대총은 부부총으로 남분이 남자, 북분이 여자인데 남분에는 금동관이, 북분에는 금관이 묻혀 있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남자인 왕이 먼저 죽자 금동관을 묻었고,(그것도 4개나) 나중에 부인인 왕비가 죽자 후손에 의해 금동관이 아닌 금관을 만들어 묻은 것으로 짐작된다.
황남대총에 묻힌 왕을 내물왕으로 보는 견해와 실성왕, 아니면 눌지왕 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내물왕은 392년 사촌 동생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면서 왜와 가야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고구려에 간청했다. 10여 년을 공들인 결과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군사 5만을 보내 그동안 신라를 괴롭히던 왜와 가야를 단번에 박살 내주었다. 이에 신라는 고마움을 왕이 직접 고구려로 올라가 조공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직접 가서 조공한 왕이 내물왕인가 아니면 인질로 잡혀갔었던 실성왕인가 하는 의문이 있으나, 릉비에 따르면 401∼404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기록된 만큼 402년 2월에 죽은 내물왕이라기보다는 인질에서 풀려나 왕이 된 실성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성은 고구려에 의해 왕이 되었으니,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성왕도 내물왕의 아들들, 즉 조카들과의 대립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에 의해 왕이 된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눌지가 반란할 것을 우려해 눌지를 죽이고자 했다. 《삼국사기》실성왕 편에는 “실성왕은 전 임금의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가 맞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를 만나 그의 행실이 착함을 보고 곧 창끝을 되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아 놓고 가 버렸다.”고 했다. 이렇게 언제든 신라왕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 고구려였다. 다만 고구려는 눌지의 동생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에 박제상이 사신의 예로 고구려로 가 “우리 임금(눌지)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임금은 형제가 어려울 때 도와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호의로써 대왕께서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다고 함에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라면서 장수왕에게 간청하자, 장수왕이 “승락한다”고 했다. 신라왕의 동생을 풀어줌으로써 신라왕이 충성할 것을 기대했고, 여러 가지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눌지왕은 이미 고구려에 의해 왕이 교체되는 상황을 겪었으므로 고구려에 의존하기보다는 현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백제와의 교류였고 그것이 나제동맹으로 이어졌다.
“봄 2월에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더니 가을 9월에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명주를 백제에 보내 답례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8년(434년) -
눌지왕은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아들인 자비왕부터 손자인 소지왕까지 3대가 세습하면서 고구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신라를 이룩한 내물왕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했다. 삼촌인 실성왕에 이어 왕이 된 눌지지만, 자신의 부인이 실성왕의 딸이고 아들인 자비왕 역시 실성왕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였다. 눌지왕은 실성왕의 사위이고 자비왕은 실성왕의 외손자였던 것이다.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연관계였다.
*광개토왕 명칭을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으로, 광개토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으로 부르고 있다. 대왕은 태왕보다 작은 의미이므로 태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서는 대왕으로 불렀지만….
