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희경(劉希慶 )은 자(字)를 응길(應吉), 호(號)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江華). 남언경(南彦經)의 문인으로 조선조의 대시인이요 학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國喪)은 물론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그에게 문의했다 한다. 그의 그런 학문이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를 남겼다. 선조 25년 임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이이첨이 폐모(廢母)의 소(疏)를 올리라고 강권하자 거절한 뒤에, 은거하며 후진의 교학에 전심하였다. 인조반정(1623) 때 절의(節義)로써 포상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고, 뒤에 아들 노민(勞民)의 공으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다. 계랑(桂娘)은 성(姓)이 이(李), 호(號)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이라고도 하며 본명은 향금(香今). 부안(扶安)의 이름난 기생이다. 한시에 능하고 거문고에 뛰어났다. 그녀의 작품으로는 시조가 3수 전하는데, 한시는 놀랍게도 40여수가 [매창집(梅窓集)]으로 전해오니, 그녀의 시재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
이능화님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그녀의 시조라 하여 10수가 소개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그녀는 촌은(村隱) 유희경과 애절한 사연을 남긴 여인이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져도 날 생각난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은 오락가락 한다 계랑은 당대의 대시인 유희경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촌은(村隱)이 상경한 후 소식이 끊겨, 계랑이 이 시를 짓고 이로부터 수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계랑은 부안의 명기(名妓)인데, 시에 능하며 매창집(梅窓集)이 있다. 유희경의 사랑을 받았는데, 촌은이 상경한 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짓고는 수절하였다.} 촌은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예론, 상례에 밝았음은 전술한 바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학자인 촌은 유희경이 부안의 명기 계랑을 만난 것은 우연한 인연으로 점재(點齋) 이귀(李貴)가 부안부사로 있을 때이다. 당시 계랑은 기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다른 기생에 비해 고고하였다. 벼슬이 높다고 권력에 굴복할 계랑이 아니었다. 돈이 많다고 돈에 유혹될 계랑도 아니었다. 명성이 높다 해서 명성에 현혹될 계랑은 더욱 아니었다.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서 달빛 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 세인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가는 손길마다 추근거리네. {평생치학식동가(平生恥學食東家) 독애한매영월사(獨愛寒梅映月斜) 시인불식유한의(時人不識幽閑意) 지점행인왕자다(指點行人枉自多)} 매창의 '차과객운(次過客韻)'이다. 일찍이 나그네가 매창의 이름을 듣고 시로써 유혹하자, 계랑이 이 시를 지어 전하니, 그 나그네가 탄한(嘆恨)하며 물러갔다 한다. 이만큼 고고한 그녀였다. 그러나 천하의 대시인이요 당대의 풍류객인 촌은 유희경에게만은 마음 속으로 흠모해 마지 않았다. 그 당시 촌은은 침류대주인(枕流臺主人)이란 아호로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어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이란 제로를 써서 여러 권 시집을 냈는데, 그의 시 하나하나가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계랑은 누구보다도 그의 시에 매료되어, 한 번 만나서 시를 겨뤄 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소망이 뜻하지 않게 쉽게 이뤄졌다. 