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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신들이 북경에 갈 때 따라가는 자서(子壻)들을 반드시 ‘타각(打角)’이라 일컬으니, 타각이란 것은 바닷길로 조천(朝天)을 하던 시절에 군관(軍官)들을 부르던 호칭이다. 처음에 의주(義州)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도 나는 머리에 오사전립(烏紗戰笠)을 쓰고 있었는데, 전립의 꼭지에 구름과 달을 은(銀)에 아로새겨서 장식하고, 금패(錦貝.빛깔이 누렇고 투명한 호박의 일종)로 만든 동전[耳錢]을 쌍으로 매달아서 금빛 공작 깃털을 묶어서 드리웠다. 몸에는 흑린(黑鱗) 문양의 협수의(狹袖衣)를 입고, 허리에는 남화주(藍禾紬)의 긴 전대(纏帶)를 매었으며, 좌우에는 수건(手巾), 약낭(藥囊), 연갑(烟匣), 오동도(烏銅刀), 취두선(聚頭扇)을 찼다. 몸단장을 다 마치고서 거울을 들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니, 벼슬도 없으면서 탕건(宕巾)을 쓰고, 군인도 아니면서 군복을 입은 꼴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엉성한 얼굴에 용맹하고 굳센 모습을 꾸미었으니, 변방으로 나가는 장군이 아니면 완연히 전장에 임하는 원수(元帥)의 모습이라, 만 리 길을 앞에 두고 마치 장차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흙먼지를 휘날릴 기세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내 흰 말을 타고 나왔고, 마두(馬頭) 한 명이 따랐다.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는 함께 쌍마교(雙馬轎)를 탔는데, 익장(翼帳)을 걷어내고 초석(草席)을 삼끈[麻繩]으로 묶어서 비바람에 대비하였다. 그 도어(徒御)는 각각 역노(驛奴) 가운데서 선발하였는데, 모두 중국어를 잘하는 자들이었다. 이른바 서자(書者)는 수레와 말을 관장하고, 마두(馬頭)는 사령(使令)을 주로 맡고, 인로(引路)는 일산(日傘)을 들고 길을 인도하고, 군뢰(軍牢)는 피리를 불면서 먼저 나간다. 농마두(籠馬頭)와 건량마두(乾糧馬頭)는 모두 각자의 일을 관장하였고, 쇄마구인(刷馬驅人)은 각기 그의 말을 끌었다. 서장관(書狀官)은 태평거(太平車)를 탔는데, 위에 표범 가죽을 덮어서 구별하였고, 여러 비장(裨將)과 역관(譯官), 반당(伴倘)들은 모두 전립(戰笠)에 군복을 입었는데, 겸인(傔人) 이하는 공작 깃을 달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것으로 귀천을 표시하였다.
● 군뢰(軍牢)의 몸치장[打扮]이 가장 웃길 노릇이니, 남색 무늬를 놓은 비단으로 안을 댄 전립(氈笠)의 꼭지에 흰 말갈기와 홍상모(紅象毛)를 꽂은 것을 머리에 쓰고, 앞에는 금빛으로 “대용(大勇)”이라고 쓴 글자를 붙였다. 청포(靑布)로 만든 협수의(狹袖衣)를 입고, 위에 홍목쾌자(紅木快子)를 걸쳤으니, 영락없이 신수가 좋은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또 어깨에는 홍융사(紅絨絲)를 걸치고, 허리에는 남색의 영기(令旗.군령을 전달하는 기)를 꽂았으며, 한 손에는 필갑(筆匣)과 군령판(軍令板)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연죽(烟竹)과 짧은 등편(藤鞭)을 잡고서, 부담마(駙擔馬)에 반쯤 걸터앉아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등에는 붉은 몽둥이를 매었다. 각 방(房)에서 일이 있어 군뢰를 부를 때마다 못들은 척하고서 목을 늘이고 힐끗 보면서 멀리서 동정을 살피다가, 열두어 차례 재촉하여 독려하면 그제야 마치 처음 들은 것처럼 하면서 큰소리로 길게 대답하였다. 허다한 소지품들은 모두 왼쪽 어깨에 메고, 손에는 곤봉 하나를 들고서 우르르 말에서 내리는데, 입으로 ‘예’, ‘예’를 연발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간다. 대개 여러 하인들 중에서 군뢰가 가장 일이 많고, 또 가장 많이 먹는다고 한다.
● 매양 길을 가는 도중에는 길을 인도하는 자들이 일산을 거두고 펼치지 않고, 군뢰(軍牢)들도 각(角)을 지니고서도 불지는 않는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역참에 다다라서, 멀리 객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면 비로소 각을 크게 부니, 집집마다 남녀노소가 각 소리를 듣고서 달려 나와 구경을 하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빽빽이 서서 손가락질을 하며 웃으며 말하기를, ‘가오리(加五里)’라고 한다. 가오리라는 말은 중국어로 ‘고려(高麗)’라는 뜻이니, 저들이 우리나라를 ‘고려’라고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중국을 ‘한(漢)’이라고 하고, ‘당(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의주노(義州奴) 채윤귀(蔡允貴)는 상사(上使.홍석주)가 계해년(1803)에 사신을 갔을 때, 마두(馬頭)로 따라갔던 자인데, 이번에는 상판사(上判事)로 사행에 참여하였다. 나이는 바야흐로 50 남짓이고, 전후로 북경을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나 되어, 일행 중에 중국어를 가장 잘하였다. 매양 그와 함께 마주 앉아 수작하였는데, 바깥에서 소문을 들으니 끝내 중국 사람이 말하는 것과 차이를 분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 중국에서는 어려서부터 모두 문자로 말을 하기 때문에,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또한 문자와 말의 구분이 없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더라도 문장을 이루니,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어휘들이 모두 그들의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늘 내뱉는 말들이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이 5살 먹은 중국 아이가 개울 건너 엄마에게 “물이 깊어서 건널 수 없어요[水深渡不得]”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서 문득 크게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노가재(老稼齋) 김공(김창업)이 천산(千山)을 여행하다가 어떤 술을 파는 시골 할미를 만나서 “후미진 길에 사람이 드무니, 누가 술을 사서 마시겠는가?[路僻人稀, 有誰沽飮]”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꽃향기 따라 나비는 절로 이릅니다[花香蝶自來]”라고 하였다. 그 말이 간단하면서도 뜻이 잘 전달되어서 절로 시가 되어 버리니, 이러한 일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의 수레를 모는 ‘칸처더[看車的]’인 서철루(徐澈婁)는 집이 봉성(鳳城)인데, 사람됨이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서투르지만 우리말을 배웠는데, 마두배(馬頭輩)들이 늘 ‘서대(徐大)’라고 불렀다. 대개 중국에서는 천한 사람을 부를 때에 반드시 ‘모대(某大)’라고 한다. 하루는 내가 수레 안에 있다가 서대를 불러서 중국어로 묻기를, “담배 줄까?”라고 하자, 서대가 우리말로 대답하기를, “좋지! 좋지![早治早治]”라고 하여, 내가 웃으면서 그에게 주었더니, 서대가 두 손으로 받으며 말하기를, “담뱃대 없어![淡盃大業西]”라고 하여, 크게 웃었다. 이 일이 있고서부터 나는 수레 안에서 잠이 올 때면 번번이 서대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중국어와 우리말을 섞어가면서 도리(道里)를 묻거나 물명(物名)을 묻거나 하다 보니, 그것이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 3일에 한 번씩 주방에서 찬합 하나를 준비하여 올렸는데, 이것을 수레 안에 놓아두고서 무시로 배가 고플 때마다 먹곤 하였다. 간혹 약과(藥果)나 어물(魚物)을 서대에게 주면, 서대가 맛있게 먹고 나서 매양 손으로 발을 걷어 올린 채 웃으며 말하기를, “배고파[盃古把]”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노야(老爺)께서는 왜 똥시[東西]를 먹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똥시[東西]’라고 한 것은 북쪽 사람들이 물건을 통칭하는 말이니, 그가 나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하거나 맛있는 것을 나누어 주기를 바랄 적에 하는 말이다. 나는 웃으면서 바로 그에게 주었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루에 3, 4번은 되었다. 유람할 곳을 만나면 그가 홀로 수레를 지켰는데 그럴 때마다 반드시 음식을 훔쳐서 먹었고, 심한 경우는 친구를 불러다가 나누어 먹어서 찬합을 다 비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이 똥시는 우리 노야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두가 보고서 못하게 하면, 웃으며 말하기를, “노야께서 나를 아끼시니, 반드시 나를 꾸짖지 않을 것이야!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니, 마두도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수레를 타고 길을 가면, 서대는 종일토록 ‘똥시를 먹으라’고 권하지 않으니, 대개 그가 찬합 안에 먹을 만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이상해서 찬합을 열어 보면, 과연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서대에게 물어보면, 서대가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정색을 하면서 캐묻기를, “네가 내 수레를 보고 있는데, 누가 감히 훔쳐 가겠느냐? 너의 말이 어이가 없구나! 아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대가 이내 몸을 날려 수레에서 내려와서는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천리 고생길에 배가 고팠던지라, 찬합 안에 음식이 너무 맛이 좋아서 소인이 다 먹었소[小人伊多無巨所] 노야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하는 행동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배꼽을 잡게 되지만, 이내 화가 난 척하면서 말하기를, “지금은 너의 죄를 용서하지만, 만약 뒤에 다시 이런 일을 저지른다면 마땅히 중벌을 내리리라.”라고 하니, 서대가 머리를 끄덕이고 일어나서 수레 앞의 가로지른 판자에 걸터앉아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말하기를, “노야께서는 노여움을 푸셨습니까?”라고 하고는, 또 묻기를, “담배 드릴까요?”라고 한다. 그리고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우리말로 마두를 불러 말하기를, “희종아! 담배 잡수어라.〔淡盃自浮水阿羅〕”라고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니, 나 또한 포복절도하고 만다. 서대는 이내 채찍을 휘두르며 담뱃대를 물고서 우리나라의 ‘〈오동추야월가(梧桐秋夜月歌)〉’를 부르는데, 그 음절이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운 것 같아서, 나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대가 빙 둘러보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노래를 잘 부릅니까?”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라고 하니, 그가 또 말하기를, “이 노래가 귀국에서는 어떠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훨씬 낫다.”