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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끄시는 만남
행 10:23b-33
23b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23-33 / … 욥바에 있는 신도 몇 사람도 동행하였다. 24) 이튿날 그들이 가이사랴에 도착해 보니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25) 베드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26) 베드로가 그것을 만류하며 말하였다. `일어서시오. 나도 역시 사람이오.' 27) 고넬료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눈 다음 사람들이 모인 방으로 건너간 28)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내가 이렇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는 내게 어떤 사람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29)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부르러 보냈을 때 나는 거절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하셨습니까?' 30) 고넬료가 대답하였다. `나흘 전의 일입니다. 제가 이맘때쯤 오후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 앞에 눈부시게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31) 말하였습니다.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셨고 네 자선을 기억하고 계시다. 32)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바닷가에 사는 피혁공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여라.' 33) 그래서 제가 즉시 사람을 보냈던 것인데 선생님께서 잘 와주셨습니다. 지금 저희는 주님 앞에 앉아 주께서 선생님을 통해 저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유대인인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나기를 꺼려하지만 성령에 순종하여 가이사랴로 들어갔고, 이방인인 고넬료와 친척,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준비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베드로를 대하며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을 만나다(23b-29) 베드로와 함께 한 일행은 그 다음날 아침 출발해 둘째날 아침에 가이사랴로 들어갑니다. 이 시간까지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고넬료는 그의 발 앞에 엎드리어 예를 표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당시 지배국가인 유대인 베드로에게 엎드리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사람이라 말하며 일으켜 세우지만, 여전한 자신의 속내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직 이방인에 대한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온 것 조차도 큰 짐으로 여기고 있음을 고넬료에게 밝힙니다. 이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그를 향하신 성령님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0-33) 이런 마음의 짐을 지고 서 있는 베드로에게 고넬료는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의 명령을 이야기합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을 보냈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그 후 이어지는 고넬료의 고백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선, 고넬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단순히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 있다’, ‘흠모하며 있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고자하는 고넬료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입니다.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취사선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어찌하든지 모든 말씀을 다 들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도 동일합니다. 모든 말씀을 다 듣겠다는 신앙의 고백을 넘어 우리 모두가 순종하겠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 서 있는 나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적용: 당신 선입견을 넘어서 성령의 이끄심 앞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보며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당신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당신은 어떠한 태도로 서 있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연주가라도 충분한 연습이 이뤄지기 전에는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없습니다. 연주하다가 틀리게 되면 낭패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뿐만 아니라 신앙과 인생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된 자만이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을 우리의 복으로 바꾸는 비결입니다.
< 설 교 >
고넬료의 용기
행 10:23-29, 44-48 / 이윤재 목사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용기입니다. 이번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면서 메달 하나 하나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유도 선수 송대남 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90킬로 남자 결승에서 금메달을 땃는 데 현재 나이가 35살입니다. 35살이면 운동선수로서는 나이가 많은 데 그가 올림픽에 나온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그는 80킬로 선수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80킬로급에 이번에 금메달을 딴 김재범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 김재범 선수가 나오니까 송대남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선수로 평생을 꿈꿔어온 올림픽입니다. 그래서 체급을 10킬로 더 올렸습니다. 남들은 몸무게를 줄이며 운동하는 데 송대남은 몸무게를 늘리면서 까지 힘들게 운동했습니다. 결국 결승 종료 10초를 앞두고 뒤축감아치기로 금메달을 땃습니다(영상).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중 누가 쉽게 시상대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수없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이겨내고 거기 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입니다.
