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목단꽃에 아버지의 웃음이 배어 있다. 방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얼른 일어나 분합문을 열었다. 활짝 핀 목단꽃이 걱정되어서다. 심술궂은 빗줄기가 부귀와 영화를 꿈꾸며 하늘거리는 탐스러운 꽃송이의 낙화를 서두르니 얄궂기만 하다. 우리 집 뜰의 목단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릴 줄 아는 장년의 나이가 되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매년 오뉴월이면 만개하여 집안에 길한 기운을 서리게 한다. 낡은 한옥의 안뜰에 붉은 꽃이 하나 가득 만발하여 집안을 화사하게 밝혀줄 때 나의 모든 시름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모란꽃이 만발하면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히 피어난다. 층층시하에 생소한 농촌살이가 힘겨워도 가풍이 넉넉한 가문으로 시집을 온 듯하여 뿌듯하였다.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모란꽃은 함박웃음으로 피어 난 자줏빛 꽃송이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촉촉함과 씩씩한 기상이 넘쳐났다. 어서 오라는 듯이 수줍은 새댁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친정과 시집의 문화차이로 모든 사물이 낯설어 넓은 황야에 홀로 서 있는 듯 외로울 때면, 목단꽃은 자상한 친정아버지의 웃음으로 다가와 나의 마음을 토닥여 주는 듯했다. 내 어릴 때의 기억이다. 잠에 취해 눈이 게슴치레하고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근질근질하여 잠을 못 이루면 아버지의 까칠까칠하고 큰 손바닥으로 나의 좁은 등을 쓸어주셨다. 그때마다 방안의 천장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무늬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잠이 들곤 하였다. 아침이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다락으로 통하는 벽장문에 그려진 민화와 자개장에 새겨진 풍만한 모란꽃을 좋아하였다. 오지랍이 넓은 아낙네처럼 소탈한 목단꽃은 행운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아 어린 마음에 희망의 꽃으로 피어났었다. 그림에서나 보았던 꽃이 푸른 오월이면 내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마당에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 봄의 향연을 연출하니 천하를 얻은 듯 흐뭇하다. 봄이면 목단은 앙증맞은 가지마다 잎이 발그레한 싸리버섯처럼 삐죽삐죽 싹을 틔우고 있다가 어느새 꽃봉오리를 맺는다. 모란꽃이 만발할 때면 달빛 어린 밤에 소쩍새 울음이 더욱 구슬프던 사연은 무엇일까.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꽃은 하고 많은 색깔 중에 하필이면 빨간 바탕에 푸른 멍을 씌어 자주빛을 담아낼까.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간 넋의 환생일까.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목단꽃으로 다가가 살며시 얼굴을 대어 본다.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려는 듯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속삭인다. 한줌의 달콤한 향도 뿜어 내지 못하는 무언의 몸짓에서 우주를 달관한 군자의 체취가 배어난다. 하염없이 모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말씀이 적으시고 소박하며 겸허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의 성품을 느끼게 한다. 목단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때면 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 시름 다 잊으시고 신선놀음 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때는 아버지가 우울해 계시면 기분을 맞추어 드리려고, 엉뚱하게 우리 조상님 중에 어떤 분이 가장 훌륭하셨느냐고 여쭙고는 했다. 그때마다 즐거워하시며 채마공이라 하셨다. 권력과 세력 다툼에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피정하셔 나물만 캐어 자시던, 학처럼 고매한 분이라고 이르시며 허탈한 심경을 내보이기도 하셨다. 녹두장군 어른의 이야기도 곁들이셨다. 소담스러운 꽃이 지고 달걀모양의 열매가 맺혀 주머니 속에 둥글고 검은 씨앗을 품어낼 때면 하늘과 바다보다도 넓은 아버지의 자애를 느낀다. 자식들을 위하여 일신의 호사를 마다하시고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던 애끓는 정이 지천명의 중반을 넘어서야 가슴에 사무친다. 내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투정을 부릴 때면 모진 마음먹지 말라고 이르시던 친정아버지의 말씀에서 세상을 물 흐르듯 살아내신 과묵하시고 거울처럼 맑은 품성이 묻어난다. 아버지께서 끔찍이 여기시던 상고머리 남동생은 의젓하게 자라서 만화로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데 알고 계실까. 제 아비의 재능을 타고 난 손자가 개울에 잠긴 돌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대견함에 아버지의 너털웃음이 춘풍의 저고리 춤에 너울거리는 목단꽃으로 다가오시는 듯하다. 회양목 위로 우수수 떨어진 목단꽃잎을 한 장 한 장 주워 담는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가족들을 위하여 애쓰시다 유언도 할 사이 없이 바쁘게 구름 따라 가신 아버지. 뜨락에 서서 바람결에 고개를 흔드는 목단꽃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미소를 찾는다. 풍성한 목단꽃은 오늘이 지나면 명년 이맘때나 보게 되리라. 나는 딸아이 방에 목단꽃잎 바구니를 갖다 놓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딸아이에게 목단꽃을 그려 달래야겠다. 싱그러운 목단꽃 향기를 맡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을 담아 함박웃음을 잃지 않는 영원히 살아 숨쉬는 목단꽃이 되게 말이다.
첫댓글 목단꽃잎을 한 장 한 장 주워 담는다. 목단꽃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담겨있는글 잘 읽었습니다. 꽃속에서 아버지를 찾아내시는 선생님의 예지를 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아침...풍성하게 드리운 목단꽃에 방울방울 맺힌 이슬도 상상하고 짙은 립스틱을 연상도 하며 목단꽃 정취에 흠뻑 취하여서 감동으로 읽고 갑니다 교수님. 그리움과 서정이 흐르는글 소개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목단꽃에서 아버지의 모습으 담아내신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니 돌아가신 내 아버지 생각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막내를 안타까워 하신 아버지 오늘따라 무척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