라고 하니, 그가 웃으며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매일 이처럼 하면서 간혹 여행길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 책문의 술집에서 저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을 보니, 술잔을 돌리며 홀짝홀짝 마시고, 취하여도 난잡하지 않으니, 그 거동이 매우 점잖았다. 내가 여러 비장(裨將)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런 식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가장 좋으니, 이제 제군들과 더불어 중국인의 아취(雅趣)를 시험 삼아 배워보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다른 가게로 옮겨 들어가서 의자를 늘어놓고 앉아서, 마두로 하여금 술을 시키도록 하였다. 놋쇠[鍮鑞]로 만든 잔과 행자배(杏子盃)를 모두 앞에 늘어놓고, 잔을 잡고 돌려가며 마시는데, 이야기 하거나 웃기도 하면서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이니 자못 한가한 맛은 있었으나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남이 하는 행동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한 순배가 미처 돌지 않아서 술을 잘 마시는 조진구(趙鎭龜) 군이 문득 한 잔을 다 마시고는 말하기를, “술맛이 매우 좋구나.”라고 하였고, 긍지(兢之.홍희진) 또한 실컷 마시고는, “맛은 담백한데 잔이 작아 혀를 적시지 못하니, 술이 좋은지 나쁜지 알기 어렵도다.”라고 하였다. 사유(士裕.변지화) 또한 한 번에 술을 다 마시고는, “내가 비록 술을 마실 줄은 모르지만, 이런 잔이라면 또한 하루에 300잔은 마실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사익(士益.양종우)은 말하기를, “날이 이미 늦었고, 유람은 마치지를 못한지라, 억지로 중국인들이 수작하는 거동을 흉내 내면서 일부러 편안하고 한가로운 모습을 지었지만, 나는 무부(武夫)이니 어찌 예법을 알겠는가? 목구멍이 마르면 술을 마실 뿐이니, 백 줄기의 강물도 마시고자 하거늘, 어찌 이런 작은 잔을 쓰겠는가? 도무지 우리나라의 풍속을 쓰는 것만 못하도다!”라고 하고는, 잔을 던져 버리고 큰 술잔을 들고 입에 다 털어 넣고 “통쾌하도다! 통쾌하도다!”라고 말하니, 사방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배꼽을 잡았다. 내가 웃으며 일어나 말하기를, “좁은 나라의 성급한 습관을 참지 못하고, 무부의 거칠고 발끈하는 성미를 숨기지 못하니, 이것이 우리 풍속이 교화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작은 일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대의(大義)를 결정하는 일에는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군(趙君)이 사죄하며 말하기를, “술이 막 입술에 닿자, 그 기운이 문득 밥통을 요동치게 하여, 어느새 주령(酒令)이 엄격함을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잔을 기울여 다 마셔버렸으니,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하였다. 긍지(兢之)는 말하기를, “조군(趙君)의 술맛이 좋다는 말[酒佳之說]에 그만 현혹되어서, 술을 입술에 적셔 맛을 보고자 하여 부득이하게 차츰차츰 다 마셔버렸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유(士裕)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술을 사랑하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이 다 마셔버리는 것을 보고는 작은 잔으로는 취하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또한 덩달아 과하게 마셔버렸으니 그만 깜빡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익(士益)이 말하기를, “술꾼들이란 본래 통이 커서 늘 큰 잔에 익숙한 법인데, 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대니 그 향기가 솔솔 풍겨 와서, 천천히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다가는 창자가 오그라들고 입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 시원하게 큰 잔으로 한 잔 마시고 그치는 것만 못하니, 어찌 나의 본성을 참아가며 억지로 중국의 주도(酒道)를 배우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사익이 말하기를, “저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크게 웃고 돌아왔다.
● 저들은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모두 담배를 피우는데, 비록 윗사람을 만나더라도 또한 피하지 않는다. 혹 마두배에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금하면, 문득 말하기를, “이것 또한 입으로 먹는 물건인데, 어른을 마주 대하였다고 해서 아침저녁을 폐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내가 요양(遼陽)의 길가에서 시골집 문 앞에 한 아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새빨간 명주실로 뜬 여름 모자를 쓰고, 석류 무늬가 있는 두루마기를 입고서, 발에는 까만 신[烏靴]을 신고 있었다. 얼굴은 눈보다 희고, 눈썹과 눈은 그림을 그린 듯한데, 입에는 짧은 담뱃대를 물고서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귀여운 마음에 사유(士裕)와 함께 불쑥 들어가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너처럼 어린 놈이 감히 문지방에 걸터앉아 담뱃대를 빨고 있으니, 이 무슨 무례한 일인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가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말하기를, “가오리(加五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손을 벌리면서 말하기를, “연초, 나에게 주세요.”라고 하는데, 그 손이 희고 매끄럽기가 마치 파뿌리와 죽순 같았다. 내가 이내 연초 주머니를 풀어서 주었더니, 아이가 받고 나서 합장하면서 말하기를,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몹시 귀여워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서 묻기를, “너는 나이가 얼마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여섯 살”이라 하였다. 또 묻기를, “글은 읽을 줄 아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제 막 《효경(孝經)》을 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너는 우리를 따라 동국(東國)으로 가보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아이가 머리를 흔들면서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한 노인장이 안에서 나와서 웃으며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몰라서 버릇없는 행동을 한 듯합니다. 존객(尊客)께서는 용서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아이가 노인장을 보더니, 그제야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면서 웅얼웅얼 몇 마디 말을 하였다. 노인장이 인자한 표정을 만면에 띄우면서 말하기를, “존객께서 너를 귀여워하여 희롱한 것이니, 무서워하지 말아라.”라고 하고서 나를 향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늙은이의 손자인데, 어리광이 심하여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응석받이로 키웠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성을 물으니, ‘장씨(張氏)’라고 하고, 나이를 물었더니, ‘일흔둘’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손자의 용모와 하는 짓이 귀여워서 한번 장난으로 말해 본 것이니, 행여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심환 한 알을 그 아이에게 주니, 아이가 받아서 할아버지에게 드리고는, 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 웃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차마 놓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하직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였고, 돌아와서도 그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하여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 십리하보(十里河堡)에서는 여러 비장들과 함께 노닐며 구경하다가 주점에 이르렀다. 가게 주인이 우리를 인도하여 후당(後堂)으로 들어갔는데, 한적하고 말끔하여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함을 문득 잊게 하였으며, 그 의자와 탁자, 그릇과 기구들이 정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등나무 자리와 화려한 털방석을 깔고, 캉[炕] 위에는 오색 양탄자를 펴 놓았는데, 캉과 나란하게 길고 넓으며, 두 마리 용을 짜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온 벽에는 많은 서화가 걸려 있어 볼만하였다. 뜰에는 이름난 꽃과 기이한 풀이 심어져 있고, 큰 동이 안에는 오색 붕어가 물 위로 나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문안의 조장(照墻)에는 반지르르한 바둑알 크기의 작은 돌로 날아가는 봉황과 누워있는 용을 짜 맞추어 놓았는데, 흙먼지를 막기 위한 것이다. 모든 배치가 반듯반듯하여 궁벽한 변방의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각자 의자에 앉았는데, 사익(士益)이 말하기를, “좋은 술로 가져오게.”라고 하니, 종업원이 묻기를, “몇 냥(兩)이나 가져올까요?”라고 하자, 마두가 말하기를, “10냥을 가져오너라.”고 하였다. 대개 5명이 함께 술을 마시기 때문에, 그 대화가 이와 같다. 10냥은 바로 술의 무게 단위이다. 술을 떠서 담을 때 1냥에서 10냥까지 각각의 그릇이 있으니, 바로 놋쇠로 만든 작은 병이다. 종업원이 먼저 탁자 하나를 가운데 놓은 다음, 5개의 작은 잔과 5벌의 나무젓가락을 차례로 탁자 위에 배열하고, 또 작은 종지 6개를 가져왔는데 각기 파ㆍ마늘ㆍ소금ㆍ무ㆍ고초(苦椒)ㆍ호초(胡椒)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바로 따뜻한 술 한 병을 내어 왔고, 돼지고기 볶음, 채소 절임, 계란 볶음, 분채(粉菜)를 차례로 가지고 왔다. 내가 일행들에게 웃으며 말하기를, “오늘은 삼가 저번과 같은 실수가 없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한번 허물을 뉘우쳤으니, 어찌 다시 실수를 저지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술잔을 돌려가며 조금씩 마시고 탁자 위에 남겨 두었다가 잠시 뒤 다시 마시며 간간이 담소를 나누니, 조용한 분위기에 조촐한 정취가 있었다. 술 마시기를 마치고 그 가격을 물어보니, 당전(唐錢)으로 2초(鈔) 5맥(陌), 대략 400문(文)이 나왔다.