올림픽 이야기 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때 있었던 장면입니다. 4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데 150미터 지점에서 한 선수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함께 보실까요?(영상) 주인공의 이름은 데렉입니다. 그가 갑자기 허벅지 근육 파열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섰으니 그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였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뛰어넘는 용기, 그 용기가 그날 금메달 딴 선수보다 그에게 더 많은 박수를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주저 앉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고넬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일한 로마군 장교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인물 이야기를 다룹니다. 1-9장까지 베드로, 11-28장 바울입니다. 그 한 가운데 10장에 고넬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이전에 로마로 보내어 로마를 복음화하기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만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고넬료가 전도한 것입니다. 행10장은 그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 여기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함께 인간의 철저한 순종과 믿음이 따랐습니다. 한 마디로 용기가 따랐습니다. 용기는 두 사람에게 다 필요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필요했고 베드로에게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용기를 주십니까? 말씀을 통해 피곤하고 지친 이 여름에 하늘의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
고벨료에게 하나님이 먼저 주신 용기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지난 주에 본대로 고넬료는 로마의 군대장교였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조직의 기본인 100명을 다스린 장교로, 요즘 말로 하면 소대장입니다.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행10:2을 볼까요?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로마 장교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자신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온 식구와 함께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뿐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는 긍휼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사실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구제한 백성은 피정복국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는 구제하려고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구제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도 로마 장교로부터 구제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구제했습니다.
구제할 뿐만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그나마 항상 기도했습니다. 어쩌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어떤 교인이 “목사님, 은퇴하고 나니 남는 것이 시간밖에 없어요” 하고 열심히 교회 나옵니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아직 현역입니다. 그렇게 매일 새벽기도, 매주 심야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넬료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로마사람입니다. 로마사람은 로마정부의 지시를 받고 로마종교를 믿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공인입니다. 그가 혹 이스라엘 종교를 믿고 싶어도 남들 눈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 장교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돈이 나옵니까? 보너스가 나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계급이 올라갑니까? 살림살이가 나아집니까? 자신의 미래 성공을 무엇이 유익합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강요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많은 유대인도 로마장교에게 하나님 믿기를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강요해야 했다면 로마장교가 로마 종교를 믿으라고 유대인들에게 강요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믿음은 전혀 자발적인 것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고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철저히 믿은 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지만 “이왕 하나님 믿을 바에는 잘 믿어야겠다“ 그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첫 번째 용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억지로 믿기를 강요당하는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이것은 옳은 일이야”하며 결단하는 믿음입니다. 신앙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어쩌다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 믿어야 진짜임을 믿습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자라서 스스로 선택해야 함을 아십니까? 하나님믿는 것도 선택이지만 하나님 잘 믿는 것도 선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잘못 믿고 있다면 누가 내게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을 아십니까?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어도 이 시간 잘 믿기로 선택하면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성경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은 후 아담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가 하고 보았더니 선택하는 일입니다. 창2:15-17 사이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지으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창2: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선택할 기회를 주신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나무는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수없는 좋은 선택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님은 다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좋은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확률상 그렇게 되기도 어려웠습니다. 말하자면 사과상자에 수 백개의 사과가 있고 그 중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었는 데 하필 그 많은 사과중에 썩은 사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수많은 좋은 선택의 은혜앞에 한 가지 안 좋은 것을 선택한 아담, 그래서 아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은 선택의 책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가난과 운명주의와 패배주의가 그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 정탐꾼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숨겨 주어야 하느냐? 신고해야 하느냐? 그는 숨겨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은 정탐꾼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수2:11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아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는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나온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자 하나님도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유대인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그 몸에서 보아스가 태어나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이스라엘 왕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부모님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했습니까? 아내가 가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입니까? 스스로 온 것입니까? 선택의 원리가 세 가지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수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아를 섬기겠노라“. 첫째 예배할 자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종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중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며 현재만 우리 시간입니다.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 가족과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나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나와 내 가족이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그 용기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엎드리는 용기