하루는 부사 이귀가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전갈을 보내왔던 것이다. 참으로 뜻하지 않았던 기쁨이었다. 생각지 않았던 영광이었다. 그때 계랑은 기생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연과 더불어 조용하게 살아가려고, 서해의 파도가 굽이치는 산수 좋은 곳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 날마다 거문고와 시로 한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비 뒤의 산들바람 가을이 다가오네. 둥근 달 드높이 다락 위에 걸렸는데, 밤새워 우는 임 그리는 벌레 울음 애궂은 내 간장 녹아서 쌓이누나. {양후량풍옥단추(兩後凉風玉簞秋) 일수명월부루두(一輸明月부樓頭) 동방종야한공향(洞房終夜寒공響) 도진중상만두수(도盡中상萬두愁)} 두메의 오막살이 사립문 닫았는데 피었던 꽃이 져서 계절을 알려 주네. 사람없는 시골집 하루 해가 무진 길어 구름 밖 돌아오는 먼 돛대 반갑구나. {석전모옥엄시비(石田茅屋掩柴扉) 화락화개변사시(花落花開辨四時) 협리무인청진영(峽裡無人晴盡永) 운산형수원범귀(雲山炯水遠帆歸)} 그녀가 외로움을 달래며 지은 [추사(秋思)]와 [한거(閑居)]란 시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정이, 열아홉 계랑의 시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거문고와 시작으로 소일하고 있을 때 이부사에게 전갈이 온 것이다. 기방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연 속에 묻혀 지내겠다던 계랑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곧 부안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만나보고 싶은 촌은이었다. 그 장본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없는 그녀였다. 봉래산 북쪽엔 흰 눈이 쌓였는데 매화 꽃 피기는 아직도 멀었구려. 봄이 오면 일찍이 또다시 피련마는 그 꽃을 어느 누가 반겨서 보아 주료. {설적봉산북(雪積蓬山北) 치매미방화(穉梅未放花) 명년응조발(明年應早發) 춘색속수군(春色屬誰君)} 이부사에게 보낸 [呈 李使君]이란 시다. 봉래산엔 아직도 피지 않은 매화가 계랑의 마음 속엔 핀 것이다. 촌은을 만날 수 있다는 전갈을 받은 계랑은 문자 그대로 안절부절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가 있다. 가슴에 품은 정은 말도 하지 못하더니 꿈 같고 생시 같고 어리석은 이 내 마음 애타는 이 마음을 '江南曲'에 실어 보나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함정환불어(含情還不語) 여몽부여치(如夢復如痴) 녹기강남곡(綠埼江南曲) 무인문소사(無人問所思)} 유희경이 부안에 온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의 일이다. 술이 거나해지자, 촌은이 계랑에게 거문고를 재촉한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거문고를 끌어 당겼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황하의 물은 천상에서 와서 흐르나, 그러나 한 번 흘러 바다에 들면 다시 흘러오지 못하는 것을. 또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거울에 비친 백발의 모습을, 아침까지 검던 머리가 저녁에는 눈같이 희여진 것을.... 거문고 소리에 따라 이백의 [장진주(將進酒)]가 유랑하게 흘러 넘친다. 노래가 점점 황홀경으로 어울려 간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던 촌은이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너의 이 [장진주]를 이백에게 들려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그는 곧 지필묵을 당겨 시를 지어 거문고를 탄다. 일찍이 남국의 여랑(女娘) 계랑의 이름 들어 시운과 노래로써 서울까지 들리누나. 오늘은 너의 진면목을 가까이 대해 보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가 생각든다. {증문남국계랑명(曾聞南國癸娘名) 시운가사동낙성(詩韻歌詞動落城) 금일상간진면목(今日相看眞面目) 각의신녀하삼청(却疑神女下三淸)} 나에겐 신기로운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 수 있다네. 