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는 그 자체가 고산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연중 기온이 22~23도 정도로 서늘하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우리는 지금 숙소로 가기 위해 계속 산중 도로를 달린다. 고지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 구릉지대의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며, 제1의 관광도시다. 14세기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캔디는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다. 캔디는 콜롬보 북동쪽 115km, 580m 고원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10만 4000명이다. 15세기에 건설된 고도로 19세기 초 영국이 침입할 때까지 싱할라 왕조 최후의 수도였다. 캔디 왕조 왕궁과 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남서쪽 6km 페라데니야에는 스리랑카 대학이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인조 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있는 달라다말리가바사원 불치사에는 석가모니의 치아가 봉납되어 있다. 새로 취임하는 총리는 이 사원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며, 매년 8월에 대제가 열린다. 고원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 상업의 요지이며,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스리랑카 문화의 중심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캔디 자치회가 1865년 지방자치제 법령에 의거 1866년 수립되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1815년까지 실론 최후의 왕조의 왕도로서 지금도 왕궁이나 사원, 민속무용 등이 훌륭히 보존되어 있는데 매년 7~8월에 걸쳐 10일 동안 열리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로 유명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 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가 캔디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캔디의 도시 풍경에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로리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 때, 캔디 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 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캔디에 사는 것을 소원한다. 그러나 집값이 상당히 비싸서 살기에 쉽지 않다. 유명인사들이 많 배출된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좋은 집안 사람들이 거주해서 그렇다. 2월인 요즈음도 낮기온이 스리랑카 타 지역은 낮기온이 35도로 무더운데 캔디는 23도라니 스리랑카 사람들로서는 선호지역이 아닐 수 없다. 들녘만 보며 달리던 스리랑카였는데 이곳 캔디는 숲속만 달리는 별천지다. 도로변 주택도 건물도 모두 아슬한 산언덕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