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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배(1951-2023)와 이소선 어머니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청계피복 노동자의 벗 최혁배(1951-2023)
5년전 EYC 40년 지기 감리교 출신 변광순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혁배형하고 만나기로 했는 데 인근에 사니 너도 보고 싶다고 하여 2호선 강변역 어느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형수가 휄체어를 모시고 오는 모습을 보고 불편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놀랐다. 그러나 말이나 행동은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옛날 회포를 풀며 30년의 공백을 체우기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후 페이스북으로 소통했는 데 성격이나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예리했다. 지인들로부터 러시아 우크전쟁에 대해서 모두가 러시아의 침략을 비판하고 우크에 동점심을 보일 때 혁배형은 제국주의를 질타하면서 미국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그때만 해도 러시아를 비난 할 때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서방외 뉴스들이 들어오면서 겉보기에는 침공한 러시아만 나쁜 게 아니라 전쟁의 원인론을 생각한다면 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 전쟁의 전체 연출은 미국의 패권주의 이고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의 글들을 참조하면 좋다. 이외에도 혁배형은 몸의 장애로 인한 활동제약을 SNS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그후 어떻게 내 처와도 연결 되어 메지지를 주고 받고 속 얘기들을 나누는 사이였다.
* 최혁배 어린이 |
삐딱한 시선의 소유자
민주당과 문정부에 대한 절망과 비판 글도 자주 올려서 생각이 다른 분들과는 폐친을 끊기기도 하고 대면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니 독불장군식으로 자기 생각을 배설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의리 좋은 옛 동료들은 좋아요로 소통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가장 추웠던 올해 초 1월 20일 구정에 광순이가 술취해서 연락이 왔다. 혁배형이 세상을 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상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하여 마음에 짐이 있었다.
그런데 혁배 형의 시신이 화장을 하고도 유골이 어디 안착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외조모에게 홀로 성장해 가족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선한 이들이 돕기로 한다고 연락이 와서 나도 추모 글을 하나 남긴다. 내가 혁배형을 만난 것은 1980년 초 NCCK EYC 서올지구회장을 할 때다. 늘 흰셔츠에 검은 단벌 양복을 입고 곱슬머리에 돗수 높은 안경을 낀 모습인데 손학규 전 의원이 영국 유학으로 사임한 NCC 후임 간사가 된 것이다. .
혁배형을 다시 만난 것은 1982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실무자로 자리를 옮기고 총무 이신 권호경목사를 도와 실시한 훈련 프로그램을 천영초 선생과 주관할 때다. 노동, 농민, 빈민분야 실무 훈련과정이었다. 인천산선에서 총무를 지낸 김정택,박일성목사와 여성 2명, 농민쪽에서는 기농의 김정순형외 해남 Y, K쪽에 전주 사람,보금자리 김영준형, 기장 오용식목사, 장청에서 고 박은주, 영등포산선 장석숙, EYC 에서 나다.
* 청계피복 노동조합 사무실 입주를 기뻐하는 노동자들 |
3쌍이 나온 사선 훈련
1년동안 합숙과 이동훈련을 받았는 데 나는 전반기만 했는 데 YMCA 의정부 다락원, 주민교회에서 서울대 김세균교수, 김근태, 장명국등 당시 내로라 하는 분들로 부터 강의와 현장방문과 토론식 훈련을 하였다. 모두 미혼들을 10여명 모아놨으니 나중에 보니 3쌍이 나왔다. 박일성, 오용식, 유재무다. 훗날 권호경목사는 훈련들 하라고 모아 놨다니 연애질이나 했냐고 핀찮을 하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혁배형과 먹고 자고 가깝게 지내게 되는 데 최근에 들으니 내 처와 크게 될 뻔한 사이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후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광산촌인 태백으로 일본 선교사로 사역하느라 연락이 두절된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독일로 미국으로 가서 국제 변호사가 되었다고 해 잘되었다는 생각만 했는 데 건강이 많이 상한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 데 사후 유골마져 오갈 때가 없다는 소식을 듣는 다.
