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2
7월8일[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qa1lN4HzEU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주세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異蹟) 사화 혹은 기적 사화 30편은 크게 네 가지 사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치유이적사화, 악령을 추방하는 구마이적사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사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이적사화 4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 즉 치유이적사화와 소생이적사화가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사화들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 강조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가장 1차적인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를 이행하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치유대상자인 환자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치유되면 고맙고 되지 않아도 괜찮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는 강한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치유 대상자 사이의 교감과 공감입니다.
치유사화와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 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
<(2)우리는 절망하지만 주님은 희망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조차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장례식때 등장하는 피리부는 이들까지 등장한 것을 봐서,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되찾은 회당장 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딸 역시 사경을 헤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술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 완전히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완전하신 주님만이 소생시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그 날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워했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 의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더 이상 병고도, 죽음도 없는 삶, 불사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희망을 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 당당히 맞서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MAtJ88IWro
++++++++++++++++++
<바람과 희망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믿음은 하느님 능력을 말해줍니다. “당신은 손만 대면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는 하느님 능력은 물론이요,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능력자시요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음과 희망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희망과 바람을 착각합니다. 희망은 믿음이고 바람은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바람으로 구원되지는 못하지만, 희망으로는 구원에 이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김형규 씨가 담배꽁초 20만 개로 실물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금연 캠페인을
하였습니다. 담배꽁초 수집에만 2달, 분류하는 것만 2주가 걸려 거의 3달에 걸친 작업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가보니 면역체계가 무너졌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함께 작업한 30명 대동소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중의 흡연자가 15명이었는데 모두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15명 모두 다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희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원했던 것일까요? 인간적인 바람으로는 얻어지는 게 없습니다. 희망은 믿음과 함께하기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고 끝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유학 다녀와서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여러 병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이저로 붉게 된 얼굴을 짖었습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한약도 먹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으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계면활성제에 대한 일부 의사의 소견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10년째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때 시도해 보았더니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죽은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면,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거야!’란 생각 안에 ‘방법’과 멈추지 않게 하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성녀 요셉피나 바키타는 어렸을 때 납치되어 매일 매를 안 맞는 날이 없는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쇠사슬에 묶여 900킬로를 걸어서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때리고 그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아이는 자연을 만드신 분을 찾고 싶었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이 주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매달려 이탈리아로 넘어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수단으로 보내지려 할 때 그녀는 이탈리아 법정에까지 나아가 그들과 싸우며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겸손하고 온화하고 위로하는 수녀님으로 47년을 삽니다. 그녀는 자기 삶에 관해 쓴 책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삶입니다. 희망하는 삶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선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연옥의 한순간의 고통은 지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연옥에 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은 찾습니다. 연옥에 안 가게 하는 유일한 기도가 있습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원하기는 하지만, 희망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을 찾고 꾸준할 수 있어야 기적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희망이 단순한 바람과 다른 점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사제 모임 중에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을 하는 것은 보람이지만, 강론을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교구장님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을 대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대신 ‘주님’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에 대한 개념입니다. 미국에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아직 온전히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취업에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갈 수는 있지만 재입국이 거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시간의 특징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구원은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시간 경과를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의 긴장과 역동 속에 십자가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에 박제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생한 현실이며 오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하느님의 나라를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마지막 때를 사는 지금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사제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2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은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하혈하던 여인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하느님의 나라를 체신현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일어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나서신 길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담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예수님께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신 ‘계획 밖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기적은 그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절망적인 순간이 닥칠 때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께 의지하며 내미는 우리 믿음의 손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찾는 믿음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여야 할 때 그분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보다는 자신의 인맥과 능력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상처와 아픔 앞에서 그분께 믿음으로 다가가기보다 분노하고 성을 냅니다.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그리고 그분께 믿음의 손을 내밉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비록 그분의 계획 밖에 있거나, 죽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손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은총을 일으키는 힘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멘.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권한’이란, 무엇인가를 할 권한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살여탈권’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한입니다. 병을 고쳐 주거나 고쳐 주지 않거나,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지 않거나,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그 권한이 없다면, 주님이 아닙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여자의 병이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자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그 여자의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의 원인은, 또는 기적을 일으킨 힘은, 바로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언제나 항상,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는 말씀을 하셨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말씀의 뜻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로 오해하면,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변질됩니다.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또 병이 들어서 누워 있는 병자에게 가서, “너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너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꾸짖는 말이나 하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3) 불치병에 걸려도 믿음만 있으면 그 병이 낫고, 죽어가던 사람도 믿음만 있으면 살아나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ㄴ-9ㄴ)
바오로 사도는 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일으키는 어떤 병에 걸려서 평생 고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그 병의 치유를 주님께 간청했는데,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외에도, 평생 병고를 겪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성인 성녀들이 많습니다. <병이 낫지 않아서 고생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성인 성녀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질병을 앓는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이 우리의 실제 현실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라고 말합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또는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간절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모든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결과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되,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에 맡기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해도.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액자처럼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 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믿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조차도 넘어섭니다.