고넬료는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누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청하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래서 세 사람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래서 종들은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약 60킬로를 밤새워 걸었습니다. 그리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하고 그를 모시고 다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는지 보겠습니다. 23절에서 25절입니다. 행10:23-25,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여러분,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기이하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온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볼 때 대단하지만 사실 로마입장에서 보면 피식민지의 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의 장교와 지중해변의 작은 나라의 종교인이 어찌 같겠습니까? 더구나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 아닙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그가 가진 자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자세를 보십시오. 온 일가 친척을 다 모으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것도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신앙은 목마름입니다. 생수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홍수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넘쳐납니다. 문제는 내가 목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은 물보다 목마름입니다. 기다리자 드디어 베드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참 대단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33절입니다. 행9: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 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속에 고넬료가 베드로에 대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간증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나마 보세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고넬료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한 모든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고넬료는 취사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말씀만을 듣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 자기 입맛에 맞는 말, 자기 교리와 신학에 맞는 말말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증거된 모든 말씀이 주님이 명하신 말씀이기만 하면 무슨 말씀도 듣겠습니다”. “취사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위로의 말씀이든 책망의 말씀이든 잘했다는 말씀이든 못했다는 말씀이든 다 듣겠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자,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거기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선택해야 하는 데 거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안 자라는 이유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면 “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앞에 복종하십니까? 하면 “글쎄요”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더 서글픈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했습니까? 세상 권력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한 것은 베드로의 인격이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신학에서는 되는 데 개신교에서는 잘 안됩니다. 물론 개신교 신학에서 목회자는 신자와 하나님사이의 중보자가 아닙니다. 중보자는 예수님이요 목회자는 조력자입니다. 그러나 신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말씀하는 한 목회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개인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했듯이 신자들은 늘 그 마음으로 목회자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을 잃습니다. 묻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말씀앞에 복종하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함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
지금까지는 고넬료에게 필요한 신앙의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필요한 용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하나님께 나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해 로마로 갔던 은혜의 배후에는 베드로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고넬료 혼자 잘 해서 잘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우선 욥바의 무두장이의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즈음 욥바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여제자 도르가를 살려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자 하나님이 또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가라”. 사실 집을 옮기는 일은 베드로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집이 무두장이 집이라는 것입니다. 무두장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가족제조공입니다. 양이나 소의 사체에서 가죽을 벗겨 그 가족을 염색하고 말려 구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깨름칙했지만 순종해서 그 집을 찾아갑니다. 그 집에 며칠 머무는 데 어느날 하나님의 명령이 또 임합니다. “베드로야, 지붕으로 올라가 기도하라”. 유대인 지붕은 물건을 올려 놓고나 가끔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한 낮에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행10:9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기도하러 올라간 시간은 제6시입니다. 제6시는 우리 시간으로 12시, 정오입니다. 하루중 가장 더울 때입니다.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무리한 순종을 계속 요구합니다. 한참 기도하는 데 보자기 하나가 내려옵니다. 무엇인가 보았더니 벌레가 우굴거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잡아 먹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쉴새없이 베드로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베드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예수님 영접하고 로마로 가서 사도 바울이 오기 전 전도했던 위대한 사건의 배후에는 베드로 사도의 눈물겨운 순종이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고넬료 한 사람의 믿음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선택하는 용기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언어가 주로 “하라”보다는 “하지 말라”에 있는 줄 알고 하지 않을 것을 안하면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 했는 데도 매 순간 “가라”는 말을 또 듣기 바라며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기드온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가 처들어오자 기드온을 부릅니다. 삿6:12, “큰 용사여, 여호아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런데 기도온은 이 말을 “가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표를 구합니다. 처음에는 바위에 무교병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영을 기도온에게 부어줍니다. 삿6:34, “여호아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도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아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그렇다면 기드온은 떠나야 합니다. 그라나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 데도 기드온은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저를 부르셨다면 땅위에 양털을 놓아둘테니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게 하시고 다음 날은 반대로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하여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기드온은 그때 시간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셨는 데 우리는 여전히 안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를 기드온처럼 불러 미디안과 싸우라 부르시고 성령을 부어주셨건만 우리는 “하나님, 정말 제가 맞아요? 저보고 전도하라고요? 차마 저는 아니시겠지요? 저는 약하고 부족하잖아요? 만일 저를 전도자로 불렀다면 제가 잘 때 천사 셋이 나타나 제 이름을 크게 불러 주세요” 이런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도 기도온이 안가고 짬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드디어 큰소리로 말씀합니다. 삿6:14절입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다같이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영적 생활의 초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명령한 것을 또 다시 묻지 마십시오. 또 다시 물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기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라“.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는 기도하면 되지 기도해야 하느냐고 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하라“. 용서는 용서하면 되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라“. 사랑은 사랑하면 되지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라“, 전도는 전도하면 되지 전도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드온의 기도요 시간낭비 기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이미 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가려는 도피처나 안 하여는 핑계나 게으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선포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사실 기도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기도가 순종의 방해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사랑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기도하면 전도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게 합니다.