그러면 황남대총은 누구의 무덤인지 대략 짐작이 된다. 황남대총 북분 즉, 왕비 묘에서는 고구려로부터 받은 유물이 상당수가 출토된 만큼 신라와 고구려 관계가 아직 덜 불편한 시점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기 시작한 450년 이전에 북분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417년에 죽은 실성왕에게 금동관과 은관이 묻었고, 대대적으로 무덤을 손질했다는 435년 이후에 죽은 왕비릉에 금관을 넣어 북분을 만든 것이다. 이는 눌지왕이 외할머니 실성왕의 부인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랜 비밀은 1970년 발굴조사 전까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황남대총=실성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황남대총의 주인이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등 다양한 주장이 있으므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부침과 결렬을 반복하는데, 백제의 황금문화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백제는 무령왕 때에 남조의 양나라 등과 교류하면서 금동 신발 등을 들여왔고, 그전에는 위세품으로 금동관을 지방의 고위층에게 내려주었다. 이것은 475년 한성 백제시기 이전의 일로 웅진백제(475∼538)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2009년 고창 봉덕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 신발은 화려함이 극치를 보인다. 또 2014년 나주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육각형의 틀 안에 다양한 동물을 새겼다. 백제 금동관과 금동 신발은 신라보다 더 다양하고 세밀한 문양이 새겨졌는데, 이것들은 5세기까지 한성백제 시기에 지방세력가에게 내려준 것이었다. 그러나 장수왕에 의해 한성백제가 무너지면서 왕족들이 사용하던 귀한 물건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경주에서 출토된 것과 백제의 지방에서 출토된 것만을 비교해도 백제의 금 세공품이 표현력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 가야실로 가보면 중앙박물관 가야실에는 철기에 관한 것이 47%, 47%는 가야토기, 나머지 6%가 금세공 관련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남자들은 애어른 가리지 않고 얼굴에 문신을 한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문신을 하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왜의 남자들은 반드시 문신을 했다는 것으로 가야가 일본과 가까워 그 문화가 있었다고 한 것이다. 철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문신은 일본에서 건너온 문화였다. 그러나 금관가야가 400년에 신라가 요청한 5만의 고구려군에 의해 힘을 잃었고 이를 대신해 성장한 것이 대가야였다. 632년에 망한 금관가야에 이어 30년간 소국들을 통합하고 일본, 중국과도 교류하다가 662년 백제, 신라의 압박으로 대가야가 사라졌다.
지산리 32호분 출토 가야 금동관
가야금관 - 도쿄박물관
신라, 백제와는 또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 가야 금동관은 가야만의 정치력을 보이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는 가야의 기록을 뺐지만, 《삼국유사》는 가야에 대해 일부나마 전한다. 가야실 금동관 옆에 가야금관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도쿄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복제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출토지역을 창녕이라고 하였으나, 국내 학자들은 고령일 것으로 추정한다. 비화가야였던 창녕일 수도 있다.
가야는 백제 압력을 받다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죽자 공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바뀌면서 독자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제 영향력에서 벗어나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치면서도 가야의 다른 소국들을 포섭했다. 이에 대가야는 금관, 금동관, 금귀걸이 등 세공품을 만들어 위계에 따라 위세품을 하사하였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고리자루 큰칼’(환두대도)였다. 이것은 시베리아 유목민에게서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디자인으로 과거 청동기 시대 요령식 동검이나 세형동검에 버금갈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고구려는 물론 신라, 백제, 가야 모두가 이 고리자루 큰칼을 만들고 사용했다. 5세기 후반에 이르자 고리 안에다 용과 봉황, 쌍용을 넣기도 했는데, 합천 옥전 고분에서 출토된 이것은 백제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것들로 모두 4점이 출토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1점, 김해박물관 1점, 경상대박물관에 2점을 보관하고 있다. 백제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금동관을 주었듯이, 대가야는 고리자루 큰칼을 주어 은혜를 알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밀리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 역사에서의 황금은 불교와도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석가모니 가르침으로 그의 사후 200년 뒤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왕이 인도를 통일하고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새로운 불교사상(대승불교)이 부각되면서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대승불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잠시 미룬 보살과 누구나 불성을 지니면 보살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 더해 인간과 모든 일체만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공(空)사상이 더해져 기존 불교와는 다른 사상적 구조를 만들었는데, 기원 전후부터 370년까지 인도를 통일한 쿠산왕조는 이란계 민족들이 그리스를 계승한 국가인데 알렉산드대왕이 동방 원정 때 인도에 남은 그리스인들이 세운 나라로 이들은 처음에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나 점차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경을 정리하면서 불교를 꽃피웠다.
