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생각들 하기를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반대하는 사고방식을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나왔다라고들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에는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데 중립외교를 반대하는 이유가 물론 사대주의적 가치관에서 주장하는 관료들도 있지만 그와는 다른 시각에서 반대를 주장하는 관료들도 분명 존재했다라고 봅니다.
사대주의가 아니더라도 당시에 명나라가 무너질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쉽게 가능했슬지?
청나라는 그저 만주의 도적떼같은 존재로 본다면 대륙의 명나라를 어떻게 정복이나 한다는 것인지 당시로써는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슬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적떼같은 청나라에 타협해야 할 이유가 있슬까라는 시각도 팽배했슬것이 분명합니다.
구태여 당파세력들별도 구분한다면 서인이 명에 대한 사대를 내세웠다면 정인홍등 대북세력이 후자에 속할것입니다.
대북의 거두인 정인홍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하면서 명군의 민폐를 비판했던 인물입니다.
당연히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을 바탕으로 한 사대에는 반대를 한 인물이죠.
그러니 광해군의 중립외교반대라고 해서 그것을 전부다 사대주의적 가치관때문이라고만 단정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첫댓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반대 의견을 사대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이 문제가 많다고 그렇게 주장할수는 있지만 그러나 중립외교에 대한 사대적인 관점 문제점에 대한 시비 여부를 떠나서 명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하는게 쉽게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도 당시 내부 부패가 심각하여 반란을 초래될 수준으로 심하게 망가져 가는 명의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는 관점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까요
명은 왜란과 발배 양응룡의 반란으로 국력이 소모된 상황이고 게다가 광세의 화라는 환관들의 대규모 지방민 착취로
유랑 폭동까지 초래된 것을 보면 이런 명의 상황을 망국 위기라고 진단하여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럼으로 이런 명의 상황을 가정해서 중립외교를 펼치수가 있는 법이고
게다가 여진족은 예전의 분열 상태에 놓인 여진족이 아니라 통일 국가 수준으로 재탄생된 후금이라
예전의 분열부족 시절과는 다르지요
당시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반대 의견들은 대개 숭명 사대주의에서 비롯된게 많았고 광해군대의 권력실세들인 이이첨이나 유희분도 중립외교를 반대했지요 심지어 광해군 가족내에서 광해군의 부인 왕비 유씨가 남편의 중립외교에 반대하여 급기야 상소까지 올릴 지경이지요
다만 이이첨이나 유희분의 경우 서인들과는 포커스가 다를수는 있습니다.
정인홍의 예를 드는 이유는 영남지역출신 대북세력들의 상당수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한 전력이 있고 명군의 민폐를 심각하게 느낀경우들도 있기에 중립외교를 반대하더라도 명에 대한 사대의 목적이 아닐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선구자 이이첨의 중립 외교 반대를 광해군 일기의 저자들인 서인측 사관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그리고 정인홍의 제자 정온은 병자호란때 명에 대한 사대에 어긋난다고 청군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주화론자인 최명길을 거세게 비난할 정도로 대명사대를 이유로 후금과의 화친을 반대한게 대북입니다 대북내에서 이이첨에 반대적인 정온도 이이첨과 공통적으로 대명 사대적인 반대를 한것을 보면 숭명주의가 정파를 가리지 않고 지배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알수가 있지요
@공실불 정온의 경우 정인홍과는 정치적인 면에서 관계단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인홍은 분명 대명사대적 가치관에는 동조하지 않은 입장이죠. 정인홍은 대북의 영수이나 그 제자 정온은 대북세력이 아닌 남인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집니다.
@선구자 정인홍만 대북의 영수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이산해가 대북의 초대 영수였고 대북은 북인내 강경파들구성된 당파로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기자헌 등이 주요 인사이고 정온이 스승과 의절을 했어도 대북의 핵심적인 정치적 가치인 절의적 정치 노선을 추구하는건 변함이 없었지요 정온 뿐만 아니라 이경전 정창연 이명 기자헌등 대북내 온건 인사들도 정온과 뜻을 같이해서 폐모론과 영창대군 제거를 주도한 이이첨의 육북 계열과 대립해 갈라서서 중북을 형성할 정도이죠 중북은 인조 반정이후에 인조 정권에 소규모로 중용되었지만 유몽인과 기자헌이 인조 정권에 처형당하는등의 수난도 적지 않았죠 그나마 인조 정권에 이경전 정찬연 정온 이명등이 많이 중용되었지요
광해군 일기의 1614년 광해군과 평안 병사 이시언의 대화 기사에서 이시언은 후금이 강력해서 명과 전쟁할시에 명이 후금을 이기기가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을 정도로 심하 전투 이전에 명의 약화를 전망하는 경우가 많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