금낭 속 깊이 깊이 간직한 약을 사랑하는 너에겐 아낌없이 주리라. {아유일선약(我有一仙藥) 능의옥협빈(能醫玉頰瀕) 심장금낭리(深藏錦囊裡) 욕여유정인(欲與有情人)} 어두운 마음, 찡그렸던 얼굴을 미소짓게하는 선약(仙藥).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묘약이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말을 직선적으로 쓰지 않고 '선약(仙藥)'에 비유해 가며 은밀하게 표현한 것은 풍류객의 운치요 멋이다. 그것을 못 알아차릴 계랑은 아니었다. 자작시를 가락에 맞춘다.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서 한 번 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긴다오. 세상 사람 이 곡을 아는 이 없으나 임의 피리 소리에 나는 맞춰 본다오. {아유고주쟁(我有古奏箏) 일탄백감생(一彈百感生) 세무지차곡(世無知此曲) 음화구산생(淫和구山笙)} 그날밤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 깊어 원앙침에 들었다. 열아홉 터질 듯한 계랑의 몸이 노년의 촌은의 품 속에서 더욱 무르익어 갔다. 50평생의 지조가 계랑으로 인해 무너져 가는 촌은이었다. 계랑은 오랫동안 굳게 닫아 두었던 비밀의 문을 활짝 열어 정다운 임의 정열을 마음껏 받아들였다. 촛불이 펄럭 문풍지를 새어드는 바람에 꺼졌다. 거친 숨소리만 어둠 속에 높아 갔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그것은 영원히 인간에게서 없어질 수 없는 대철칙이던가. 누가 '이별(離別)'이란 단어를 만들었던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이별 없기를 바랐던고. 이별의 슬픔은 이런 탄식을 말하게 했다. 창 밖에 가마솥 때우라고 외치는 저 장사야, 이별이 나는 구멍도 막는 수가 있는가요. 그 구멍은 본래 눈물이 흐르기 때문에 옛부터 영웅 호결들의 뛰어난 지혜로도 못 막았고, 항우의 억센 힘으로도 능히 막지 못하였으니, 정말 우스운 말 하지 마오. 진실로 장사의 말과 같을진대 영영 이별일밖에 없구나. {창(窓) 밧끠 감아솟 막키라는 장사 이별 나는 굼멍도 막키옵는가. 그 궁기 본래 물이 흐으매 자고로 영웅호걸들도 지혜로 못 막앗꼬 허물며 서초백왕(西楚伯王)의 힘으로 능히 못 막앗신이 하 우은 말 마오. 진실로 장사의 말과 갓탈진대 장이별(長離別)인가 하노라.} 평생에 다시 만날지 모르는 두 사람, 그들에게도 이 말은 적용되어야 하는가! 두 사람을 갈라 놓을 사건이 벌어진 것은, 계랑과 촌은이 열흘 동안 내소사(內蘇寺) 구경을 끝내고 내려왔을 때였다.부사 이귀로부터 왜구가 14만의 병력으로 침공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7년간 이 나라를 초토화한 '임진왜란'이다. 너무도 짧았던 촌은과의 만남이었다. 하고픈 사연이 너무 많은 채 그들은 헤어져야만 했다. 전쟁 같은 것은 계랑에겐 아랑곳 없었다. 다만 소중한 사람과 같이만 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전부였다. 이것이 또한 여자의 가이없는 애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계랑의 만류에 못 이기어 머물러 있을 촌은이 아니었다. 국가(大我)를 생각하여 사랑(小我)을 버릴 중 아는 의인이었다. 그러기에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지만, 남자에게는 사랑은 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날 두 사람의 이별을 하늘도 알았던가. 부슬비가 내렸다. 나귀등에 올라탄 촌은을 붙잡으며 하룻밤만 더 묵어 가기를 간청하는 계랑의 얼굴에 흐르는 물은 눈물인가 빗물인가! 울며 잡은 소맷자락을 무정히 떨치고 가지 마오. 그대는 대장부라 돌라가먼 또 사랑이 있겠지오마는, 소첩은 아녀자라 당신 그리는 맘뿐이라오. {울며 불며 잡은 사매 떨떨이고 가들 마오. 그대는 장부라 도라가면 잇것마는 소첩은 아녀자라 못내 잇씀네.} 이것이 계랑의 심정 그대로다. 어느 무명 시인의 하소연이 그대로 계랑의 심정이었다. 기약없이 떠나는 촌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계랑. 어깨가 추이도록 흐느끼는 울음이 빗발 속에 번져 갔다. 대문을 닫아 걸고 몸져 자리에 누웠다. 흐르는 눈물이 베갯깃을 흠뻑 적신다. 유희경과의 짧았던 정담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그날부터 계랑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점점 수척해 가는 몸에 비해 그리움은 얽힌 실타래처럼 풀 길이 없다. 