그리스 문화는 오래전부터 신과 왕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이들은 석가모니를 조각으로 표현함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1세기 후반부터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쿠산왕조 때 간다라 미술이 꽃피게 되었고, 쿠산왕조는 비단길 가운데 페르시아와 중국 연결점에 위치했기에 불교의 상징인 불상+불경+불탑이 해당 루트를 따라서 승려들과 상인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래 된 것이었다. 후한을 지나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가 열리면서 불교사상과 서적이 한문으로 적극 번역되어 전파되기에 이르고,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 신라는 527년에 각각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이전의 토신을 제치고 대표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금동불상 중에 관심이 가는 것은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인데, 광배 뒷면에 명문이 있을 뿐 아니라 불상의 발견 경위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1963년 시골 돌더미 속에서 강갑순이란 시골 아낙에 의해 발견된 이것은 5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던 강여인에게 작은 부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금으로 집안의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이 불상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발견장소와의 관계도 재미있다. 명문에 “연가(延嘉) 7년 기미년에 고려국 낙랑동사(樂良東寺) 주지이자 불법을 공경하는 제자 연(演)을 비롯한 사제 40인이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는바 그 제29번째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 법영(法潁)이 공양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는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꾼 국명이며, 이때도 평양을 아직 낙랑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연호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1왕 1연호로 정착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며, 평양동사에서 만들었다고 한 것은 당연히 불교가 들어온 소수림왕 이후로 소수림왕 이후 기미년은 419년, 479년, 539년, 599년 중의 하나인데, 학계에서는 불상의 디자인으로 북위의 영향이 보인다면서 그 시기를 539년으로 보았다. 이럴 경우 고구려 안원왕 9년이며, 연가는 당연히 안원왕의 연호다.
고구려 승려들이 불상을 만들어 유포하겠다는 다짐으로 제작된 불상을 여러 지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경상남도 의령에 도착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1000개의 불상 중 29번째가 ‘연가 7년명’불상이라는 것인데, 나머지 999개는 한반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현겁이란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다음 개벽할 동안까지의 시간 단위인데, 現劫이 아니라 賢劫이라고 쓴 것도 주의해야 한다. 과거, 미래에도 겁이 있다는 의미로서 실제로 과거는 장업겁(莊嚴劫), 현재는 현겁(賢劫), 미래는 성수겁(星宿劫)으로 구분한다. 현겁은 당연히 우리가 사는 현재를 말하며 이때만도 1000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 미륵불도 현겁에 등장하는 부처이며 미래인 성수겁 부처가 아니다. 현겁에만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4분이 등장했고 다음에는 다름 아닌 미륵불이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기간이 짐작도 안 된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 부처로 인식하는 석가모니가 2500년 전에 활동하고 현겁의 4번째 부처이고 보면, 미륵불이 나타난 뒤 995명의 부처가 등장해야만 1000분의 부처, 즉 현겁의 천불이 채워지게 된다는 말이다. 무한에 가까우며 길고 멀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에 지금까지 궁예처럼 자신이 미륵이라고 주장한 이가 여럿 있었을 뿐, 여전히 미륵불은 등장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봐도 석가모니로부터 2500년, 다시 말해 다섯 번째가 지나고 앞으로도 24번이 남았다는 것이니 적어도 6만 년 뒤에라야 ‘인현의불’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000만 년 후 나타난다고 했으니 어쩌면 인현의불을 만날 수 있는 것도 6만 년 뒤가 아니라, 56억 7000만 년에 24를 꼽해야 할지 모른다. 상상하기 힘든 미래다. 그렇지만 인현의불에게 고구려 범영스님이 공양했으니, 1500년 전의 범영스님을 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것이라고 한다.
미륵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해 설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죄악의 종자와 모든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자비심을 닦아 미륵국토에 나도록 하자는 데 깊은 진의가 있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널리 신봉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미륵불이 282억 명을 대상으로 총 3회 설법함)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미륵불상을 조성하였고, 백제에서는 미륵삼존이 출현한 용화산 밑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으며, 신라에서는 진자(眞慈)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미륵불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으로 현신하여 출현할 것을 발원한 결과 미시(未尸)라는 화랑이 나타났다거나, 김유신(金庾信)이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부른 것은 모두 미륵신앙의 긍정적인 일면이다. 반면에 후삼국의 궁예(弓裔)는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칭 미륵불 행세를 하고, 고려 우왕 때는 이금(伊金)이 미륵불로 행세하면서 혹세무민하거나, 조선 숙종 때 승려 여환(呂還)이 미륵이라고 하면서 왕권을 넘보았던 일 등은 미륵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다.