● 큰길가에 시골 사내가 옥수수[玉薥]를 땅바닥에 널찍하게 펴 놓았는데, 맷돌만 한 큰 돌의 중앙에 새끼를 꿰어서 나귀 한 마리를 두 눈을 가린 채로 뒤에서 따라가며 채찍질을 하였다. 나귀가 빙빙 돌면서 멈추지 않는데, 맷돌이 돌 때마다 옥수수가 가루가 되어 떨어져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대개 각종 곡식의 낟알을 취할 때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하니, 사람의 힘을 허비하지 않고, 편리한 것이 이와 같다.
● 중안보(中安堡)에서 점심을 먹었다. 상방(上房)의 인로(引路.길을 인도하는 하인) 김필우(金弼禹)가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소인이 마침 시 한 구를 지었으니,
이곳에서 연경 땅 얼마나 되나 / 此去燕京多少里
먼 여정 걸음마다 객수만 깊어가네 / 長程步步客愁深
라는 시입니다. 바라건대 한번 평가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관서(關西)의 역졸(驛卒)과 쇄구배(刷驅輩)들 중에는 가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가난에 쪼들려서 이름을 숨긴 채 사행단에 끼는 자가 있다고 한다. 나는 길을 가면서 항상 이 하인을 보았는데, 살이 찌고 살결이 희며, 말수가 적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닿아서, 혼자 생각에 천한 부류는 아닐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제 그 시를 들어보니 더욱 이러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갔다. 그래서 억지로 그 내력을 물어보니, 증조부가 자산(慈山) 수령(守令)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름은 밝히려 하지 않았다.
● 영조(英祖) 병신년(1776)에 상국(相國) 김치인(金致仁)이 고부사(告訃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서, 밤에 공금으로 가지고 있던 은 1천 냥을 잃어버렸다. 사신들이 의논하기를, “공금[公貨]은 진실로 명백한 사용처가 없으면 한 푼도 남김없이 국고에 반납하는 것이 나라의 법이다. 지금 돈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들, 남들이 믿지 않을 것이니, 장차 무슨 말로 돌아가 보고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방관에게 정문(呈文)을 보내니, 중후소(中後所) 참장(參將)에게 전달하였고, 다시 금주위(錦州衛)와 산해관(山海關)에 전달하여 보고하였다. 이렇게 하여 며칠 만에 예부(禮部)에 보고가 들어갔는데, 건륭제(乾隆帝)가 칙령을 내려 해당 지역의 공은(公銀)으로 우선 사신이 잃어버린 것만큼을 보상하게 하고, 순찰에 유의하지 못하여 멀리서 온 사신이 재물을 잃고 원통한 지경이 되었으니 당해 지방관을 파직시키고 객점의 주인과 의심 가는 자들을 심문하도록 하였다.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치죄(治罪)하니, 사형을 당한 자가 4, 5인이었다. 사행(使行)이 심양(瀋陽)에 이르기도 전에 황제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명령을 거행하는 것이 이처럼 신속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객점의 백성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원수 보듯 하였다고 한다. 사행이 돌아와 복명을 하고, 그 사실을 낱낱이 아뢰자, 정조(正祖)께서 교지를 내리기를, “그깟 재물로 인하여 번거롭게 상주(上奏)하여 지나치게 외람된 일을 하고, 게다가 명분없는 은까지 받아왔으니, 체면을 크게 잃었다.”라고 하시고, 마침내 삼사(三使)에게 죄를 주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일로 일컬어진다.
● 중우소(中右所)에서 점심을 먹었다. 상방(上房)의 가마를 끄는 말이 도중에 발을 헛디뎌서, 긍지(兢之)가 역졸을 곤장으로 다스렸는데, 여러 호인(胡人)들이 둘러서서 차마 못 볼 듯이 안타까워하였다. 나의 수레를 모는 서대(徐大)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투덜거리기를, “이 일은 말의 잘못이요. 저 하인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닌데, 이런 중벌을 받는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노야(老爺.홍석주)께서 십분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라고 하고서,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호인들도 미간을 찡그리고 혀를 차거나, 혹은 눈물을 머금고 애걸하기를, “노야께서도 매정하시지! 천리를 함께 가는 사람에게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신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서대가 또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내게 하소연하기를, “이 일은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노야께 잘 말씀하셔서 풀려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실소(失笑)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말씀을 드려서 형벌을 멈추게 하였다. 서대가 역졸의 장딴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우리 노야(老爺.한필교)께서 힘을 써 주지 않았다면, 너는 거의 죽을 뻔하였어!”라고 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대개 중국 사람들은 곤장을 맞게 되면 반드시 사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이 때문에 극구 애를 써서 형벌을 면하도록 간청하는 것이 자기 친척의 죄를 원통하다고 하소연하는 것과 같이 한다. 사람이 차마 내버려둘 수 없는 마음이 본래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 팔리보(八里堡)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덕잠(李德潛.이헌명) 군이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고 발을 절룩거리며 들어왔다. 내가 이상해서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이군이 말하기를, “서울에서 출발할 때에 이 신발 한 켤레면 오고가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어젯밤 비에 진신[泥鞋]으로 갈아 신었더니, 마두(馬頭)가 보관을 잘못하여 물에 젖어버렸습니다. 얼른 햇볕에 말렸더니 가죽이 오그라지고 줄어들어서, 내 발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신었더니 두 발이 전족(纏足)을 한 것처럼 한 걸음에 아홉 번 넘어지는 꼴이라,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긍지(兢之)가 말하기를, “그대의 발이 너무 커서, 실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빌려서 신을 도리가 없을 것이오. 나귀나 말의 발굽에도 오히려 편자를 신기는데, 어찌 신발도 없이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아쉬운 대로 역졸의 짚신이라도 사다가 신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군이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군관의 복장을 하고 짚신을 신는다면 반드시 양국(兩國)의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유(士裕.변지화)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으니, 호인(胡人)들의 신발을 몰래 가져다 신으면 혹 전족처럼 괴롭지는 않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군이 머리를 저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토록 낭패에 이르렀으니 비록 발을 돌볼 겨를은 없지만, 오랑캐의 신발을 신고 장차 어디를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밥을 먹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유가 말하기를, “애초에 신발 한 켤레로 만 리를 다녀오려고 한 것은, 갓난아기가 아니라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군이 발끈하여 말하기를, “남의 곤란함을 보고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조롱을 하니, 그대는 불인(不仁)한 사람이외다.”라고 하고는, 그 발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하기를, “이 무슨 생각에 이리하였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네.”라고 하더니, 다시 스스로 자답하기를, “내가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로 마두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화를 내었다가 뉘우치고, 뉘우치다가 다시 남에게 죄를 돌리니, 어찌 생각없는 사람이라 놀림을 받지 않겠는가? 내가 보기에 한 번 웃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야!”라고 하였다. 이군이 말하기를, “만 리 길을 앞에 두고 신발이 없으니,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없는지라, 어찌 남의 탓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남의 탓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군이 그제야 웃으며 사과하기를, “집사(執事)의 말이 옳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가고 오는 길에 끝까지 이 신발과 운명을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발을 디딜 때마다 미간을 찡그리며 “애고!”라고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배꼽을 잡았다.
● 관내(關內)의 석하(石河)로 가는 길에서 문득 바라보니, 덕잠(德潛)이 말을 타고서 낭떠러지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낭떠러지는 높이가 두어 길쯤 되는데, 오른쪽에는 인가의 높은 담에 접하였고, 왼쪽에는 물이 가득한 깊은 골짜기에 임하였으며, 앞으로는 발을 내디딜 길이 없고, 뒤로는 말을 돌릴 만한 공간이 없으니, 울타리에 뿔이 걸린 양처럼 진퇴양난의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데, 여러 사람들이 놀라면서 묻기를, “거기는 어떻게 가셨소?”라고 하니, 덕잠이 분을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리며 울 듯이 말하기를, “저 무식한 말몰이꾼이 제 옷 젖는 것이 싫어서, 물을 건너지 않고 가는 지름길이 있다고 하면서, 가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아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듯이 말의 등에 목숨을 내맡기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탄식하면서 성을 내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였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발이 달라붙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말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화를 내어 보았자 소용이 없고, 빨리 안전하게 빠져 나올 방법이나 생각합시다.”라고 하였다. 덕잠이 말하기를, “어디서 계책이 나온단 말입니까? 방법이 있으면 좀 말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담을 타고 빠져 나오는 것이 가장 낫겠소!”라고 하니, 덕잠이 말 위에서 몸을 일으켜 손으로 기와를 잡고 담장에 올라가서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담장 위에 앉은 채로 말몰이꾼을 내려다보며 성난 목소리로 크게 꾸짖기를, “길 떠난 지 며칠 동안 너는 고삐를 잡고 말을 부린 적도 없고, 언제나 견마는 하지 않고 혼자 뒤에 따라오면서 술이나 마시고 담배나 피우며, 오로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문득 말을 잊어버려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그래서 산을 만나고 물을 만나면 10걸음에 9번은 넘어졌으니, 그렇게 해서 나를 말에서 떨어지게 한 것이 벌써 몇 번이더냐? 지금 이 지경으로 억지로 말을 몰아서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으니, 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돌아가서 사야(使爺)께 보고하여 살아서 우리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견마잡이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대답하기를, “날마다 입을 의복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모두 안장 위에 실었으니, 한 마리의 말이 사람도 태우고 짐도 실었습니다. 게다가 미륵 부처처럼 살찐 생원이 다리를 벌려 타지도 않고 걸터앉아서 힘을 쓸 때마다 눌러대니, 아무리 건장한 말이라 할지라도 등골이 부러질 지경입니다. 낮에는 헐떡이며 땀을 흘려서 힘이 없고, 밤에는 지쳐서 먹지 못합니다. 이 말이 쓰러져 죽게 되면 그 보상은 해 줄 것입니까? 그렇지만 만 리 긴 여정에 이나마 낭패를 면한 것은 모두 소인의 노력입니다. 함께 고생하는 마당에 한 번도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주며 격려한 적도 없이 무심하게도 도리어 윽박지르고 잘못만 지적하시니, 조선의 양반들이 모두 생원과 같으면 천한 이 놈은 거의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배꼽을 잡았다. 덕잠이 더욱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담을 넘어 내려와서는 바로 때리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려서 떼어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덕잠에게 말하기를, “저 놈이 본래 무지하고 무뢰한 부류이기는 하지만, 그 말은 옳으니, 그대가 길에서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말과 말몰이꾼뿐이니, 따로 은의(恩義)를 베풀어 술이나 음식을 먹여 기쁘게 하면, 저 놈도 반드시 감동하여 정성을 다할 것이니, 득실을 생각해 보면 그대에게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덕잠의 화가 약간 누그러지기는 하였으나, 끝내 충고를 따르지는 않았다.
