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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빅토르 위고
빅토르 위고(1802년 ~ 1885년)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의 고급 장교이다. 어릴 때부터 문학가가 꿈이었다.
결혼 때도 처갓집이 가난하다고 아버지가 반대, 위고도 벌이가
없어서 처가살이를 했다.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1827년 희곡 《크롬웰 (Cromwell)》의 서문을 발표하면서 고전주의를 떠나 낭만주의 작가들을 선도했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에는 가두시위에 참가했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 (La Bataille d'Hernani. 또는 '에르나니 논쟁') 이 일어났다. 극장에서 낭만주의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1831 --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발표. 그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
1843년 이후 10여년 간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하였다.
1848년 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
1845 -- 레미제라블 집필 시작
1851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 생활에 접어들어야 했다.
1862년 레미제라블 발표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위고는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다. 카톨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톨릭과 화해하지 못한 위고는 교회의 기도마저 거부했다.
1885년 5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작품 세계
낭만주의는 1827년의 <크롬웰(Cromwell)>의 서문에 제시되었다. 위고는 여기서 시의 발전역사를 서술하여, 원시 시대를 서정시, 고대를 서사시, 중세 이후를 극의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주의의 연극은 근대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적 2원론에 의거하여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숭고함과 그로테스크 사이에 영원히 되풀이되는 대화를 극의 진수로 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완전한 예술양식이라 말한다.
위고는 민중예술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는 "예술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와서 민중에게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원칙이고 민중은 "예술이 도달해야 하는 종착점"이며 "예술과 연극은 민중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묻어 있다.
평가
위고의 83년 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을 향한 불 같은 정열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레미제라블
《레 미제라블》(프랑스어로 →비참한 사람들)은 1862년에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로, 잘 알려진 19세기 소설 중 하나다. 제목인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장발장》으로도 소개되었다.
소설은 1832년에 있었던 프랑스 6월 봉기를 소재로 하였다. 대혁명 이후 국민의회가 구성되었으나, 자본가 즉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서민에게는 돌아오는 혜택이 거의 없었다. 민중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사회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사회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실천적인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번역 소설에 소설의 초입부에 은촛대 이야기가 상징하는 의미로---)
줄거리
굶주리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의 박해를 받던 장 발장은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주고 자신이 훔친 은식기에 은촛대까지 선물로 준 미리엘 주교에게 감명받아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장 발장은 정체를 숨기고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시장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살던 중 팡틴과 마주친다. 죽음을 눈앞에 둔 팡틴은 자신의 딸 코제트를 장 발장에게 부탁한다. 자신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상마튜라는 사람이 장발장으로 재판정에 선다는 것을 알게 된 장발장은 크게 고민하다가 재판정을 찾아가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밝힌다.
이후 장발장은 다시 도형장에 끌려가지만 물에 빠진 선원을 구하고난 뒤 수영하여 탈출한다. 그 이후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혹사당하던 코제트를 구하고 입양하여 자신이 키우기 시작했다. 자베르의 눈을 피해 수도원에서 포슐르방 노인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가며 코제트를 키우다가 코제트에게 수도원 밖 삶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로 이사한다.
이후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코제트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한다. 장 발장은 처음엔 코제트를 뺏긴 것 같은 분노에 사로잡혔으나 결혼 이후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전과자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장 발장은 자신과 함께 있으면 코제트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코제트를 마리우스에게 맡기고 떠난다. 프랑스 6월 봉기 때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누구인지를 마리우스는 모르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장 발장을 찾았을 때 장 발장은 이미 코제트를 보지 못하는 슬픔에 죽어가고 있었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코제트와의 재회를 크게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삶을 마감한다.
*빅토르 위고를 냉정하게 보기
1) 대중성 확보와 낭만주의의 상업적 기능을 가장 잘 활용한 작가이다.
2) 나폴레옹 3세의 독재에 항거했다.(그는 공화주의자이다.)
3) 한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그 명성으로 다른 분야에 진출하여
성공한다.
(에밀 졸라. 장 뽈 사르트르, 버트란트 러셀, 촘스키 등의 선구자이다.)
4) 자기의 인기를 이용하여 수입을 극대화한 작가이다.
인기를 이용하여, 출판 이외의 수입을 올리는 행사를 한다.
5) 책이 잘 팔리자 – 원고료 등, 최대의 돈을 받아 챙긴다.
(문학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작가이다.)
6) 문학의 성공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작가라고 한다.
**레미제라블 다시 보기
등장인물은, 예수를 닮은 잔발장, 선량한 매춘부 팡틴, 그녀의 딸 이자 순수한 절세 미인인 코제트, 친절하고도 아량으로 충만한 낭만적 영웅 마리우스, 지옥에서 온 듯이 극악무도한 테라르디 부부, 영웅적이면서 꾀돌이 꼬마 가브로슈, 성자같은 미리엘 주교, 집요한 형사 자베르, 등등. 독자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인물을 내세워서 독자의 기대에 맞추어 준다.
수많은 곁가지 이야기(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펼친다. 그리고 줄거리 구성까지 꼭히 문학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요소들이 많다. 그래도 발표 이래로 꾸준히 베스트셀러이다.
레미제라블은 지루하게 느낄 만큼 장황한 이야기가 많다. 상식적으로는 이런 경우 독자들은 책을 놓는다. 그러나 위고는 호감이 가는 인물의 다음 행동을 유보함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장황하게 시간끌기도 유효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 문장 만들기, 단어의 선택도 독자를 의식한다.
위고는 이야기 만들기의 기술자이다.