자연 붓을 든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이여, 봄 가고 가을 되어 낙엽 지는 때에, 당신도 날 생각합니까? 서로 떨어진 천리 밖에서 당신을 그리는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나이다. 단장(斷腸)의 하소연이다. 사무친 애정의 절규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촌은에게서는 일자 소식이 없다. 정말 계랑을 잊었는가. 아니면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지나쳐 버린 여인이었는가. 그러나 계랑은 한번 지나쳐간 풍류랑(風流郞)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도 깊은 정을 주었던 촌은이었다. 그녀의 그리움은 한이 없다. 창오산(蒼梧山)이 무너지고 상수(湘水)가 말라야 이내 시름없을 것을, 구의봉(九疑峰)을 덮은 뭉게구름은 갈수록 더하구나. 밤중에 동령(東嶺)에 달이 뜨면 임 뵈온 듯하여이다. {창오산붕(蒼梧山崩) 상수절(湘水絶)이라야 이 내 시름 업슬 거슬 구의봉(九疑峰) 구름이 가지록 새로왜라. 밤중만 월출동령(月出東嶺)하니 님 뵈온 듯하여라} 이별이 하 설어워 문 닫고 누웠어도 하염없는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오. 홀로 누운 잠자리는 한없이 외로운데 소리없는 보슬비에 임 없는 밤 또 저무오. {이회소소엄중문(離懷消消掩中門) 나신무향적누흔(羅神無香適淚痕) 독처심규인적적(獨處深閨人寂寂) 일정징우쇄황혼(一庭徵雨鎖黃昏)} 앞에 것은 [병와가곡집]에 보이는 매창의 시조요, 뒤에 것은 [매창집]에 보이는 매창의 [춘우(春雨)]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붓만 들면 그리움이 시가 되어 나왔다. 거문고 타면 단장의 슬픔이 여울져 갔다. 입만 열면 사랑의 하소연이 사무쳤다. 촌은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때에 인편에 서찰이 왔다. 반가움, 설레임, 너무도 반가워 눈물이 쏟아져 치마폭을 적신다. 그러나 편지의 사연은 간략했다. 의병을 모아 왜구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 한 편의 시가 동봉되었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어 나그네는 시름에 잠 못 이루네. 소식조차 끊어져 애가 타는데 오동잎 찬 빗소리 차마 못 들어. {일별가인격초운(一別佳人隔楚雲) 객중심서전분분(客中心緖轉紛紛) 청오불래음신단(靑烏不來音信斷) 벽오량우불감단(碧梧凉雨不堪斷)} 계랑은 촌은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반가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자신을 잊고 있지 않음이 고마웠다. 다음날 계랑은 더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남장을 하고 촌은을 찾아 나섰다. 부안서 서울까지는 먼 천릿길. 여자의 사랑은 이 험한 길을 나서게 했다.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인가. 그녀는 촌은을 찾아 헤매면서 갖은 고난을 이겨 냈다. 남자들의 욕망의 손길을 끝까지 이겨 냈다. 촌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여자를 강하게 했다. 그러나 촌은은 찾아 헤매어도 헤매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병을 이끌고 전장을 헤매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지친 몸을 이끌고, 허기진 사랑을 안은 채 계랑은 돌아와야만 했다. 기러기를 산 채로 붙잡아서 정들이고 길들여서, 임의 집에 가는 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는, 밤중에 임 생각이 날 때면 소식을 전하게 하리라. {기럭이 산이로 잡아 정 드리고 길 뜨러져 님의 집 가는 길을 녁녁히 가릇쳐 두고 밤중만 님 생각 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 날아가는 기러기에게 촌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싶었고, 자신의 이 보고픔을 전해 주고 싶다는 하소연도 끝내는 이뤄지지 못한 채, 계랑의 몸은 더없이 수척해 갔다. 완전히 자리에 눕고 말았다. 끝내 촌은을 그리는 상사(相思)의 정은 그녀를 소생시키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했다. 