“아이든의 모험”이란 책이 있습니다. 행동의 중요성, 순종의 아름다움을 끼닫게 닫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험을 떠나는 아이든이 여행이 시작되는 곳에서 자신과 함께 서 있는 메이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두려워요". "무엇이 두려운가?" 메이븐이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이 여행이 두렵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채워졌나요?" 메이븐은 그를 엄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그를 야단쳤다. "남아 있는 것은 다 안전하지는 않아. 너를 지켜주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야.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가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너무 구부정한 자세로 있지 마세요.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 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할까요? 묻지 마세요. 이미 명령은 떨어졌습니다. 사랑할까요? 더 이상 기도하며 사랑을 지체하는 일을 하지 마세요. 사랑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 미디안에게로. 내가 이미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에게 명령이 이미 떨어졌습니다.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시간에 너무 오래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가 행동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베드로처럼 순종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 / 김창헌 목사
대만의 한 청년이 어떤 처녀를 열정적으로 짝사랑했답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짝사랑을 하는 처녀에게 편지만 줄기차게 보냈는데 2년 동안 무려700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네스북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러브레터 사상 세계 최고의 기록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 청년은 그 처녀와 결혼을 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그 편지를 받은 처녀가 누구와 결혼한 지 아십니까? 편지를 전한 우편배달부와 결혼했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감정이 충만하고 매일 그 마음을 글로 전한다 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이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시작 되었지만 그 편지를 전해주려고 본의 아니게 매일 만났던 우편배달부와 정이 들었고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리학에서 하는 말 가운데<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이 존크]라는 사람이 사용한 개념인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사람을 자주 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는 가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특히 사람이란 자주 보면 정이 들고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배달부와 결혼한 처녀의 이야기가 이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는<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도 합니다. 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탑이 세워지기 전 건립계획과 설계도가 발표되었을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은 탑 건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시인[베들렌]은 흉측한 에펠탑이 보기도 싫다면서 에펠탑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모파상]은 몽소 공원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이 에펠탑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세워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또한 에펠탑 철거를 위한<300인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 에펠탑은 천박한 흉물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파리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 있는 구조물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가만히 보면 파리의 시민들이 눈만 뜨면 장대한 탑을 보아야 했고 보다 보니 정이 들고 점점 에펠탑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부른답니다.
이 효과를 가장 잘 이용하고 하고 있는 현대의 분야가 바로 광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 같은 광고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보거나 듣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따라하게 되고 그 물건을 선호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지요. 희한하게도 15초의 짧은 시간이지만 갓 난 아기들도 텔레비전에 광고가 나오면 주목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반응을 갖게 됩니다. 혹시 내가 살아가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먼저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인간관계에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낯설거나 하나님이 어색하다면 이거는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봅니다. 만남도 여러 가지입니다. 만나서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하는 속담이 있는데“천생연분에 보리 개떡”이라합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도 다 제 짝이 있어 보리 개떡을 먹을망정 의좋게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래보나 저래보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만났습니다.‘어떻게 저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되었을까?’싶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야 말씀입니다만 우리교회에도 제가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란 부부가 몇 쌍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니까‘역시 저 두 사람은 잘 만났구나.’싶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제가 세상적인 눈으로 봤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밖에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차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 잘 어울리는 부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저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싶은 분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저 평범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면으로만 봤더니 세상에 안 어울리는 어색했던 부부가 영적인 눈으로, 신앙적인 눈으로, 믿음 안에서 봤더니 세상에 더 없는 아름다운 부부로 보이는 신비가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더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만남도 귀한 만남이 되고 의미 있는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참으로 어색한 두 사람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쩌면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니 일생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사람들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군인인데 지금 이 유대 땅에 와있습니다. 무슨 상황입니까? 로마가 유대를 점령했고[고넬료]는 점령군의 백부장장교로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배를 받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점령군 장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안 만났으면 좋겠고 제발 없어졌으면 좋을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베드로]라고 하는 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이자 평민입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고넬료]와[베드로]는 비교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종교적 우월감이란 게 있었습니다. 비록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어렵지만 종교적으로는 이방사람을 멸시할 만큼 우월감을 가졌습니다.‘비록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너 같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종교적 우월감이 꽉차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오늘 본문에 만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지만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 사람이 가진 몇 가지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는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로마사람인[고넬료]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행10:1절부터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절입니다.“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랬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정치적 우월감이나 교만을 다 버리고 피점령국가의 종교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공통적이요,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지만 시간을 정하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영으로 통하고 기도를 통하여 만나는 겁니다. 