2. 알렉산드르 뒤마(1802-1870)
프랑스의 소설가로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도 소설가이다. 작품들의 대부분이 프랑스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교묘한 줄거리와 풍부한 공상으로 엮어져 있다. 대표 작품으로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이 있다. 대중 작가라는 말도 듣는다,
뒤마의 할아버지는 포병으로 아이티에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흑인 혼혈 여인과 결혼했고, 빌레르 코트레로 돌아와 뒤마의 아버지인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를 낳았다. 도마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이끌던 부대는 "아메리카 연대"라 불렸다.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가난한 상태였다. 그는 뒤마가 4세이던 1806년 사망하였다.
가정 형편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뒤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명해졌다. 그의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명망으로 인해 귀족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1822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 뒤마는 파리로 가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루이 필리프의 루아얄 궁전 사무실에 취직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된 뒤마는 잡지에 극본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1829년 그의 첫 번째 단행본으로 출간된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의 성공으로 뒤마는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후 역사물을 발표하여 인기하면서 인기가 높았다.
1830년대 중반 프랑스는 산업화를 겪으며 빠르게 변했다. 작가들은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일파와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일파 등 폭 넓게 분포하였다. 출판에 대한 검열이 사라진 것도 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뒤마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뒤마는 시대 변화에 민감한 작가였다.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자 뒤마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언론 매체인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발표한 극본을 소설로 바꾸어서 발표하였다.
뒤마는 많은 작품을 출판하였고 그로 인한 수입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호화스런 생활과 여성 편력으로 종종 파산을 하곤 하였다.
그가 지지한 루이 필리프가 실권하고,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하자(제2제정) 뒤마도 몰락하였다.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한 뒤마는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뒤마는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덴테》의 발간을 주도하며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3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뒤마는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혼혈인이라는 정체성은 뒤마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뒤마는 1843년 발표한 그의 소설 《조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 아버지는 물라토였고 내 조부는 깜둥이였소. 내 증조부는 원숭이였지. 알겠소, 선생? 우리 가족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였소.
*많은 작품이 있지만,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트 백작만 소개 합니다.
1) 삼총사
뒤마가 1844년 3월부터 7월까지 신문 《세기》에 연재되었다. 총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 가스코뉴 출신의 하급 귀족 달타냥이 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를 만나 벌이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17세기 프랑스와 영국을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3세 외에도 왕비 안 도트리슈, 리슐리외 추기경, 버킹엄 공작, 슈브뢰즈 공작 부인(프랑스어판)등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은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르타냥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르타냥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후속작으로 1845년에 발표된 《20년 후》, 1848년에 발표된 《브라질론 자작》(철가면)이 있다.
제목
원제는 세 명의 총사라는 뜻이고 여기서 총사는 총(머스켓)으로 무장한 왕실 호위병을 뜻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총사들도 대부분은 칼을 잡고 싸우며 작품 속에는 머스킷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 소설을 삼총사로 번역한 이후 한국어 번역에서도 이를 따라서 같은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
줄거리는 워낙 유명해서 대강이나마 알고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철가면’은 삼총사의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다.(3편의 연작이다.)
삼총사가 은퇴하고, 루이 14세가 왕위에 올라 폭정을 저지른다. 쌍둥이 동생이 철가면을 쓰고 감옥에 갇혀있다.
은퇴한 아르미스와 포르토스가 감옥의 철가면과, 루이 14세를 바꿔치기 하는 과정에 루이 14세의 경호실장이 되어 있는 달타냥과 충돌한다.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 후, 쌍둥이 형제를 바꿔치기 하여, 감옥의 철가면은 왕으로, 루이 14세의 왕은 철가면을 쓰고 감옥으로 -------, 그런 내용이다.
2) 몬테크리스트 백작
뒤마가 43세 때인 1844년에 집필한 대하소설이다.
삼총사와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최고작 중 하나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고전으로, 현대 장르소설의 모든 복수물의 기원이 되는 작품이다.
그의 많은 여행과, 폭 넓은 독서력으로 형성된 경험이 소설의 구상의 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도 워낙 유명하여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이름, 에드몽 당테스는 알고 갑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특이한 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복수를 긍정하고 쿨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 대부분의 복수극이 도덕적 문제를 언급하거나 하며 찝찝하게 끝나는 데 비해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상쾌할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복수를 마무리한다.
19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일부 유럽 지역에서는 결투를 긍정하거나 개인적 복수를 당연시하는 풍조가 남아있을 정도였으니, 그런 게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근대 법률 체제에서는 자력구제(自力救濟)가 절대 금지이지만, 중국만 해도 아직 자력구제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살부지수(殺父之讐)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말이라든지, 중국의 무협 소설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보자.
그러나 현대의 모든 국가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한다. 국가가 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대신 복수를 해준다. 그러나 사회가 부패하여 법이 공정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은 사적인 복수를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판결을 법이 아닌 판사가 누군가에 따라 정해진다면 사적인 복수가 나타날 것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뒤마의 문학은 대표적인 대중문학이다. 역사 소설이지만 역사 왜곡을 서슴치 않는다. 모험적 요소가 들어 있고, 흥미 위주로 전개한다. 그리고 길다.(이때는 단어수에 따라 고료를 지불하였으믕로 작가는 이야기를 길게 늘였다.)
그의 소설은 공장 제품 같다는 평을 듣고, 문학작품으로서는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에는 고전으로 인정 받는다.
2002년에 죽은 지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무덤을 파서, 프랑스 양응들이 묻히는 파리 팡테옹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