그런 가운데 최근 지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안치을 위하여 준비중이라고 하여 빚진자의 마음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추모 글도 남긴다. 아마 독일에서 무난히 학위를 끝냈다면 대학교수도 했을 것인데 늦은 나이지만 뉴욕주립대(NYU)가서 국제변호사가 된 것도 그렇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까칠한 성격으로 가까이 가기는 어려워도 한번 정을 맺으면 의라가 있는 성품이다. 듣기로는 군인 아버지로부터 어려서부터 스파르타식의 교육에 대한 반발로 강인한 성격이 되었다고 들었다. 외모가 작으니 남에게 지지않으려 하고 자신을 얕잡아 본다는 느낌이면 공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심이 없고 입이 무거워 본인은 한번도 전태일과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던 시대라고 하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떠벌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최근 최혁배 선배의 숨은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전태일의 정신을 가장 정통으로 실현한다는 평을 듣는 청계피복 3대 노조위원장 민종덕 동지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연재하는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태일이 아니다" 라는 회고 글과 사진을 소개한다.
* 정권과 경찰들에 의하여 길거리로 쫒겨난 청피노조 사무실 |
"무엇보다도 우리의 확고한 근거지 마련이 시급했다. 유신독재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독재에서도 노동자의 근거지인 노조사무실과 노동교실에 입주해 있는 건물주한테 압력을 가해 쫓아내는 방식으로 탄압해 왔다. 이런 불법적인 탄압을 하도 당하다보니 남의 건물에 세를 얻어 노조사무실이나 노동교실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건물을 소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소원을 각계각층에 호소했다.
드디어 우리의 호소에 답이 왔다. 멀리 독일 '인간의 대지'에서 답이 온 것이다. '인간의 대지'는 생텍쥐베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따온 이름으로 생텍쥐베리의 저작료로 재단을 설립했다고 한다. 이 재단은 제3세계 어린이 복지를 주로 돕는 재단이라고 한다.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 출신인 최혁배 선생(현재 변호사)가 청계노조와 연결을 해 준다(최혁배 선생은 당시 청계노조 뿐만아니라 환경운동, 민주언론운동, 민중불교운동, 경인지역 노동단체 등에도 도움을 주었다)
인간의 대지로 부터 지원 받은 돈으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 137-106에 위치한 한옥을 85년 3월에 매입했다. 이곳을 '평화의 집'이고 이름 짓고 노조사무실로 입주했다. 곧 이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에서도 문익환 회장님을 통해 "미국 연합장로" 의 도움으로 전태일기념관을 마련할 수 있었는 데 동대문상가아파트 4층에 공간 두 채를 매입해 85년 6월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는 전태일기념사업회로 개명, 발전했다"
혁배형은 전태일 분신후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어머니 이소선여사와 동생 전태삼과 동거동락하면서 관계를 갖는 다. 그리고 이제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가 계시고 서울 법대 선배 조영래변호사와 김근태, 백기완선생등 민주화운동 선후배 동지들의 영령이 깃든 마석 모란 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어렵게 안치를 하게 된 것이다.
새문안교회와 대학부 출신들
새문안 대학부 출신으로 우리교단 목사가 된 김형기목사를 은퇴를 앞두고 지난 해 경주서 만났다. 회포를 풀면서 얘기중 형수를 어떻게 만났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모는 연대 신학과를 다녔는 데 감리교서 왔고 서울사대 다니던 김형기 형은 새문안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현대사에 전태일의 분신으로 태동된 기독 학생운동과 기독청년운동의 분기점에 최혁배 동지나 새문안교회 대학부는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것을 보게 된다.