이것을 영적인 교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만나게 해주십니다. 보세요. 이 두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둘 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만나서 지시를 받습니다.[고넬료]에게는“욥바라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라”고 지시하셨고,[베드로]에게는“두 사람이 너를 데리러 오거든 아무소리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지시합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기도응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상황이라면 베드로가 로마사람의 집에, 더구나 로마군인집에 들어가서 숙식한다는 것은 생활풍습과 전통에 따라서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고넬료]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로 볼 때 무엇이 아쉬워서 베드로 같이 촌티 나는 어부를 자기 집에다가 부르겠습니까? 자기 체면이 있는데...그러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합니다. 이[고넬료]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굉장히 체면 따지거든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식 같다고 생각하면서 순종 잘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면이 깎인다나요.. 왜 순종하는 것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만 하여간 그렇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본문25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넙죽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인간 베드로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모습니다. 베드로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엎드린 고넬료를 얼른 일으키면서“나도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것이<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옳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고 응답 받은 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전에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선 안 될 사람들도 만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만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적 인격이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으로 살고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비록 사람에게 듣고 있어도 하나님께 듣는다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기도응답을 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인격이 신앙적 인격입니다. 손에 쥐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평범한 수준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잡지 못하는 것을 잡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을 너무 추상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고넬료]의 신앙은 구체화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니다. 지금은 이론적으로만 충분히 습득해 놓고 나중에, 나이 많아서 체면이 좀 수그러들면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뭘 해야 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내가 할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사람이 정말 고민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구체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복 받을 사람
오정호 목사
신앙(信仰)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신앙의 입문단계는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은 과연 일하고 계시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세 번째 단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둡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고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목적을 주시고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발견되어 쓰임 받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며 마음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삶을 살피십니다(사도행전 10:4b).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사도행전 10:4b).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10:2).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上達)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도들의 삶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요한계시록 5:8, 8:3).
우리가 적어도 끈기 있게 기도의 자리에 있으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될 때 외부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계속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축복중 하나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불변의 확신을 가지게 될때 주님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독백(monolog)이 아니라 대화(dialog)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수준이 독백에서 대화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갖고 계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말씀을 통해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원리를 찾아보겠습니다.
①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가지시고 들으십니다(시편 116:1,2).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편 116:1,2).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인자하시며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적 존재이시며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의 눈물어린 기도를 들으십니다.
동물세계는 기도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인데도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은 동물적인 차원에서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만이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상통(相通/fellowship)할 수 있습니다. 평생 기도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지수와 기도지수는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과 삶의 모습을 주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②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시편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편 143:1).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기도하는 당사자를 기억하시고 복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법칙입니다.
고넬료의 삶의 특징은 기도가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구제로 나타납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서만 머무르게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이 공유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다른 사람과 나누어지게 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축복된 기도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이 응답을 온 가족들, 이웃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구제가 같이 갔습니다(사도행전 10:2). 기도는 사랑의 표현으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하시어 복음 사역을 이루십니다(24-26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서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복음과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영적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여전히 봉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세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2).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며 높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남들에게 존경받고 대접받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높였는지는 베드로를 향한 태도와 일가친척을 함께 모아놓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태어난 이 땅의 영적 존재라면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인생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책임지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b).