계랑의 부음을 들은 유희경은 망연자실- 넋이 빠져 한참동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죽은 넋이나마 위로해 주어야 그녀에 대한 속죄가 될까. 늙은 자신에게 온 정성을 다 바쳤던 계랑. 어떻게 그녀의 넋을 위로해야하는 것일까. 우선 그녀의 무덤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심정에서 길을 재촉했다. 촌은은 위패 곁에 놓인 거문고를 끌어 안았다. 그녀의 숨결이 따뜻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거문고 곁에서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들었다. 계랑의 육필(肉筆)이었다. 풍진 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아 깊은 규방 긴 밤이 천년만 같구려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 보니 구름 속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 {진세시비다고해(塵世是非多苦海) 심규영야고여년(深閨永夜苦如年) 남교욕모중회수(藍橋欲暮重回首) 청첩운산격안전(靑疊雲山隔眼前)} 이것이 계랑의 마지막 절필시(絶筆詩)였다. 촌은을 애타게 그리다가 죽어 간 여인의 피맺힌 응어리다. 촌은은 이 시를 쓰면서 죽어 갔을 여인을 생각해 본다. 한 여인의 절실한 애정을 받아 주지 못했던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토록이나 뜨거웠던,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기로웠던 계랑. 그는 붓을 들어 자탄과 후회가 가슴 저미는 아픔을 썼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섭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쿠나. 꽃다운 넋은 죽어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구가 너의 옥골(玉骨) 고향에 묻어 주랴. {명모호치취미랑(明眸皓齒翠眉娘) 홀축부운입묘망(忽逐浮雲入杳茫) 종시방혼귀패색(縱是芳魂歸浿色) 수장옥골장가향(誰將玉骨葬家鄕)} 한 많은 여인 계랑은 갔다. 짧은 며칠간의 애정 속에서 정염을 채 사르지도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갔다. 그 해가 명종 5년(1550), 서산에 지는 해도 슬펐는가. 촌은을 이별하던 날처럼 부슬비가 뿌렸다. 유희경과 헤어져 그리움을 달래던 때에, 당대의 기인(奇人) 허균(許筠)이 김제까지 왔다가, 계랑의 소문을 듣고 부안에서 머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균이 [애계랑(哀桂娘)]이란 제하에 두 수의 시를 읊은 것이 [성소복와고(惺所覆음藁)]에 전한다. 묘한 싯구는 비단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노래는 가던 구름 머무네. 선도(仙桃)를 훔치고 하계한 서옥모(西玉母)인가 향약(香藥)을 훔치고 인간에 온 항아(姮娥)인가. 밝은 촛불은 부용(芙蓉) 장막에 어두운데 그윽한 향기는 비취군(翡翠裙)에 남았구나. 명년 봄 다시 복사꽃 만개할 제 어느 누가 설도(薛濤)의 무덤을 지났날런가. {묘구감리금(妙句堪璃錦)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 투도래하계(偸桃來下界) 절약거인군(竊藥去人群) 등암부용장(燈暗芙蓉帳) 향잔비취군(香殘翡翠裙) 명년소도발(明年小桃發) 수과설도분(誰過薛濤墳)} 처절한 반희(班姬)는 부채만 흔들고 처량히 들리는 탁녀(卓女)의 거문고 소리. 표화(飄花)는 허공에 한처럼 쌓이고 양혜(襄蕙)는 다만 마음만 아프다네. 봉도(蓬島)엔 구름의 자취도 없는데 푸른 하늘엔 달도 이미 기울었네. 지난해엔 소소(蘇小)의 집에 있던 버들가진 그늘을 못 이뤘네. {처절반희비(凄絶班姬扉) 비량탁여금(悲凉卓女琴) 표화공적한(飄花空積恨) 양혜지상심(襄蕙只傷心) 봉도운무적(蓬島雲無迹) 창명월이항(滄溟月已沆) 타년소소택(他年蘇小擇) 잔류불성음(殘柳不成陰)} [애계랑(哀桂娘)]의 두 수다. 지나친 고사의 인용이 험이나, 계랑을 항아(姮娥).설도(薛濤)에 비유하고 그녀의 죽음을 탄식하고 있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인데 시를 잘 짓고 음율이 뛰어났으며, 또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개(孤介)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시재를 사랑하여 사귀되 막역한 사이였다. 