그후 새문안교회 대학부는 공식적으로 당회에서 해산을 결의 한다. 그러나 새문안에서 성장한 대학부 출신들은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근에는 촛불시위에도 서로 모여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부 출신들은 각 곳에 흩허져 큰 역할들을 하고 있다. 당시 대학부 초대 회장 이일영장로, 부회장 서원석장로, 박은덕, 총무 서경석목사, 서기 김용담장로, 회계 이숭리권사(부부)다. 목사가 된 분들로는 서경석, 신대균,이근복,류태선,진방주,한재흥,이원희이 있고 성공회 신학대학서 은퇴한 권진관,한일장신대 이남섭, 경상대 심상완, KAIT 유종일, 가천대 유종성 형제, 유승희 전 민주당의원, 이외에도 의사 변호사, 교수등이 있다.
10여년전 새문안대학부 출신들이 대학부 30년사 책을 출판했다. 그 때 대학부 설립시 초대 전도사 홍성현목사, 경신 교목 김종희목사, 고 김용복박사도 새문안 대학부와 학생회를 지도한 분들이다. 그런데 얼마전 새문안 120년사 책을 볼 기회가 있어 보니 대학부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아마 해산결정을 하면서 교회사에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이건 사상 초유의 일로 내 생각에는 반드시 그 결의를 번복하는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새문안교회 이상학목사를 본 김에 이 문제를 물었더니 아직 교회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시간이 가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냐는 의미로 답을 했다. 새문안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들이 한국기독교회의 장자로의 자의식과 책임감을 갖는 다면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최초의 대학부를 연 새문안의 역사는 이를 무시할 수도, 해서는 안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새문안대학부의 활동과 역사가 공식기록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청계천에 서게 된 전태일 동상제막식(고 김동완목사와 이소선 어머니) |
새문안 대학부 역사, 기록되야
그러면 최혁배 형도 그렇고 지금은 우파라고 욕을 먹어 싸다지만 당시 서경석 목사의 흔적도 사실 새문안 것만도 아니다. 기독학생운동이나 장청운동도 그렇고 기독청년운동의 선구자인 것은 엄연한 사실로 이에 대한 평가는 있는 것이다. 서경석 목사가 장신대 77기로 입학후 마치지 않고 미국 UNION서 공부를 마치고 PCUSA(미국장로교)서 안수받고 귀국해 기사연 원장으로 부임한다. 오랜 미국생활로 변화된 당시 운동권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여 실무자들로 부터 당하신 섭섭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후 경실련운동이나 시민운동에서 치우진 우파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이해한다. 이에 대한 비판을 나는 공개적으로 한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공칠삼과라고 한가지만 갖지 말고 다면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 이외에도 한 시대 새문안교회에서 자라 우리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흔적들이 모아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나 이야기가 아닌 한국기독교의 역사의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속에 일어난 어떤 행위는 훗날 그것을 기록하는 자의 세계관이나 관점 때문에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가지 사건이라도 여러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지금의 역사기술은 전문사관에 의하여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록들이 모아지는 추세다. 민중사적 관점 혹은 주변부의 목소리가 체워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역사는 객관적이지만 기록되는 순간 주관이 되기 때문이다.
* 독일 '인간의 대지' 실무자와 함께한 최혁배 동지 |
최혁배 동지(1951-2023) 약력
어린 시절 군인 출신 부친과 생활하다 외조모에게 성장하여 경북고를 나와 1970년 서울법대에 입학, 70년 11월 전태일분신으로 서울법대 추모 활동, 71년 ‘후진국사회연구회’활동을 인연으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활동, 위수령조치로 제적,투자회사 재직중 시국사건으로 구속, 79-83년 NCCK 국제위원회 실무자,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실무자, 83년 서독 프랑크프르트대학으로 유학, 86년 이경숙씨와 결혼하여 1녀를 둔다. 87년 독일에서 물리학자와 교류중 국가보안법으로 조사 고문과 구속, 2심서 집유로 석방, 88년 미국 뉴욕대 로스쿨 국제법 변호사 취득, 94년 귀국 선경구룹 법률고문, 96년 도미하여 변호사 10년 개업, 2014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약화로 귀국(휱체어 의존 시작)2023년 1월 20일 코로나 감염과 폐렵으로 소천한다.