② 하나님은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25-26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5-26절). 고넬료는 점령군의 지휘관입니다. 베드로는 피식민지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고넬료는 그의 자존감보다 은혜받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훨씬 컸습니다. 계급장이 은혜 받는 데 장애물이 되면 떼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는 것은 단순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깨어진 사람’이란 자아가 파손되어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고백을 받아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7). 교만과 겸손을 오해해선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이고 주님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법을 주장하며 따라야 합니다.
③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아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는 우리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을 우리는 독점할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은 확대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가족들에게 친지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고넬료가 체험했던 하나님을 그 회중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내려오는 성령강림을 체험했습니다(44절). 복에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확산시키려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올 한 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하나님 앞에 발견되어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간구와 기도에 늘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축복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삽시다. 하나님을 늘 사모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유통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 앞에 늘 쓰임 받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됩시다.
말씀을 듣고자 / 이필재 목사
유대 나라가 로마의 침략을 받아 식민이라고 하는 어두운 역사를 보내고 있을 때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 지방은 로마 군인의 주둔 지역이었습니다. 만약에 경우 있을지도 모르는 유대인의 반란을 감시하고 무력으로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 마련된 로마 군인의 주둔지역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 가운데 백부장으로 꽤 계급이 높은 고넬료라는 사람이 유대 나라에 와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경건하고 기도생활도 아주 열심히 했던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제 구시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시간으로 생활했고 또 유대나라 식민지 백성들 중 어려운 사람을 보면 구제 활동을 로마 장교로서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큰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서 베드로를 너희 집에 심방 오게 하라.” 그래서 급히 부하를 시켜서 천사가 시킨 대로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따리 하나가 내려왔는데 열어보니 우글우글하게 짐승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들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먹지 않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잡아먹으라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런 부정한 동물을 내가 먹은 일이 없나이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대화가 벌어졌습니다. 환상에서 깬 베드로가 ‘이건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밖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와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자기를 청하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때야 자기가 본 환상의 뜻을 깨닫게 되어서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고넬료 집으로 심방 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만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신앙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만약 이 법을 어기고 난 다음에 내게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환상을 주셔서 내가 이렇게 왔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잖아요? 유대 사람들의 이런 문화 때문에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변 나라 국가들이나 세계인의 미움을 사게 된 그들만의 독특한 배타 신앙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도 교제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안 들어가는 삭개오 집에 왜 선지자가 들어가느냐고 막 성토하잖아요?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 그 여인이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 같은 유대 남자와 우리는 말을 안 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왜 나한테 말을 거나이까?” 말을 안 하게 되어 있는 신앙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와 베드로는 절대 만나면 안 됩니다. 그런 관계인 것을 피차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라 해서 왔고 오라고 해서 온 겁니다. 하나님이 중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만나게 하셨는가?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 민족을 벗어나 최초로 이방 세계로 전도 되어지는 역사적 포인트가 바로 여기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전해야 할 전도 대상을 자기 민족 혈통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보따리 안에 가득한 그 더러운 짐승들은 베드로 마음속에도 이방 사람들은 전도할 가치도 없는 짐승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주셔서 “내가 깨끗하게 했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고넬료의 집안이 모두 모여 베드로를 극진히 모셔 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이것이 이유가 됩니다. 그 집 식구들이 이 말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어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그 집에 심방 가서 설교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20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설교 마친 다음에 자신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뭐라고 자기가 말합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종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받으신 줄을 깨달았도다.”