● 우리 사신들이 이제묘(夷齊廟)에 이르면, 주방에서 반드시 고사리로 국을 끓여서 제공하는 것이 오래된 관례이다. 건륭 시절에 우리 사신의 건량관(乾糧官)이 깜빡 하고 미처 고사리를 사 오지 않아서 결국 고사리국을 제공하지 못하였는데, 사신들이 건량관을 잡아들여서 곤장으로 다스린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강에 이르렀는데, 건량관이 통곡을 하고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부르짖기를, “백이숙제야! 백이숙제야! 고사리가 사람을 죽이는 독채(毒菜)로구나. 듣자하니, 형과 아우가 수양산(首陽山)에서 캐서 먹다가 결국에는 굶주려 죽었다지? 나 같은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물고기나 고기보다 못할 터인데,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길래 고사리 먹는 법을 만들어 천 년 뒤에 내가 벌을 받게 하는가?”
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옛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 강희(康熙) 계해년에 식암(息菴.김석주)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진자진(榛子鎭)을 지나다가 객점의 벽에 쓰인 시를 보았는데,
몽당머리 하니 옛 단장이 속절없이 가엾고 / 椎髻空憐昔日粧
길을 나서자 월라상(越羅裳)도 다 닳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부모님 생사를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 爺孃生死知何處
봄바람에 통곡하며 심양 길을 올라가네 / 痛哭春風上瀋陽
라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 쓰여 있기를, “나[奴]는 강우(江右)의 수재(秀才) 우 상경(虞尙卿)의 아내이다. 남편은 피살되고 나는 지금 왕 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었다. 무자년 정월 21일에 흐르는 눈물을 벽에 뿌리며 이 시를 쓰노니, 부디 세상에 뜻 있는 사람이 계시거든 이 불쌍한 사연을 보고 구원해 주길 바라노라. 내 나이는 이제 21세이다.”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바로 계문란(季文蘭)이다. 김공이 마침내 그것을 적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뒤 30여 년이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공이 또 이 객점을 지났는데, 벽에 쓰인 글씨를 그때까지도 분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60여 년이 지나서 건륭 갑인년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사행을 쫓아왔다가 객점 벽에 쓰인 글귀를 두루 찾았으나, 이미 볼 수가 없었다. 연암이 북경에 당도하여 이 시를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 기풍액(奇豊額)에게 소개하여 들려주었더니, 기풍액이 주르륵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붉은 단장하고 하루아침에 되놈에게 팔려가게 되었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상심됨은 〈호가십팔박〉의 다섯 번째 곡조로다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의 사내 가운데 맹덕(孟德.조조)이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 한들 뉘라서 채문희(蔡文姬)를 속량할까 / 千金誰贖蔡文姬
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 인조(仁祖) 병자호란 시기(1636~1637)에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었으니, 그곳을 ‘고려포(高麗鋪)’라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 사신들이 이곳을 지날 때면, 하인들이 술과 음식을 사더라도 그 값을 받지 않았고, 아낙네는 피하지 않았으며, 간혹 고국의 소식을 들을 때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대개 오랜 정의(情誼)를 잊지 못해서이다. 그런데 역졸배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술과 떡을 공짜로 얻어먹고, 혹은 억지로 기물(器物)이나 의복을 요구하기도 하며, 심한 경우는 앞을 다투어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자행하였다. 이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도리어 사이가 틀어지고 다툼이 생겨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원수처럼 보고 매매를 하려 들지 않으니, 그 풍속이 점점 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주인들이 그들이 울먹이는 것이 싫고 딴마음을 먹을까 의심하여,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한 것이다.”라고 한다.
● 하루는 사류하(沙流河)의 객점에서 막 점심을 먹고 있는데, 긍지(兢之.홍희진)가 갑자기 혼자 말하기를,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을 언제나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내가 궁금하여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긍지가 말하기를, “흰 쌀[白粳米]과 누런 보리[黃麥]로 벽하주(碧霞酒) 두어 곡(斛.10말)을 빚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마셔보는 것이 첫째 소원이요, 물고기를 낚아서 비늘을 벗겨 내고, 소를 잡아서 고기를 저미어 국을 끓이고, 회를 쳐서 술안주로 삼는 것이 둘째 소원이요, 공산(公山)의 팔뚝만 한 무를 뽑고, 훈련원(訓鍊院)의 희디흰 배추 줄기를 채취하고, 청파(靑坡)의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서 인천(仁川)의 소금을 흠뻑 뿌린 다음, 파ㆍ마늘ㆍ생강ㆍ고추와 버무려서 두어 항아리에 절여 두었다가, 삼시 세끼의 반찬으로 하는 것이 바로 셋째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북방의 술은 석회를 섞은 것이 많고, 도수가 높아서 술병이 나기 쉽기 때문에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다. 또 주방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은 늘 두어 가지 마른 반찬을 조금씩 나누어서 한 접시에 담아 낸 것이어서 겨우 몇 숟가락이면 바닥이 나고, 생선이나 고기, 김치 등은 더욱 내어 올 형편이 못되니, 책문을 넘어선 이후로는 한 번도 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눈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듯하였다. 말이 끝나자 사유(士裕.변지화)가 말하기를, “말씀이 참 황홀합니다!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르고, 마시지 않고도 취한 듯하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익(士益.양종우)이 말하기를,
“술을 입에 대지 못하여 창자가 쉽게 마르고, 입에 맞는 반찬으로 식욕을 돋우지 못하여 음식을 먹는 것도 많이 줄어들었으니, 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입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하늘에 하소연하기를, 올해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가야 할 길이 점점 줄어들어 며칠 안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니, 그때 가서 소원을 이루게 되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매실을 생각만 해도 갈증이 그친다.’고 하는 격이라! 또한 ‘격화파양(隔靴爬癢)’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하고는, 함께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 옥전현(玉田縣)에서는 여러 비장들과 더불어 한가롭게 여기저기를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동문(東門)의 옹성(甕城) 안으로 들어가니 한 암자가 있었는데, 단청이 아직 선명하였다. 사유(士裕)가 먼저 법당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으악”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넘어질 듯이 냅다 달려 나왔다. 여러 사람들도 크게 놀라서 덩달아 따라나갔다. 문밖에 이르러서야 놀라서 소리를 지른 이유를 물어보았다. 사유가 손사래를 치고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연탑(蓮榻)에 관음상이 모셔 있고”라고 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음상을 보고 놀란 것이요?”라고 물으니, 사유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아니, 그 옆에 있는”이라고 하고는, 또 몸서리를 치며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몹시 해괴하여 다시 묻기를, “그 옆에 있는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장육불(丈六佛)의 모습이 무서웠던 것이요?”라고 하니, 사유가 말하기를, “아니요.”라고 하였다. 긍지(兢之)가 묻기를, “주둥이가 길쭉하고 털이 많은 8척의 맹견(猛犬)이 낯선 외국 사람을 보고 으르렁거리며 물려고 했던 것이요?”라고 하니, 사유가 말하기를, “아니요”라고 하였다. 사익(士益.양종우)이 묻기를, “고리눈[環眼]에 뾰족한 수염을 한 수문신장(守門神將)이 창을 잡고 바로 앞에서 찌를 듯하였는가?”라고 하니, 사유가 말하기를, “아니요”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일부러 두려워 떨면서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 했던 것이요?”라고 하니, 사유가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기를, “아니, 아니요, 그럴 리가 있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옆에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데, 그토록 놀라서 겁을 먹은 것이요? 차근차근 말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사유가 그제야 숨을 몰아쉬고 말하기를, “옆에 붉은 칠을 한 기다란 궤(櫃)가 있었는데, 장경(藏經)을 보관해 놓은 궤짝인가 여기고 다가가 열어 보려 하니, 틈도 없는 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그 냄새가 엄청 고약하여 코로 맡으면 토할 지경이라,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시체를 담은 관이었소. 