비록 웃고 희롱하였어도 음한한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귀였으나 그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죽음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여, 두 수의 시를 지어 슬픔을 대신한다.] 라는 허균의 기록에서도 계랑의 뛰어난 시재와 그 정숙한 몸가짐을 알 수 있다. 상중에도 기방에 출입하여 정적(政敵)의 험구의 的이 되었던 교산(蛟山)이 '수탄소압희(雖恢笑狎戱) 불급어란(不及於亂)'한 사이인 것을 보면, 그 음란한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범연하게 접할 수 없었던 계랑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촌은에게 향한 계랑의 애정을 알았기 때문일까.... 허균이 다녀간 후로 계랑이 촌은을 배반하고 교산과 가까와졌다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촌은, 그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잘못은 없다 해도 풍설이 도니 이래 저래 말썽은 더욱 많구나. 뜬 시름 갖은 원한 버릴 길 없어 문을 닫고 병이라 내 누었노라. {오피부허설(誤被浮虛說) 환위중구훤(還爲衆口喧) 공장수여한(空將愁與恨) 포병엄시문(抱病掩柴門)} 계랑이 지은 [부풍설(浮風說)]이다. 이 시에서도 촌은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겠다. 교산과의 관계를 변명하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嫂詩話)]에서 유희경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희경은 본시 천예(賤隸) 출신인데, 사람됨은 성품이 청정하여 주인을 섬김에 충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김에 극진한 효로써 하니 사대부들이 그를 많이 좋아하였다. 시에 능하였는데, 그 시는 심히 순수하고 원숙하니, 젊어서 갈천훈(葛川薰)을 따라 광주에 살면서 석천루에 올라 그 누각에 제자(題字)를 쓰되, 대잎에 아침이슬 기울었는데 솔가지 끝엔 새벽별이 걸렸구나. {죽엽조경로(竹葉朝傾露) 송초효괘성(松梢曉掛星)} 라 하였다. 양송천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에서 2킬로쯤 떨어진 봉덕리 공동 묘지에 있는데,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이 있는 곳을 공동묘지라 부르지 않고 특별히 '매창의 등'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안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묘지명에 보면 매창이 죽은 지 45년 후인, 1655년 부안의 시인 단체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처음으로 비(碑)를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 왔는데, 그 후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마멸되어, 1917년 두 번째로 세운 것이 지금의 묘비라 한다. 또 부안의 유지들이 '매창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1974년 봄에 부안읍의 진산인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시비를 세웠는데,그 공원은 본디 부안현감의 관사였던 선화당 후원의 일부로, 일찍이 매창이 조석으로 거닐던 곳이어서 더욱 뜻깊은 곳이라 한다. 시비는 높이가 여섯 자에, 두 자 가량의 너비로 흰 대리석 복판에 오석(烏石)으로 '매창시비'라고 새겼고, 그 아래에 매창의 시조 [梨花雨 흣뿌릴 제...]가 송지영님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일개 기생의 묘비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두 번이나 세워졌고,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시비까지 세워 기념하는 일은 아마 최초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매창, 그녀에게는 조금도 분에 넘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그만큼 뛰어난 시인(詩人)이었으니까. [출처] 기녀 - 계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