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에 놀라니 자기 자신이 놀라고 세계관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 자리에서 성령을 받고 베드로에게 다 같이 세례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으로서 즉, 이방 세계 최초의 세례인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거기서부터 생겨졌습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교훈으로 삼을 것은 말씀을 사모했던 고넬료 집안의 신앙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만들어 가시는데 반드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전하여지도록 하셨습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국고를 맡은 국가적 인물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그에게 가서 설교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깨닫고 길가에서 자신에게 세례를 달라고, 예수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례를 받고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자가 된 것이 에디오피아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 되었잖아요?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넬료가 이방 사람으로는 최초로 역사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일은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심으로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예수 믿게 할 것인가?’ 걱정부터 하지 말고 전하기만 하면 그 다음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을 받는 고넬료 집안의 모습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 말씀의 전달자가 올 것을 믿고 고넬료는 즉시 일가친척 친구들을 다 자기 집으로 모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심방의 역사적 시초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자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설교를 하고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성경에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우 감동적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토록 사모했고 원했던 것을 직접 만났을 때입니다. 갈보리교회에 미술가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미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한 폭의 값진 그림을 만났을 때는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취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볼 때 별로 잘 그린 거 같지 않은데, 저 정도라면 누구든지 다 그릴 수 있을만한 그림인데….’ 그런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미술의 가치를 아는 분들은 그런 그림을 하나 만나면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수십억 원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거기에 계신 목사님이 “목사님은 파리에서 뭘 제일 보고 싶으세요?” 그러셔서 “밀레가 만종을 그렸던 밭이 있다던데….” “그럼요. 멀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갔습니다. 지금도 밭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밭모퉁이에 밀레가 그린 만종 그림이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 여기서 밀레가 이 그림을 그렸구나.’ 그러면 밀레네 집에 가서 그가 그린 작품을 구경하고 저도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격적인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카네기 홀에서 세계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한번 참석하는 것이 평생소원입니다. 세계적 음악의 대가들이 모여 한번 구경하면 평생소원이 이루어진 듯 합니다. 마음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격해 하는 것 아닙니까?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 3대 테너가 공연할 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표를 사서 워싱턴에서부터 와서 평석에 앉아서 관람했습니다. 저도 그날 무지 가고 싶었지만 표를 살 수가 있어야지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대가가 부르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감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의 설교 한편을 듣기를 그렇게 희망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우리 집에 와서 설교 한번 해주셨으면….’ 그걸 아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해주시는 겁니다. 환상을 통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이루어주십니다. 위법이지만 만나게 하신 겁니다. 여기 보세요. 베드로가 문 앞에 들어서니까 고넬료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볼 때는 자기 국민, 즉 식민지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만 빼버리면 갈릴리 어부 출신에 무식한 소시민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식민지 백성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그분을 모시는 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베드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집에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그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지금 고넬료의 눈에는 베드로가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발 앞에 엎드린 겁니다. 얼마나 황송스럽게 엎드렸으면 베드로가 너무나 무안해 잡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라.” 사람같이 안보고 있는 겁니다. 밭이 준비된 상태입니다. 씨만 뿌리면 당장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듯 한 그런 자세와 호기심, 열려진 마음의 자세로 지금 심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우리 다 세례 주세요.” 그 자리에서 로마인 최초의 세례인이 되는 영광이 그 집에 주어지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보면 또 다른 백부장 한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은 길바닥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내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나이다.” “그러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아니요.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의 권위로 나을 겁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되었잖아요? 제 목회의 경험인데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가장 잘 듣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임종할 때입니다. 그때는 거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고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멘, 아멘” 다 그럽니다. 안 그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 한 편을 듣고 죽어도 좋다는 그런 심정으로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다윗의 사생활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훌륭한가? 다윗에게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그렇게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보다 더 달다고 말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을 사모하는데 열심입니다. 어느 날 성전 초막 끝에 참새가 집을 지은 것을 보고 그 참새를 부러워하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복이 많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사느냐?”