모골이 송연(竦然)해지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겁에 질려 달려 나오느라, 나도 모르게 저절로 큰소리를 지른 것이요.”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일전에 사관(寺觀)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소?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더니, 이제 와서 왜 그리 놀라는 것이요?”라고 하니, 사유가 다시 웃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그랬던 게지요! 해는 저물고 혼자서 어두컴컴한 신당(神堂)에 들어가서 손으로 만지다가 그 냄새를 맡고,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을 보니, 어찌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익이 놀리면서 말하기를, “손으로 관을 어루만지고서 먼저 ‘애고(哀告)’ 곡소리를 내고, 이어서 벽용(擗踊)을 하였으니 ‘효(孝)’라고 이를 만하나, 물러나서는 행동거지가 평소와 다름이 없이 예전처럼 웃고 말하여, 거의 슬픔에 겨워서 경황이 없는 모습[哀遑之容]이 아니니, 또한 ‘불효(不孝)’라고 말하더라도 괜찮겠소.”라고 하였다. 사유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나를 욕보이려는 것이지만, 말은 옳은 말이요.”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사유가 무안해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정말 실언을 했소이다. 앞으로는 혹시 사묘(寺廟)에 가더라도 꼭 남들 뒤에 서지, 앞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 채정교(采亭橋) 노상에서 나의 수레를 모는 서대가 앞에서 말을 타고 가던 덕잠을 보고는 우리말로 장난삼아 말하기를, “어서 가자(於西可者)!, 어서 가자(於西可者)!”라고 하면서, 긴 채찍을 휘둘러 말의 볼기를 마구 때려서, 그 말이 놀라 뛰어오르며 달아났다. 덕잠이 크게 화를 내며 눈을 부릅뜨고 성난 목소리로 크게 우리말로 꾸짖기를, “너는 어찌 이리도 무례하냐? 일행들이 모두 나를 업신여길지라도 너 같은 오랑캐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이놈 보아라, 이놈 보아라!”라고 하였다. 서대가 이 말을 못 알아듣고서, 되레 웃으면서 다시 때리니, 말이 또 놀라서 뛰어올랐다. 덕잠이 더욱 화가 치밀어서 말하기를, “일행들 중에 말 탄 이가 많은데, 유독 내 말에 해코지를 하니, 나를 업신여겨서인가? 너 오랑캐 놈이 어찌 감히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대가 또 채찍을 휘둘러 매섭게 내려치니, 말이 이번에는 앞발을 들고 높이 솟구치며 날뛰듯이 달려 나가서, 덕잠이 하마터면 몸이 뒤집어지면서 땅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덕잠이 더 이상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불같이 화가 치밀었으나, 입으로 말을 내뱉지 못하다가 큰소리로 꾸짖기를, “이놈, 이놈, 네가 비록 오랑캐이지만 눈이 있고 귀가 있을 터인데, 어찌 감히 양반을 업신여기느냐? 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으냐? 장난이 심하구나, 장난이 심하구나!”라고 하고, 이어서 소리를 지르기를, “이놈 봐라, 이놈 봐라.”라고 하였다. 대개 서대가 부릅뜬 눈에 화난 기색만 보다가,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그제야 화가 많이 난 것을 깨닫고, ‘헤헤’ 웃으면서 우리말로 묻기를, “식사는 하셨습니까?”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담배 태우시겠습니까?”라고 하며, 계속해서 재잘거리며 한 번 웃어 주기를 바랐다. 덕잠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여전히 죽일 듯이 화를 내자, 서대가 말몰이꾼에게 모나지 않은 돌을 가져오게 하여, 제 손으로 자신을 때리며 말하기를, “네가 나의 말을 때렸으니, 내가 너의 노새를 다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는 이들이 모두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서대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마라(馬羅), 아서라(阿西羅).”라고 하였다. 덕잠이 그래도 화가 나서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수레 안에서 막 잠이 든 참이라, 처음에는 그 광경을 보지 못하였는데, 꾸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깨어나서 마두에게 전말을 상세히 묻고, 그 손짓과 오가는 말들을 보고서 크게 싸움이 일어날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발을 걷어 올리고 정색을 하고 덕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람은 반드시 제 자신을 업신여긴 뒤에야 남이 자기를 업신여긴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저 사람에게 화가 나게 하여 서로 틀어져서 흥분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체면을 잃고 막말을 내뱉게 될 것이니, 사신의 임무를 맡아 사람을 부리는 마당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저 놈이 남의 나라 양반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놈 봐라[儞看]’라는 두 글자를 알겠는가? 저 사람이 무례하면 피하는 것도 해될 것이 없으니, 장차 싸워서 무엇 하겠소? 그가 사행에 모욕을 입힌 것이 또한 적지 않고, 나도 그대가 다칠까 놀라고 탄식하였소. 내가 마땅히 그런 짓을 못하도록 할 터이니, 그대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덕잠이 무안해 하며 사과하기를, “집사(執事)의 말이 옳습니다. 삼가 충고를 따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가서 피해 버렸다. 마두가 서대에게 말하기를, “이노야(李老爺.이헌명)께서 화가 풀리지 않으셨으니, 너는 죄를 받을 게 분명한데, 어찌할 텐가?”라고 하자, 서대가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하기를, “나는 겁날 것이 없어! 나는 겁날 것이 없어!”라고 하였다. 내가 마두로 하여금 다시는 시끄러운 일이 없도록 서대를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후로는 서대가 덕잠을 볼 때마다 묻기를, “그대[儞]는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하며, 하루에 몇 번을 보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였다. 덕잠은 화가 나서 대답하지 않고, 책문으로 되돌아 올 때까지 서대와 끝내 말을 나누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몰래 웃었다.
● 단가령(段家嶺)에서 저녁을 먹었다. 양사익(梁士益.양종우)과 역관 박시영(朴時榮)이 와서 말하기를, “이 마을에는 ‘양한적(養閒的)’이 있으니, 바로 우리나라의 기녀와 비슷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비록 경사대부(卿士大夫)라 할지라도 모두 술집과 창가(娼家)에 출입하기를 꺼리지 않습니다.”라고 하고서, 나에게 한 번 가보기를 청하여서 허락하였다. 마두(馬頭)가 먼저 당전(唐錢) 200으로 지면지례(知面之禮)를 한다고 하니, 관례가 그러하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비장, 여러 역관과 함께 가서 마두의 안내를 받아 내가 먼저 들어갔다. 이른바 양한적은 얼굴에 붉은 분을 바르고, 머리는 높게 틀어 올렸는데, 산호와 벽옥으로 만든 비녀를 가득 꽂고, 울긋불긋한 조화로 장식을 하였다. 옷은 초록 저고리에 주황색 바지를 입었는데, 그 위에 한 벌의 아청(鴉靑) 빛깔에 복숭아꽃 무늬를 놓은 치마를 입고, 촘촘히 은으로 만든 단추를 달았으며, 발에는 화초를 수놓은 한 쌍의 만혜(彎鞋)를 신었다. 나이는 20살쯤 되어 보였는데, 비록 아주 아름답지는 않지만 요염하고 교태가 있어서, 당(唐)나라 그림에 나오는 미인과 닮았다. 나를 보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인사를 하는데, 그 목소리가 꾀꼬리 같았다. 뒤에 여러 사람들이 따라서 일제히 들어오자, 그 여자가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면서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서 무어라고 조잘거렸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협문(夾門)을 통해 들어가 버리고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무안해 하며 물러섰으나,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마두가 말하기를, “그 여자의 말이 ‘지면지례(知面之禮)의 돈 액수는 원래 정해진 관례가 있는데, 지금 사람은 많고 돈이 적으니 무슨 모양새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는 모두 웃으며 비루하게 여겼다.
●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있으면서 매양 5일에 한 번씩 태후에게 문후를 하는데, 우리나라 사신들을 모이게 하고, 삼사(三使) 이하를 아침 일찍 동교(東橋) 어귀의 큰길가로 나아가 영접하도록 하였다. 나는 “비록 벼슬도 없고 사신으로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까지 들어와서 천자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여러 역관들의 공복(公服)을 빌려 입었는데, 그 해진 모자는 너무 커서 양쪽 눈썹을 다 덮고도 오히려 남았으며, 좀이 먹은 신발 또한 두 발을 다 넣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른바 ‘단령(團領)’이라고 하는 것은 푸른 빛깔도 아니고 검은 빛깔도 아니며 옷깃은 터지거나 찢어졌는데, 땅에 끌릴 정도로 길어서 마치 노인이 이불을 안은 것 같고 신부가 치마를 잘잘 끄는 듯하였다. 비록 스스로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길거리 아이들이 놀라 달아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고, 필시 이웃집 개가 보고 짖을 것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침내 행렬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 바라보았는데, 대체로 그 의위(儀衛)가 간편하면서도 호위하는 기병들이 군데군데 따르고 있어서, 숙연하여 떠드는 소리가 없으니 아주 본받을 만하였다.