중국에서는 5호 16국 당시 북위를 건국한 태조 탁발규를 높여 “태조는 당금의 여래다”라고 했다. 왕이 부처라는 의미다. 이런‘왕즉불’사상이 5세기 후반 윈강석굴(雲崗石窟)에 그대로 새겨졌고 부처 모습을 띤 황제 조각상이 만들졌던 것이다. 528년 신라 법흥왕이 도입하고자 한 불교도 바로 이것이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흥왕은 왜 불교를 도입하고자 했을까? 자신을 부처 재림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발달한 이것이 미륵 사상인 것이다. 인도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미륵 사상은 석가모니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태자 시절로 묘사되기도 한(다리를 꼬거나 포개고 앉은) 반가사유상은 6세기 초에는 미륵을 대표하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발전했는데, 6세기 후반에는 마치 주인공처럼 단독으로 조각되기도 했다. 이런 변화 과정은 중국의 분위기와 연결되었고, 우리 국보인 반가사유상도 거기에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미륵을 부처라고 하기도 혹은 보살로 표현하는 이유는 앞으로 미륵을 만날 장소가 죽은 후 도솔천이냐, 아니면 살아서 바로 이곳이냐에 따라 천국인 도솔천에 위치한 미륵은 보살로,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법회를 여는 미륵은 부처가 된다고 불경은 기록했다. 그래서 부처일 때는 머리에 육계를, 보살일 때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다.
다시 역사로 돌아가 고구려에 광개토태왕이 있다면 백제에 근초고왕이, 신라에는 진흥왕이 개척 군주로 자리매김한다. 우리 역사에서 내가 존경하는 인물은 진흥왕과 김유신이기도 한데, 진흥왕에 대해서는 ‘진흥에서 선덕까지’라고하여 이미 상세히 기술하였던 적이 있다. 진흥왕은 556년 첫째아들을 동륜으로, 둘째 아들은 사륜이라 이름 지었는데, 동륜은 전륜성왕 중에서 세 번째인 동륜왕을 말하고 동륜이 2개국을 다스린다고 해 이제 막 통합된 신라-가야 연합체를 이룬 것에 연결시킨다. 북제에서는 황제를 금륜이라 불렀으니 신라의 동륜도 나름대로 고민하여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동륜이 일찍 죽자 둘째인 사륜이 진지왕이 되었으나, 재위 4년째 음란 방자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 탄핵을 받아 축출되자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伯淨)이 진평왕이 되었다. 그전에 이미 진흥왕이 손자들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놀랍게도 백정은 석가모니 아버지 이름이고, 마야는 어머니 이름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석가모니 탄생과 같은 일이 신라 왕실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고 지었던 이름이다. 어쩌면 손자인 백정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혼할 짝도 약속되고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꿈꾼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시 사유의 방에 들어 반가사유상을 보자. ‘탑형보관반가사유상’은 경북 영주에서, ‘삼산관반가사유상’은 경주 남산의 삼불사지에서 발견되었다. 둘은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 사이에 제적된 것으로 추정되고 특히, 같은 삼산관을 쓰고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보관된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623년 신라에서 보냈다는 기록과 연결해보면 삼산관반가사유상은 거의 100% 신라의 것이다. 그러나 탑형보관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백제설, 신라설, 심지어 고구려설까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서산마애삼존불’에 견주기도 하나 백제설로 확정 짓기는 어렵다. 고구려설은 발견된 곳이 영주라는데 주목한 것으로, 551년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까지 영주지역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진흥왕이 미륵 사상을 구현하고자 한데 이어 백제 무왕도 미륵을 구현하고자 했다. 《삼국유사》에는 익산의 미륵사가 세워진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오직 미륵사 석탑만이 과거의 영광을 지키고 있으며 근래 복원되었는데 아직 가보지 못해 아쉽다. 거대한 1개 목탑과 2개의 석탑은 황룡사에 비견될 만한 어마어마한 사찰이었던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백제인들은 ‘미륵삼회’라는 불경을 통해서 용화산 아래 미륵사라는 절을 짓고 미륵 사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재는 용화산을 미륵산으로 고쳤다. 금마에서 훈련받을 때부터 여러 번 찾아가 보았지만 언제 다시 또 가보고 싶다. 23.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