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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영남일보 DB> |
1945년 8월15일 정오.
폭염이 내려 쌓이는
대구시 북성로 2가의 낡은 인쇄소 안에서
한응렬(당시 조선상공신문 경북지사장)은
동료기자들과 함께 진공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문이 흘러나왔다.
옥음(玉音)방송이라고 불리는
일왕의 목소리는 잡음이 심해서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정오 이후 두 번이나 경성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전국의 모든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고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분37초간 일왕의 항복 방송
의도적 잡음 넣어 못알아 듣게
항복선언문엔 항복·반성·용서
그 어떤 단어도 들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지금도 계속
일본과 동아시아 역사갈등 불러
◆반성과 용서없는 항복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임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게 하였다. …중략…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 차해에 미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종래에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결국에는 인류의 멸망까지도 파각하게 될 것이다. …중략…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하게 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어라.”
8월15일 정오와 오후 2시 도쿄방송국에서 4분37초간 일본과 한국, 동아시아 일대로 번져나간 옥음방송은 의도적으로 잡음을 심하게 넣은 악음(惡音)방송이었다.
대동아전쟁종결조서로 불리는 일왕의 항복선언문 어디에도 항복이라는 단어도,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과 용서를 청하는 어떤 단어도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일왕의 역사인식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적 갈등은 물론 반성과 성찰을 기피하는 일본정부의 군국주의적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궁핍과 이념과잉의 시대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은 미 군정아래에서 불행히도 민간인의 신분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은 9월9일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항복할 때까지 여전히 조선의 총독으로 행세했다. 조선총독부 중앙회의실에서 아베가 미 24군단 존 하지 중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는 내려갔지만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갔다. 남한에서 미 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은 9월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으로 발효되었다.
비로소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조선 땅에는 갑작스럽게 광복의 시간이 찾아왔다. 광복 직전, 수많은 지식인이 일제의 학도병 동원 연설에 나서고 일왕에 충성하고 일군의 대열에 합류하는 변절행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춘원 이광수의 말을 빌리면, 친일변절행위는 도무지 조국광복이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깊은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처럼 백마를 타고 초인이 찾아온 것이고, 그 초인의 이름은 광복이었으며, 그것은 조국과 이역만리에서 생애를 바친 독립투사들의 희생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것을 통탄해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한국의 전체 인민은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고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인 광복군으로 대일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남북한 단일정부를 바라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등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 무정부주의등 광복 이후 50여개의 정당이 난립한 대한민국호는 궁핍과 이념과잉,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대충돌 속으로 빠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불행과 논쟁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
광복 이후 지금까지 가장 큰 논쟁의 핵심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문제였다.
정부 수립후 건국헌법 제 101조에 따라 19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이 통과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방해로 좌절되고,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반민법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하는 법률이 공포되어 반민법으로 실형이 선고된 자들은 석방이 되고 몰수한 재산도 모두 반환되어버리고 만다. 유야무야되어버린 이 불행한 친일논쟁은 반세기도 더 지난 2004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해 1천6명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재산을 환수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마무리됐지만, 이미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광복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삼천리 강산에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모든 불행과 논쟁과 의미의 씨앗이 뿌려진 인내의 시간들이었다.
광복 70주년, 영남일보 창간 70주년, 분단 70주년, 유엔 70주년의 해. 조국의 광복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해온 역사의 인물들은 고결하지도 않고 지식도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무지렁이처럼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바쳐온 한국인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겠는가 싶다.
북성로 인쇄소서 ‘광복둥이’영남일보 태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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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창간호.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11일, 한응렬 등 13명의 동인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영남일보는 지역의 최초의 순수민간지로 주목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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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는 1946년 7월 5일 처음으로 ‘거리의 여론’이라는 난을 마련해 해방 이후 먹을 것 없고 돈없고 일없어 도적이 널 밖에 없는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