● 시골에는 모두 우물이 있는데, 반드시 벽돌을 쌓아 만들고, 큰 돌로 덮개를 하였으며, 양쪽 가에 구멍을 뚫어서 두레박이 겨우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람이 빠지거나 할 염려가 없다. 간혹 위에 도르래를 설치해 놓기도 하였는데, 양쪽으로 두레박줄을 드리우고 그 밑에 버드나무로 만든 바가지나 나무로 만든 표주박을 매달아 놓았다. 한 번 올리고 한 번 내리는데,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퍼 올릴 수가 있다. 길은 물을 옮기는 방법은 길이 1장(丈)쯤 되는 작대기 하나의 양쪽 끝에 땅에서 1척 남짓 떨어지게 물통을 매달고, 이것을 반드시 어깨에 메는데, 이것을 ‘편담(扁擔)’이라고 한다. 만약 왼쪽 어깨가 아프면 오른쪽 어깨에 교대로 메는데, 좁은 길을 지날 때라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니, 우리나라 평양에서 쓰는 ‘등에 지는 방식[背負]’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다.
● 길에는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전혀 없고, 간혹 귀머거리와 장님, 절름발이와 앉은뱅이 등이 있어서 머리를 조아리며 돈을 구걸하는데, 이들 또한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른바 도사(道士)들은 몸에 도포를 걸쳤는데, 모두 검은색 바탕에 방령(方領)이며, 머리에는 등나무 삿갓을 쓰고, 맨발로 다니며 바리때를 두드리며 길가에서 돈을 구걸한다.
● 몽고인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머리털을 깎고 얼굴을 씻지 않는다. 용모가 건장하고 누런 옷에 누런 모자를 쓰며,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모습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늘 호기롭게 야숙(野宿)을 하여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낙타를 타고 황성(皇城) 안을 왕래하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들으니 48부(部)의 추장(酋長)이 있는데, 각기 왕이라는 호칭을 쓴다고 한다. 서번(西番 티베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방의 총칭)은 이보다 더 사납고 험상궂기 때문에 청나라가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 연도(沿道) 수천 리에 저들이 똥오줌을 누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 ‘뒷간[溷厠]’이라는 명칭도 없다. 대개는 요강[尿器]을 쓰는데, 남녀를 구분하여 각각 그 모양을 그려놓기 때문에, 깊이 넣어 두고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똥거름은 농가의 필수품으로 금처럼 소중하게 여기니, 길에 버려진 똥이 없고, 우리 사신 일행을 만나면 반드시 삼태기를 가지고 뒤를 따라오면서 다투어 말똥을 줍는다. 그 똥 무더기는 반듯하게 쌓아서 8각 혹은 6각이 되게 정돈하여, 조금도 무너지거나 흐트러짐이 없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가게 되면 각자 본 것을 가지고 반드시 ‘천하제일의 장관’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요동 천 리’라 하고, 어떤 이는 ‘만 리의 장성’이라 하며, 어떤 이는 ‘길가의 시장과 점포’라 하고, 어떤 이는 ‘계문연수(薊門烟樹)’라 하며, 어떤 이는 ‘통주(通州)의 주즙(舟楫)’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서산(西山)의 누대(樓臺)’라 하며, 어떤 이는 ‘동악묘(東岳廟)’라 하고, 어떤 이는 ‘유리창(琉璃廠)’을 꼽는다. 모두가 본 것이 같지 않으니, 그 설도 각각 다른 것이다. 만약 나더러 제일 장관을 말하라면 오직 관외장대(關外將臺)를 꼽을 것이니, 대개 누대의 높이는 10여 장(丈)에 지나지 않지만, 동쪽으로 천 리의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만 길의 성벽이 눈앞에 들어오며, 큰 바다가 남쪽을 지나고, 첩첩한 산들이 북쪽을 에워싸고 있어서, 한 눈에 동서남북 사방의 웅장한 형세를 관할하고, 천고의 위대한 자취들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어라 무어라 주워섬기는 것들은 모두 한때 눈을 즐겁게 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것들일 뿐이니, 어찌 이 관외장대의 장관과 같이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 우리나라의 우졸(郵卒.역졸)들은 한 번 압록강을 건너기만 하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가는 일들을 능사로 한다. 얼굴은 씻지 않고, 두건도 쓰지 않으며, 머리털은 헝클어뜨리고, 옷과 갓은 해지거나 찌그러지고, 먼지와 땀이 뒤범벅이 되어,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꼴을 하고 있다. 들르는 점포에서는 시장의 물건들을 훔치려고 엿보기도 하고, 간혹 보배나 진귀한 물건을 속여서 취하기도 하며, 해진 신발이나 깨진 그릇이라도 반드시 훔치고야 만다. 사신의 명령을 받들고 가는 자가 진실로 그 간악한 실상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혹 이를 금하더라도 수치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그 버릇이 고쳐지지를 않는다. 그래서 빈손으로 가서 한 푼의 돈도 없었던 자가 돌아올 때가 되면, 모두 갖옷을 입고 물건을 짊어지지 않은 이가 없으니,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만나면, 마치 호랑이와 표범을 두려워하듯이 하고, 뱀과 전갈을 피하듯이 하여, 서로 경계하고 지키면서 ‘창도(槍盜)’라고 부른다. 이번 행차에 내가 마두배들을 보니, 모두 호구(胡屨)를 신고, 수천 리를 왕래하면서 짚신을 신지 않으니, 또한 그 습성을 알만 하다. 일찍이 들으니, 전에 한 마두가 여러 사람들과 섞여 만불사(萬佛寺)로 들어가서 순금으로 된 작은 불상을 훔쳐서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하례(下隷)들이 문안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다. 또 다른 하례는 북경의 시장에서 교역을 할 것처럼 속이고서, 객관으로 돌아가서 물건 값을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고 물건들을 많이 취하려고 하였는데, 주인이 의심하고 물건을 팔지 않자 문득 다른 사람을 증인으로 내세우고는 물건들을 지고 시장을 벗어나서, 곧장 통주(通州)에서 50리 떨어진 곳으로 달아나버렸다. 상인은 오랫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자, 장사를 접고 찾아가 보니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사방으로 찾아 헤매다가 만나지 못하자, 그제야 사기를 당한 줄 알고 사신의 일행이 막 떠나려는 즈음에 와서 떠들썩하게 소송을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 간사함이 이처럼 놀랍고 한탄스러운 지경이니, 이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시장 사람들이 돈이 없이 교역하는 일을 금지하게 되었다. 그 수치스러움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있겠는가?
● 황성(皇城)의 정양문(正陽門) 밖에 회관(會館)이 있고, 멀리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니, 마치 우리나라의 서울에 지방 군읍(郡邑)의 경저(京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의학(義學)’이란 곳이 있어서, 그 재(齋)가 16곳인데, 대개 여러 성(省)의 학도(學徒)들이 나누어 머무른다. 이는 매양 각 성에서 문학으로 가장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가르치는 곳인데, 그 송독하는 소리가 또랑또랑 끊이지를 않는다.
● 연도(沿途)에서 황성(皇城)에 이르기까지 ‘명승지’라고 일컬어지는 곳에는 모두 건륭제가 쓴 시나 글이 있으니, 궁금(宮禁) 안의 문과 당(堂) 하나하나에 모두 글을 붙이고 시를 써 놓지 않은 곳이 없다.
● 청나라 초기에 그 군대를 나누어 팔기(八旗)로 편제하였는데, 왕공(王公) 이하가 모두 여기에 예속되고, 각기 만주 대신(滿洲大臣)이 있어 이를 통솔한다. 대체로 만인(滿人)을 일컬어 ‘기하(旗下)’라고 하고, 화인(華人)을 일컬어 ‘민가(民家)’라고 한다.
● 《연암일기(燕巖日記 《열하일기》)》에 이르기를,
명나라 때에 이른바 ‘삼액(三厄)’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남당(南唐)의 장소낭(張宵娘)이 송(宋)나라의 궁궐에 잡혀 갔을 때, 궁인(宮人)들이 다투어 그 작은 발이 뾰족한 것을 좋다고 여겨 배워서, 헝겊으로 발을 팽팽하게 싸매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원나라 때에는 한족(漢族) 여자들이 만주 여자들과 한 가지로 보일까봐 부끄러워하여, 작은 발에 만혜(彎鞋.활굽정이처럼 생긴 신)를 신는 것으로 스스로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여, 죽더라도 고치지 않았다. 명나라 때에는 죄를 그 부모에게까지 물었고, 지금 청나라에서도 전족을 금지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였다. 대개 발꿈치로 땅을 디디고 걷는 모습이 좌로 흔들 우로 기우뚱, 바람도 없는데 쓰러져서 10번을 엎어지고 9번을 넘어지니 이것이 ‘족액(足厄)’이다.
명 태조(太祖.주원장)가 일찍이 몰래 신분을 감추고 신락관(神樂觀)에 거둥한 적이 있는데, 한 도사(道士)가 망건 짜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싸매면 편리할 듯하여 태조가 그것을 빌려서 거울 앞에서 한 번 매어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이 제도를 시행하도록 천하에 명령하였다. 그 뒤로 말갈기로 실을 대신하였고,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만큼 단단히 졸라매게 되었다. 그 이름을 ‘호좌건(虎坐巾)’이라고 한 것은 앞쪽이 높고 뒤쪽이 낮아서, 마치 범이 쭈그리고 앉은 모양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비웃기를, “세상의 머리와 이마가 모두 그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두액(頭厄)’이다.