서울 법대 재학중인 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으로 추모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생을 청계피복 노조와 이소선 어머니, 전태삼선생과 교류했다. 졸업후에는 노동자로 살기위해 후배 전종덕과 위장 취업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후방지원하는 역할를 자원한다. NCCK 실무자로 시절 1967년 독일에서 창립된 ‘테르 데 좀므’(인간의 대지)와 연결해 한국 공해문제연구소,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전태일기념사업회, 청계피복노동조합, 서울노동운동연합, 민중불교운동연합, 민주언론운동협의회등을 지원하도록 가교역할을 한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애정을 보인 곳은 전태일기념관(평화의 집)으로 지원한 단체와 교류한지 20년 만에 한국을 찾은 대표를 통하여 ‘평화의 집’ 건립금 당시 24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약 1억4400만원)을 지원받도록 주선한다. 서독에서 연류된 국보법으로 안기부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국제변호사 가 되지만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선경구룹 법률고문 변호사를 지내고 최근엔 동서울 터미널 근처 신한계열 회사 대표라는 직함은 있었으나 집한칸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대학 동기 박원표(전 세계사이버기원)선생이 한겨레 신문 2월 2일자 기고에 마지막으로 남긴 최혁배 동지에 대한 회상을 소개한다.
“한 때 속보로 등산하며 다리 힘을 자랑하던 그는 점점 지팡이를 짚더니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외출하기 어려운 신세가 됐고 코로나 재앙 속에서 아내 이경숙과 유일한 피붙이 딸을 남기고 허무하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속된 명예는 처음부터 찾지 않았으니 이름과 사랑만 남기고, 부디 저승에서라도 허리 꼿꼿이 펴고 힘차게 두 다리로 서기를 기원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25807?sid=102(기사내용)
2020년 11월 22일 페이스 북 글 “우리가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것”
필자는 1984년 서독 유학 기간을 1년 보냈다. 서독 사회는 자유의 물결속에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교육, 의료, 고용, 실업, 주거 등 기본 생활이 국가예산과 보험 그리고 저렴한 월세등으로 모두 해결되는 사회였다. 시민들은 햇빛과 낭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주요 관심사였다.
그당시 서독의 1인당 소득은 대략 17,000 달러 수준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국민소득 30,000 달러를 자랑한다. 젊은이들은 대학 학자금을 벌려고 알바에 시달리고 입시생 부모들은 과외비 마련하느라 등골이 휜다. 도대체 왜 이런꼴로 살아야 하는가. 소득 10만달러가 되면 무엇하나. 아파트 가격 인상으로 인한 전세난을 보노라면 무슨 나라가 이꼴인가 싶은 분노가 치민다. 의료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있다고 하지만 미비한 점은 아직도 산재해있다. 1984년 우리 유학생 한사람은 신장 이식이 필요해서 부친을 서독으로 모셔 부친의 신장을 이식받아 치료했는데 학생 의료보험으로 전액 혜택 받는 수준의 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시급한 제도 개혁은 유치원부터 대학원 박사과정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의 국립화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예산을 사립대학에 지원하지만 그들은 교수요원 충원, 연구 등에는 쓰지않고 토목사업만 궁리한다. 정부가 시간강사를 전임으로 바꾸라니까 2만명에 달하는 시간강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원아교육 까지 모두 도둑질이 우선이었지 않은가. 더구나 사학은 적폐세력의 부패의 온상이요 노다지 주머니다. 철폐하자. 국가는 서민 임대 아파트를 대규모로 건설해서 주거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거 다 우리가 내는 세금아닌가. 왜 어려운 우리 서민층을 위해 예산을 쓰지않는가. 국가 예산으로 지은 주거는 월세의 앙등 따위는 걱정안해도 된다. 되먹지 않은 세입자 가정 학동에 대한 차별 따위는 일거에 해결할수 있다. 우리 모두 국가예산을 요구하자. 우리를 위해, 후손을 위해. 우리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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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사정....후원을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요즘 약값.먹을것.공과금.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통신료도 못내고 생활고로 카페도 운영을 못할 지경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후원을 부탁 드립니다
카페지기가 드리는 부탁의 말씀.....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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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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