=====================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께서 ……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손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입니다. 간절함과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기에 그렇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열두 해’가 그 손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듯(에제 47,9 참조), 예수님의 손이 닿은 소녀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이 보입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창세 1,31 참조) 새로운 창조가 오늘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하고, 회당장의 간절함과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겸손과 용기의 손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만지고, 하느님의 손이 내 삶에 닿아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청해 봅시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9,22)
음악 하는 사람들은 연주하는 이의 신들린 연주를 보면, ‘저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연주가가 자신이 연주한 곡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단순히 소리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연주자에게서 나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오래전 방영한 ‘슈퍼 밴드’라는 프로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재능과 열정에 놀라면서 가끔 그들의 연주를 보고 들을 때 정말이지 단지 소리가 아닌 음악을 듣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저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믿음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실체라고 봅니다. 믿음의 목적지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특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교리나 신조를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 곧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참된 믿음의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왔다는 이야기는 한시적 기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앓아왔고 혈루증으로 죽을 수도 있었던 불행한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5,25-26)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녀의 질병과 그에 따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해보지 않은 치료법이 없고, 만나보지 않은 의사가 없을 만큼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시간도 재산도 가족도 다 잃어버린 그야말로 쪽박 신세였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가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절망만이 남아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그녀만이 처한 상황일까요? 키에르게고르가 표현했듯 그녀의 절망처럼 모든 인간은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고,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상황입니다. 곧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 수 있으며,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절망의 끝은 결국 희망의 시작으로 이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군중을 뚫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9,21)하고 만졌던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낫겠지 라고 하지 않고 구원받겠지,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해 주셨다, 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만남으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이 생명이신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그녀만이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분을 온전히 믿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일을 느끼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라고요? 믿음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전부 드리고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인격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녀가 한 행동 옷에 손을 대다. 만지다, 는 행위가 곧 믿음이 요구하는 전적인 내맡김의 다른 표현이며, 그 옷을 만짐으로, 만져진 존재와 만지는 존재 사이의 소통과 교류 그리고 친교의 표현으로 느끼며,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묵상해 봅니다. 우리 역시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을 만집시다. 나는 오늘 누구를 만짐으로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 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34,9)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교에 들어가서 힘든 시간은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규칙적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익숙하지 않았고, 특히 시험 기간 중에 긴 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무조건 규칙적인 생활이라 시험이라고 해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기도하기란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적 독서를 하다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이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제단을 어디든 세울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하느라, 또 학교 일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핑계였습니다. 제가 있는 모든 장소가 기도할 수 있는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걸을 때, 시장에 있을 때,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일할 때, 공부할 때, 집안일을 할 때…. 그 모든 장소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쁘다고, 어렵고 힘들다고 아예 기도를 내려놓았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과 얼마나 소통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치유를 받으려면 손을 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도 딸의 죽음을 알리면서, 예수님께 손을 얹어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총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서거나 무릎꿇지 않고 누워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발이 차꼬에 묶여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셨을까요? 그는 비록 누워있었지만 뜨겁게 기도했기에, 그의 기도는 감옥을 흔들었고 땅을 요동치게 했으며, 간수와 그의 모든 가족을 참된 신앙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할 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었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자기 상황이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주님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나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지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굴하지 않는 믿음, 창피함도 이겨내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실 수 있지만 준비된 마음 안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은 우리의 텅 빈 마음입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도 정성으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으로 경탄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비웃을 것이며 구경거리로 삼고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믿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의 승리를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마태오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믿음>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당신께서 내게
오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내게
오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갈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보아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나를
보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을
볼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내게
말씀하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내게
말씀하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잡아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나를
잡아주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손 내밀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남의 신비, 믿음의 여정, 치유의 여정>
“믿음이 답이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 1,10)
새벽 휴게실에 들어서는 순간 책상 위 책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축성생활자와 성직자에게 주신 말씀 모음집인 “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세요1”라는, 참 멋진 제목이었습니다. 더불어 전 교황청 대사였던 성염 대사의 교황님에 대한 소감도 생각났습니다.
“내가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하면 그는 나의 눈을 쳐다보며 경청하고 공감하는 공감능력자였다. 교회와 신도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같이 고민해 온 개방적인 분이다.”
과연 ‘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는 ‘만남의 대가’, ‘믿음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책에 대한 추천사중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짧은 언급에도 공감했습니다.