만력 말년에 연초(烟草)가 일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와서 ‘남초(南草)’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좋은 밭과 비옥한 땅에 재배하여 이익이 곡식과 다름이 없고, 부인과 어린아이들까지도 소가 여물을 먹듯이 좋아하는데, 곰방대에서 쇠[金]와 불[火]이 함께 입을 단근질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어지러워 넘어지게 되니, 천하의 독초이다. 이것이 ‘구액(口厄)’이라 하였다.
● 덕잠이 의술을 좀 알았다. 북경에 가는 길에 고교보(高橋堡) 인근의 객점에서 장씨(張氏) 성을 가진 사람의 팔순 부친이 병이 들었는데, 동의(東醫)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과 안주, 당과(糖果)를 가지고 와서 덕잠에게 왕진하여 처방을 내려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영원위(寧遠衛)에 묵었는데, 사유가 나에게 말하기를, “여행길에 피로를 달랠 만한 좋은 거리가 있으니, 같이 한 번 웃을 만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무슨 영문인지 물으니, 사유가 말하기를, “덕잠이 지난번 고교점(高橋店)에서 장 노인의 병을 진찰하였는데, 들으니 이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고교점을 지날 터인데, 만약 여차여차(如此如此)하게 말을 한다면, 덕잠이 반드시 겁에 질릴 것이니, 볼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무 짓궂지 않소?”라고 하니, 사유가 말하기를, “장난을 치는 것일 뿐 딱히 해를 끼치는 것은 없으니, 무어 나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덕잠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집사께서 권하여 저에게 물어보게 하시고, 그때 가서 제가 또 여차여차하게 말한다면, 덕잠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어째서 그대가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이요?”라고 하니, 사유가 말하기를, “반드시 집사(執事.한필교)께서 점잖게 한마디 해 주셔야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과연 덕잠이 들어왔는데, 내가 대략 그 일을 거론하고 나서 말하기를, “들으니 여러 자식들이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역만리에서 원한을 맺는다면 말로 풀기도 어렵고,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스럽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덕잠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몹시 놀라면서 다급하게 묻기를, “이 무슨 말입니까?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지난번에 진찰을 하였을 때는 노환으로 병이 났을 뿐이라, 몸을 보하는 처방을 썼을 뿐인데, 어찌 그것 때문에 죽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허물을 내게 돌려 원한을 갚겠다고 한다면,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큰일이로다! 큰일이로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다만 여러 비장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니, 변군(卞君)에게 한번 자세히 물어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덕잠이 허둥대며 겁을 먹고는 곧장 사유에게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사유가 연신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어설픈 재주를 믿고 경솔하게 강한 약제를 써서 남의 나라 노인의 목숨을 재촉하였도다! 들으니 일곱 명의 자식들이 원한을 참지 못하고, 각기 창과 몽둥이를 들고 바야흐로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오! 만 리 이국 땅의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면, 그대가 무슨 곤욕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본국에까지 부끄러운 일이 알려진다면 또한 작은 일이 아니외다! 비록 스스로 저지른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옆에 있던 여러 비장들도 겁을 주면서 두려운 말들을 쏟아내니, 덕잠이 넋이 나가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면서 다만, “이 일을 어찌할꼬!”라고만 말하였다. 그리고는 급히 일어나서 나갔는데, 이튿날 일찍 출발하려고 보니, 유독 덕잠이 보이지를 않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모른다고 하였다. 30리를 가서 연산역(連山驛)에서 밥을 먹고, 또 30리를 가서 고교보를 지났는데, 그때까지도 덕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18리를 가서 행산점(杏山店)에 묵었는데, 갑자기 덕잠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놀라서 묻기를,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더니 어찌된 영문이요?”라고 하니, 덕잠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고교보에서의 일을 듣고는 심신(心神)이 황망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벗어날 방법이 없는지라, 어젯밤에 혼자서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여 새벽에 고교보를 우회하여 곧장 이곳에 다다르니, 아직도 날이 밝지 않은 시각이었습니다. 다행히 화는 면하였으나, 밤낮으로 먹지를 못하여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고, 간담을 졸여서 머리가 온통 하얗게 셀 지경입니다. 본의 아니게 평소 자신하던 재주를 시험하였다가 일생에 겪어보지 못한 고생을 실컷 하였으니, 앞으로 귀국하게 되면 다시는 남에게 의술을 시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비장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아직 방심할 순 없으니, 이곳에서 고교보까지 거리가 20리가 채 못 되니, 저들이 만약 우리가 여기 머무는 것을 알게 되면, 장차 뒤를 쫓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덕잠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였다.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포복절도하였다.
● 북경에서 떠도는 말에 이르기를, “명나라 말기 서울에는 거지가 상인보다 많고, 내시가 평민보다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저자가 마을보다 많고, 옥이 곡식보다 많으며, 황금과 벽옥이 흙과 나무보다 많고, 낙타가 소나 말보다 많다고 한다.
● 빈과(蘋果)는 지금 우리가 사과(沙果)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이러한 이름이 없었는데, 효종(孝宗)의 부마(駙馬)였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중국으로 사신을 갔다가 접을 붙인 가지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때부터 비로소 나라 안에 퍼지게 된 것이다.
● 청나라 조정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황제의 이름을 휘(諱)하는데, 그 이름 두 자 중에서 또한 한 자를 휘한다. 모든 공사(公私)의 문서에서는 반드시 이음동의(異音同義)의 글을 대신 사용하는데, 만약 부득이한 경우에는 반드시 본래 글자를 따르되, 한 획을 생략하거나 한 점을 빼기도 하여, 그 구차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대개 두 자 이름에 한 자를 휘하는 것이 이미 옛 법이 아닌데, 하물며 글자의 모양을 바꾸는 것은 더욱 전례가 없는 것이니, 거의 아첨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신들이 장차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반드시 일행들에게 경계하여 우리나라 동전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한다. 이미 정축년의 약조는 없어졌고, 또한 중국에서 금지하는 물품도 아니지만, 그 관례가 그러하다고 한다. 《연암일기(燕巖日記)》에 이르기를,
어떤 이는 조선통보(朝鮮通寶)가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동전이기 때문에 신통한 효험이 있다고 하여, 점을 치는데 사용하곤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보배처럼 여긴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세종(世宗) 때 주조된 것이니, 기자조선 시절에 어찌 해자(楷字)가 있었겠는가? 송나라 때 동유(董逌)의 《전보(錢譜)》에 우리나라 동전 모두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으니, 하나는 삼한통보(三韓通寶), 둘째는 동국통보(東國通寶), 셋째는 동국중보(東國重寶)이다. 오직 조선통보는 실려 있지 않으니, 그것이 오래된 동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 역관들이 북경에 가서 매매하는 물품들은 비록 차(茶)나 약(藥)처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진품인지 가짜인지를 가리지 않고, 좋은지 나쁜지도 구분하지 않고 다만 가격이 싼 것만을 사며, 무게가 많이 나가서 운반하여 돌아오기 힘든 경우에는 변문(邊門.만주 봉황성의 책문밖을 말함)에서 교역을 한다. 그래서 모두 품질이 떨어져서 쓸 수가 없고, 비록 좋은 물건을 사서 돌아온다 할지라도 국내에서는 그 가격에 팔 수가 없으니, 도리어 밑지는 장사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진품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대개 관직이 없이 사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반당(伴倘)’이라고 하는데, 저들이 군복을 입은 우리 사신을 보면 흔히 ‘하(蝦)’라고 일컬으니, 이는 무부(武夫)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오리’(加五里.중국 음으로 高麗) 라고 부르는데, 연암(燕巖.박지원)이 일찍이 동행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반당(伴倘)이라고 하는 것은 밴댕이[蘇魚]이다. 하(蝦.새우)라고 하는 것도 어류(魚類)이고, 가오리라고 하는 것은 홍어(洪魚)이다. 그러니 결국 내가 세 번 어류로 변한 셈인가!”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을 가오리[高麗]라고 부르게 된 것은 대개 오래된 일이니,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시대에 고구려를 또한 ‘가오리’라고 불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구려는 금와(金蛙)의 후예이니,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皆句驪)’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 이름 앞에 고씨(高氏) 성을 얹어서 국호로 삼은 것이다.”라고 한다.
● 청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해 혜택을 주어서 덕을 보이려는 정책을 취하였고, 그것을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있다. 세폐(歲幣.조선에서 청나라에 해마다 보내는 공물)를 줄이거나 돌아오는 길에 칙사(勅使)를 함께 보내는 일은 옛날의 성대했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적인 후대를 바라기도 하고, 혜택을 믿고 도리어 홀대하기도 하며, 모든 일처리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청탁을 해서 이루어 내고, 일을 의논하는 데 배려하는 법이 없다. 이렇게 해서 통관(通官)들의 농단은 더욱 심해지고, 서리(胥吏)들의 뇌물은 더욱 많아지며, 역관(譯官)들은 오로지 협박을 일삼느라 겨를이 없고, 명령을 받던 사신들은 새장에 갇힌 새가 되기를 감수하여 허실을 알지 못하니, 무엇을 가지고 일을 절충하고 대응하여 나라의 위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말몰이꾼들조차도 모두 저들을 하찮게 보고, 왕왕 머리채를 끌어당기거나 발길질을 하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저들은 감히 대들지는 못하고 공손한 말로 피해 버리곤 한다. 비록 사나운 몽고인들을 만나더라도 또한 마찬가지로 행동하니, 이 때문에 저들은 우리나라 사람 보기를 뱀이나 범과 다름없이 여긴다. 이는 본래 혜택을 믿고서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지만, 그들이 받은 모욕과 수치가 또한 훗날의 근심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명령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이 점을 몰라서는 아니 될 것이다.