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기를 그렇게 희망했었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을 볼 때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감탄사를 발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변함없는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디 여행 가실 때 성경책은 가지고 다니십시오. 성경책 한 장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저녁에 한 장 읽는 것으로 하루를 닫아보세요. 한번 해보세요. 읽는데 한 5~8분 정도면 됩니다. 그렇게 어렵습니까? “나는 예수는 믿지만 성경책은 한 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하시는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그들은 지금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33절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이 오신 것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사람입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당나귀를 타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겉옷이 자신의 인격을 말해주는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벗어 당나귀가 걸을 때마다 발 앞에 갖다 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나귀가 그것을 부드럽게 밟고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당나귀 위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가는 짐승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 아닙니까? 말씀의 귀중함에 대해 성경 몇 군데를 기억해 봅시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 후에 주리신지라.” 떡이 극도로 필요했던 그 순간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
성령의 역사는 언제 가장 크게 임하셨는가? 두 가지입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말씀을 들을 때 가장 강력했습니다. 초대교회가 하루에 3천 명씩 세례 받고 성령 받았다고 했는데, 무엇을 그렇게 했는가? 베드로가 설교한 후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예배 시간은 빠지지 마세요. 다른 시간 조금 줄이세요. 우리 갈보리교회는 프로그램을 많이 계발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 중심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수요 예배가 되었든 새벽 예배가 되었든 주일 예배가 되었든 내 생활에서 이것만은 열심히 참석하세요. 그러면 신앙생활이 풍성하고 변함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들은 자 중에 믿는 자의 수가 많으니 남자가 5천이라.”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기독교 역사가 언제 쇠퇴했는가? 사도들이 설교를 소홀히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 “예배 모범 가운데 50퍼센트를 설교 시간에 배정하자.”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잖아요? 만약 “갈보리교회 교우 여러분! 설교 듣지 지루하죠? 다음 주일부터 설교 시간 빼겠습니다. 찬송 한 장 부르고 각자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이야! 예배 시간 짧아진다! 좋다.’ 그런다면 일 년 안가서 이 교회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보세요. 미국 공립학교에서 “아침기도 하라. 그리고 경건회 하라.”고 했습니다. 법적으로 부모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아이는 예수 안 믿는데 강제성이냐?” 막 투쟁하고 데모하고 그래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아침 기도 없애자. 경건의 시간 없애자.” 어떻게 됐습니까? 미국 학교에 마귀가 들어가서 학생이 선생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기 동료를 수십 명씩 쏴 죽이는데 그게 무슨 학교입니까? 말씀이 끊어지면 그때부터 마귀가 말합니다. “내 말 들어!”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아침 기도 빨리 부활시켜라. 학교에서 경건회 빨리 부활시켜라! 왜 그만두느냐? 하나님 말씀을 접어두면 마귀가 그때부터 말한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느냐?” 세상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경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설교와 함께 성령이 내려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에 큰 문제가 생기죠? 교회가 혼란해지고 헬라파, 히브리파가 싸워 교회가 갈라지거나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왜 그렇게 교회가 되었는가? 베드로가 말하지요? 이것은 우리 사도들이 잘못했습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로 일삼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요.” 설교를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설교 듣던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의 설교를 듣고 만족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는 예수님처럼 해야지 저렇게 설교를 못하고….” 그러니까 “에이! 귀찮다.” 설교를 안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들어와서 교회를 파산지경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힘 있게 설교를 하니까 그때부터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틴 루터가 “교회가 무엇인가? 말씀의 집이다. 교인들은 왜 교회에 와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저와 아주 친한 사람 가운데 한명에게 성경책 한권 사다가 그 사람 몰래 책꽂이에 꽂아놨습니다. 그냥 꽂아놨더니 살아 역사합니다. 그 집이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 갈보리교회만큼 교인이 많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교회에서 성경 제일 많이 읽은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고 싶으면 성경책을 그냥 한권 주세요. “이거 책이야. 가져!” 살아있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주잖아요? “이거 가지고 살아라. 틀림없어. 잘 지키고 살아.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왜?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접하세요. 읽으세요. 그러면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어떤 일이 되는가? 고넬료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 혈통을 벗어난 사람 가운데 최초로 세례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관문 역할을 했고 베드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로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전도했는데 오늘 로마는 세계 교회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중앙에 베드로 성당이라는 말씀의 집을 온 세계인의 관심 가운데 세워서 지금 영원하게 되었으며 그는 죽어서도 그 말씀의 집 지하 성당 복판에 그 시신이 지금까지 묻혀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당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가까이 하세요. 말씀과 함께 승리하세요. 이것은 어떤 것도 이기는 능력과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을 소중히 생각하시고 말씀을 잘 들으시고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그래서 모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저희들에게 하늘의 음성을 말씀으로 들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말씀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배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가 약속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