“자신의 뜻만 앞세우는 사례가 넘쳐 장상과 형제, 형제와 형제 서로 간의 충돌로 수도자들의 공동생활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공동생활은 중요합니다. 현대세계에서는 뛰어난 한 개인의 카리스마보다 사람 사이에서 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묵묵히 믿음으로 사람 사이에서 잘 살아가는 지혜로운 이가 성인입니다. 공감합니다만 교황님과 같은 뛰어난 믿음의 카리스마를 지닌 종교 지도자들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삶의 기초입니다. 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믿음의 반석위에 지어지는 견고한 인생집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믿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눈앞의 것을 좇느라 원대한 계획을 잊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꾸준함이다.”<다산>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공동생활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 제방향으로 더불어 가는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서두르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좇으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논어>
믿음의 지혜요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옛 어른의 말씀들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자리하고 있는 만남의 신비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우리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요 기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만남의 기도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믿음의 모범입니다.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간절한 기도가, 믿음이, 열망이 있어 주님을 만난 회당장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로 회당장의 철석같은 믿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믿음에 응답하여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십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과 함께하는 믿음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이어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믿음도 빛납니다. 믿음의 갈망이 주님을 찾아 만나게 했고,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며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과 만남으로 온전히 치유받은 믿음의 여자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이른 예수님은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비웃는 믿음없는 이들을 내 쫓으신 다음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는 곧장 일어납니다. 아버지 회당장의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살아난 소녀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으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회당장 딸입니다.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와 회당장의 딸은 생명의 주님을 만나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새삼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이요 거룩함이 온전함임을 깨닫습니다.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치유받을 때 거룩한 온전함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만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광야 믿음의 여정중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며 은혜롭겠습니다. 그날이 오늘입니다.
“그날에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당신 백성을 한결같은 사랑의 대상인 아내처럼 생각한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만남이 깊어지면서 주님을 참으로 알게 될 것이고 이런 주님을 닮을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요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거룩한 삶’이 될 것입니다. 새삼 믿음의 여정은 한결같은 기도를 통한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를 날로 주님을 닮아,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 145,8-9)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를 수 있도록>
메시아 콤플렉스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일종의 과대망상으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기에 세상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나서야 한다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제게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도와줘야 한다거나 도와주는 정도를 넘어서 내가 해결해주거나 구해줘야 한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북한 인민을 굶주림에서 구해주고, 북한 인민들도 하느님을 믿게 해줘야겠다는, 그래서 하루에 1,500이 먹을 수 있는 식당과 종합 복지관을 감히 평양에 짓겠다는 엄두도 내고 실행에 옮기게 하였지요.
그런데 겸손과 사랑과 만나면 이것이 순기능을 하지만 교만과 욕심과 만나면 과대망상 수준이 되곤 하였지요.
그러다가 제게 메시아 콤플렉스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하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잘못을 범한 경험과 반성이 반복되면서, 그리고 나이 먹어가며 힘이 달리면서 좀 나아졌던 거지요.
그런데 요즘 와서 다시 중요한 책임들을 맡으면서
이 병이 다시 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자각을 근자에 했는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정신 차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인은 주님께 믿음이 장하다고 칭찬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그의 영혼과 마음이 시편 51편의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라고 할 때의 그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과 영혼을 복음의 여인은 가진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오늘 감히 주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다가가서도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겨우 옷자락에만 손을 댑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술에 손을 대었다.”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주님 앞에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나서는 저와 비교해 조심스럽게 주님께 뒤로 다가가 겨우 옷자락에만 손을 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과 달리 그의 믿음은 누구보다 크고 강합니다.
어느 정도로 크고 강하냐 하면 주님의 옷자락만 자기에게 닿아도 초강력 진공청소기처럼 주님의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기세입니다.
그런가 봅니다. 영혼과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일수록 믿음은 더 커지고 더 강력해지나 봅니다.
그래서일까 어제 바오로 서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리고 복음의 여인은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응답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메시아 콤플렉스의 저처럼 내가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고, 복음의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한없이 나의 약점을 자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9,18)
<다가가는 믿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9,18-26)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치유사화는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에서 함께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한 회당장의 어린 딸을 다시 살리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회당장의 믿음과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자의 믿음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가가는 믿음!'
예수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게 된 회당장과 여자의 믿음은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믿음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으로 여기며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여자도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9,21)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내가 먼저 다가가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먼저 다가가고,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제들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청하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 제가 내일 큰 수술을 합니다.
제 어머니가 많이 아프십니다."
예수님과 신부님께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되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비로우신 주님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ㄴ)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2quCDM09gWg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소중한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단연코
용기입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아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믿음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듯이
용기없이 믿음으로
결코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향해야
할 곳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이고 믿음은 용기로
충만해지고 용기는
치유라는 구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믿음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없은 믿음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나약한
우리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용기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용기와 믿음
치유와 구원은
뗄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