● 필담(筆談)이란 붓으로 입을 대신하는 것이다. 의자를 마주하고 앉아 비록 입으로 말을 통하지는 못하지만, 붓으로 구구절절하게 심회를 모두 풀어놓는 것이니, 차분하고 점잖으며 꾸미는 말과 떠드는 소리가 없으니, 입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중국 사람들은 필담에 민첩하여, 비록 표현이 난삽하고 글이 길더라도 반드시 종이만 있으면 바로 써 내려가는데, 간단하면서도 뜻이 분명하며 조리와 맥락이 서로 뒤섞이지를 않는다. 시를 지을 때도 또한 그러하니, 대개 서로 시를 주고받는 사이에 뜻에 맞는 구절이 있으면 반드시 옆에다 권점(圈點)을 치고, 어떤 경우는 웃어넘기며 이르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머리를 끄덕이며 이르기를, “참으로 좋습니다. 참으로 좋습니다.”라고 한다.
● 우리나라의 의관(衣冠)은 모두 중국의 옛날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신선처럼 훤칠한데, 저들의 홍모(紅帽.청나라 관원들이 쓰는 붉은 모자)와 마제수(馬蹄袖)는 비록 몸을 놀리는 데는 민첩하지만, 위의(威儀)가 전혀 없어서, 한인(漢人)들만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도 스스로 창피스러워한다. 그렇지만 왔다 갔다 하면서 접대하는 모습을 보면, 한결같이 숙련되고 의젓하여 교만한 모습이 없으며, 느긋하고 여유로워서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는다. 또한 법을 두려워하고 몸을 삼가며, 법도를 지키고 속되지 않아서, 한 번도 망녕된 말이나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친지를 만난 듯이 반기어 반드시 허리를 안고 도닥이거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은근한 뜻을 보인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만 한 줌 상투를 뽐내며 천하에 잘난 체를 하면서 억지로 뻣뻣하게 거드름을 피우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절로 드러난다. 그러니 저들이 반드시 우리들의 무례함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잠깐씩 서서 대화하는 사이에 어찌 마음을 곡진하게 드러내 보이려 할 것이며, 저들 조정의 정치적 득실과 민심의 향배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책문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를 가는 사이에 혹은 산과 숲을 지나기도 하고, 혹은 강과 늪을 건너기도 하였으나, 두꺼비와 개구리, 뱀과 호랑이가 다니는 것을 보거나, 갈매기와 해오라기, 꿩과 제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까마귀와 까치, 솔개와 기러기조차도 겨우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니, 몹시 이상한 일이다.
● 한족 여인들은 모두 금과 은, 백철 등으로 둥근 팔찌를 만들어서 오른쪽 팔에 끼는데, 우리나라의 반지처럼 남자들도 혹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양치를 하지 않아서, 이에 누런 때가 가득 끼었기 때문에, 늘 산자(蒜子.마늘)를 씹어서 그 냄새를 막는다.
● 모든 젖먹이 아기들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방법이 있으니, 버드나무로 만든 둥글고 길쭉한 바구니를 바닥에서 1척 남짓 떨어지게 대들보 사이에 걸어놓고 아기를 그 속에 뉘어둔다. 그 엄마는 캉[炕]에 걸터앉아 손으로 길쌈을 하면서, 발로 바구니를 밀어서 흔들흔들하여 멈추지 않으면, 곧 아기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든다.
● 호미나 쟁기와 같은 농기구는 모두 우리나라 것과 비슷하나 훨씬 작다. 반드시 소나 말, 나귀나 노새에 멍에를 메어서 사용하고, 간혹 두세 마리를 함께 써서 논밭을 가는 일을 돕는다. 밭두둑은 모두 좁고 긴데, 화살처럼 곧게 뻗어 있어서 한 곳도 구부정하거나 뒤엉킨 곳이 없다.
● 민가의 주방에 간혹 시체를 담은 관(棺)을 놔두어 그 냄새가 지독한데, 그 곁에서 평상시처럼 밥을 짓곤 한다. 어떤 이가 묻기를,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는데, 어찌 차마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짓습니까?”라고 하자, 그 사람이 태연하게 말하기를, “이도 역시 사람인데, 사람이 어찌 사람을 피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냉소를 띠었다.
● 어떤 장사치 한 사람이 무슨 물건인가를 어깨에 메고 길을 가는데, 민가의 한 사람이 의자에 걸터앉아서 그를 불러서 앞으로 오게 하였다. 이에 장사치가 메고 있는 짐을 풀어서 열었는데, 세 층으로 된 백철합(白鐵盒)이 있었다. 그 합의 가운데는 물을 담는 그릇이고, 아래 칸은 화로이며, 위 칸은 빗과 머리를 깎는 도구가 들어 있었다. 먼저 참빗과 얼레빗 두 개로 빗질을 하고 나서, 따뜻한 물을 머리에 바른 다음, 날카로운 칼로 그 머리를 깎고 나서, 다시 솔을 가지고 깨끗이 털어내니, 어느새 번쩍번쩍하는 삭발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돈을 받아서 가버리니, 이는 이른바 이발쟁이[剃頭匠]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백철합에 따뜻한 물을 담아서 남의 발을 씻어 주는 이도 있고, 손톱을 깎거나 이를 뽑아 주는 사람까지 있으니, 또한 모두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대개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이 이처럼 어려운 것이니, 때문에 백성들 누구나가 한 사람도 놀고먹는 이가 없다.
●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버들고리를 하나 메고, 오른손에 긴 꼬챙이[鞭] 하나를 들고서, 땅바닥에 큰 침을 꽂아가며 황성 거리를 두루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간혹 작은 천 조각이나 종잇조각이 있으면, 바로 침이 달린 꼬챙이로 꽂아 주워 올려서 버들고리에 담는데, 털끝만 한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크고 작은 거리에 지저분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주운 것들을 어디에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무엇 하나도 버리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황명(皇明) 만력 9년(1581)에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중국으로 들어와서 북경에서 29년을 살면서 마침내 역법(曆法)을 만들었으니, 대개 만력 기년(萬曆紀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 청(淸)이 처음 일어나던 때에 어떤 이가 청 태종에게 우리나라에서도 머리털을 깎도록 시킬 것을 권하였는데, 태종이 이에 응하지 않고, 은밀히 여러 패륵(貝勒)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고 일컫고 머리털을 아끼는 것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제 만약 억지로 깎도록 시킨다면 반드시 반역하려 들 것이니, 풍속을 그대로 따르게 하면서 예의(禮義)로 구속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도리어 저들이 우리 풍습에 익숙해진다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편리할 것이니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 건륭 무진년(1748)에 장하(漳河)에서 자맥질하며 물고기를 잡던 자가 허리가 끊어진 채 물 위에 떠올랐다. 황제가 병졸 수만 명을 풀어서 따로 땅을 파서 옆으로 물길을 내고, 하수(河水) 가운데를 살펴보니, 수많은 쇠뇌에 화살이 메워져 있고, 그 아래에 무덤이 있었다. 마침내 그 관을 파내어 보니, 은해(銀海)와 금부(金鳧), 그리고 황제의 면류관과 복식을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바로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제묘(關帝廟)에 이르러 소열(昭烈.유비)의 소상(塑像) 앞에서 시신의 무릎을 꿇리고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해서 그 옛날 신인(神人)의 분통함을 풀고, 또 72총(塚)의 의혹(疑惑.조조가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무덤이 있는 곳을 숨겼다)까지도 시원하게 밝혀내었다고 한다.
● 중국에서 무관(武官) 4품 이상은 모자의 꼭지에 공작 깃을 매달고, 문신(文臣)은 하사받은 다음에야 매달 수 있으니, 그것으로 영예를 삼는다. 우리나라에서 한겨울에 갓을 쓰고, 눈 내리는 날에 부채를 드는 것을 저들은 비웃는다고 한다.
● 역졸들은 원래 놀고먹는 무리들이다. 다만 호구지책으로 만 리 길을 걷는 것이니, 추운 날씨에 노숙을 하여 눈과 바람을 맞고, 손발이 얼어 터지며,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한다. 그렇게 하여 돌아와서 간신히 책문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동지사(冬至使)의 일행을 만나면, 또 따라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어떤 이가 묻기를, “너희들은 반년 동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몸이 지쳤을 것이고, 이제 이곳까지 왔으니 돌아갈 집도 멀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만약 너희들을 부려서, 또 다시 발길을 돌려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들어간다면, 원망스럽고 힘든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만약 소인들을 부려서, 지금 발길을 돌려 여행길에 오래도록 있을 수 있다면, 이야말로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니, 무슨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이들은 이익을 좇느라 그 말이 이와 같지만, 사람의 인정으로는 그러기 쉽지 않은 일이다.
●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멀리 의주(義州)의 산천과 인물들이 보이면 모두 내 고향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느껴지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곽과 민가들이 몹시 쓸쓸하고 황량하여 중국의 일개 작은 보(堡)에도 미치지 못하니 불현듯 한심한 생각이 든다. 비로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강물이 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번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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