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기원
고수들이 모금해 개설한 경성기원
요약 기원이 없을 때, 고수들이 바둑을 벌이는 공간은 주로 대가의 사랑채. 주인은 부유층이자 애기가.
고수들이 민영휘를 찾아가 별장 사랑채를 임대해 1930년 경성기원을 개설.
임대료는 월 25원. 고수들이 300원을 모금해 기원의 운영비로 사용하기로 함.
3년 정도 운영하다가 수송동으로 이전, 곧 문을 닫음.
경성기원
출처: 한국기원 바둑용어사전 - 경성기원
1930년에 문을 연 '경성기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기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만 해도 서로 여덟 점씩 미리 배치해놓은 다음 흑이 먼저 중앙에 두는 순장바둑이 널리 두어지고 있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은 그런 바둑에 더 잘 어울렸다.
고수들은 돈을 걸고 하는 이른바 내기바둑을 잘 두었다. 그런 판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들리면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그 일만을 하면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전문 바둑 도박꾼들이었다. 어떤 바둑 도박꾼은 똑같은 돌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제공하는 돌로만 해야 한다는 조건하에 내기바둑을 두기도 했다. 양식있는 고수들은 그런 사람들이 오면 자리를 떠버렸다.
이는 바둑을 두는 장소를 말할 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기원이 없을 때의 일들이다. 그때는 물론 지금과 같은 단위제도가 없을 때였기 때문에 고수들에 대한 호칭도 다양했다. 나라 안에서 최고라 하면 국수(國手)라 했고, 도에서 최고라 하면 도수(道手), 군에서 따를 자가 없으면 군수(郡手)라 했다. 그리고 그 임자는 도전자에 의해 수시로 바뀌었다.
그렇게 도전자와 대국이 벌어지는 장소는 대개 이름만 대도 금방 알 수 있는 대가의 사랑채였다. 그것은 그 집 주인이 부유층이며 무엇보다 애기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서울에서 그런 장소로 유명했던 집으로는 다방골 조판서 댁과 원서동 이지용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고수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애기가인 집주인이 배려를 해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 못할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하루 종일, 때로는 며칠씩 바둑을 두다 보니 여러 모로 폐가 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객이 많은 것은 그중에서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기원이었다. 임대료를 주고 수강생도 받자는 것이었다.
추진한 사람들은 당시 내로라 하던 고수들로서, 노사초를 비롯하여 채극문·유진하·정규춘 등이었다. 그들은 애기가로 유명했던 민영휘를 찾아가 그의 별장 사랑채를 임대하는 데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임대료는 월 25원. 쌀 한 가마 값이었다. 별장은 집이 크고, 방이 여러 개 있어서 바둑 두기에는 아주 좋았다.
이에 고수들은 3백 원을 모금하여 기원의 운영비로 사용하기로 하고 공식적으로 '경성기원'을 개설했다. 말하자면 그곳은 바둑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권위있는 도장이었고, 바둑깨나 둔다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기료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단, 배우러 오는 사람에 한해서 수강료 명목의 대국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내기바둑이 종종 열려서 한번 판이 벌어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계속되었다. 멀리 경상도·전라도에서 오는 고수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관전자들은 뒷돈을 댔다. 밤새 그렇게 내기바둑을 두고 새벽이면 청진동으로 몰려가 해장국을 먹곤 했다.
이때 관전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지방의 고수를 자처하고 나서는 사람들끼리의 대국이다. 예를 들면 충청도 국수라 자처하는 사람과 경상도 국수라 자처하는 사람이 자웅을 결정하기 위해 다투는 것이었다. 지방의 최고 고수들은 그렇게 도수나 면수라 해야 옳았지만, 자기가 곧 나라 안에서 최고라 하여 다른 지역의 고수에게 도전장을 내는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고수들을 찾아다녔으나, 서울에 기원이 생긴 후부터는 이곳에서 공식 시합을 가졌다. 그런 큰 대국이 열리는 날이면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아도 기원에 몰려와 돈을 걸고 관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였으나 당시 바둑에는 예법이 분명했다. 고수들 중엔 바둑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바둑돌 잡는 자세부터 가르치는 이도 있었다. 노사초가 국수일 때 2인자였던 채극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어느 부호의 초청을 받고 대국을 할 때 상대인 그 부호의 집석 자세가 좋지 않자 종일 바둑판만 내려보다 일어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경성기원'은 3년 정도 운영되다가 수송동으로 이전했는데,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기원 - 고수들이 모금해 개설한 경성기원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