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3
7월9일[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tWV7cd8tJc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상국 요셉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는 양들에게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때 이른 폭염과 장마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특히 농사짓는 분들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불볕더위와 과도한 비바람에 농작물들도 힘겨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예초를 한다고 잠깐 나갔었는데 사우나가 따로 없습니다. 잡초들을 바라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다!’ 어찌 그리도 생명력이 왕성한지요. 뽑아도 뽑아도 또 자라납니다.
한바퀴 예초를 쭉 하고 돌아서면 벌써 저쪽 끝에서는 또 다른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뿌리는 얼마나 튼튼하고 깊이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방심했다간 피정 센터 전체가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이게 됩니다.
잡초제거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는 정작 원하는 농작물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왕성한 식욕을 지닌 잡초들이 모든 영양분들을 다 흡수하다보니 농작물들은 시들시들, 삐쩍 말라 휘청거리다가 결국엔 죽어버립니다.
좋은 결실을 기대한다면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꾸준히, 일상적으로 잡초를 뽑아줘야 합니다. 그것이 농작물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도 일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당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던 사람들,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던 사람들만을 우선적 사목 대상으로 선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일 지금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인 교세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신축부지 마련이나 신축도 중요합니다. 성지의 개발도 중요합니다. 신자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각종 단체의 활성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시대 살아있는 교회이자 성지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UjmXiXOWUM
++++++++++++++++++
<믿고 싶으면 어린이와 같은 관찰자로 살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두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마귀를 쫓아낸 것을 본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하고,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들은 관찰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린이의 행동을 심판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어른의 모습보다는 어린이의 겸손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관찰하며 결국엔 부모를 찾아내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찰을 통해 찾아내고 믿은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의심해봐서 이 과정을 잘 압니다. 자연과 사람, 법칙과 존재의 놀라움을 관찰하면 창조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1898-1963)는 30대 초반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법이 존재하면 그 법을 만든 곳이 있어야 하고 화폐가 있다면 그 돈을 찍어낸 곳이 한 곳만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도 화폐도 상대화되기에 가치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자신의 추론을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유신론의 대가인 C.S. 루이스와 대척점에 서서 무신론을 주장하며 1950년 토론 대결 이후 30권 이상의 책을 쓴 교수가 앤서니 플루(1923-2010)입니다. 그는 무신론 대표주자입니다. 1976년 발행한 그의 유명한 논문 ‘신학과 위증성’은 그동안 무신론의 교과서처럼 인용되었습니다. 그가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이 있지 않다고 믿는 근거는 이것입니다.
a. 우주가 영원하며, 항상 있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b. 생명은 무작위적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다.
c. 하느님의 존재는 자기 모순적이다; 악과 하느님은 공존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을 어떤 지적인 인격체가 설계하였다는 데 대해 과학이 그 복잡성을 설명해 줄 것이라 믿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함께 시작하고 끝납니다. 매일 느낄 수 있는 상식과 경험에 의해 이 세상의 숨겨진 매커니즘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밝혀질 것입니다.”
약 50년의 세월 동안 무신론에 관한 30권의 책을 낸 플루 교수는 2004년 뉴욕 대학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온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지적인 존재의 작업이라고 여겨지는 거대한 복잡성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플루 교수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동물계 전체에 걸쳐 나타난 시각은 물론 기본적인 번식의 필요까지 완전한 형태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화석 증거가 있으며, 이 생명의 발생은 DNA에 기록되어 있고 DNA에서 RNA로의 전사,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로의 전환, 이어지는 단백질의 접힘은 플루 교수가 창조주를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DNA가 하는 일들은 믿을 수 없는 복잡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열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요. 극도로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에는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연히’라는 말이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번개가 쳐서 무생물에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단백질의 형태를 띠며 자기를 복제하는 능력을 갖추고 단세포 동물이 되는 데까지 우연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래가 우연히 모여서 시계가 되거나 반도체가 되거나 아니면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기를 두들겨 햄릿이라는 책이 만들어질 가능성보다 비교도 안 되도록 어렵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다 우연히, 우연히라고 하며 넘기지만, 앤서니 플루는 50년간 무신론의 책을 내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진화론자들에게 이 세 가지를 묻습니다.
a.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b. 목적론적 구조를 가진 생명이 어떻게 무생물에서 비롯되었을까?
c. 생명의 복잡성과 법칙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연히’라는 말을 빼고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열역학 법칙들에 위반되는 것이고 모든 에너지는 저절로 생기거나 증가할 수 없기에 그 에너지를 준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앤서니 플루는 ‘전화기의 비유’를 합니다. 무인도에서 어찌어찌 전화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누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현자는 이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하는 기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조금만 고장 나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계속 외롭게 사는 것을 택합니다.
하지만 이 기계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들의 말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는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전화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해주는 기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란 음성이 들리고 믿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마음의 평화에 머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이 현상을 자기 판단으로 확정하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그 뒤에 있는 창조자의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관찰하는 이는 결국 전화기와 같은 이 현상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창조자가 우리를 사랑하여 그 소통의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안 믿어서 좋은 게 뭐가 있을까요? 자기가 하느님으로 살며 온갖 걱정과 두려움에서 사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부모 말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출해서 혼자 사는 것보다는 부모의 존재 안에서 머무는 게 더 행복임을 알고 관찰자로 머뭅니다.
심판자가 아닌 관찰자로 살아갑시다. 반드시 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우주의 질서와 복잡성을 신성한 창조자의 증거로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증거가 없다면 엄지손가락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박 4일’의 교구사제모임을 마치고 신부님들은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날에 신부님들은 교구장님과 대화 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미주지역에도 ‘미사 도우미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작년부터 ‘미사 도우미 사제’라는 직책을 신설했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은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에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피정이나 휴가를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 겁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거나, 대도시에 있는 신부님들은 그나마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소도시의 작은 규모의 성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도움을 청한다 하더라도 한 달 가까이 미사를 도와준다면 그에 대한 사례비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있다면, 해외 교포 사목의 경험이 있는 사제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는 신부님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원하면 고백성사를 줄 수 있습니다. 교구장님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다면 미사 도우미 사제의 파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장소에 대한 의견도 있었습니다. 현행의 장소 선정은 4개 본당이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홀리 엔젤스 성당, 워싱턴 DC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4곳 모두 성당의 규모가 큰 편이고, 보좌 신부님이 있습니다.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성당입니다. 신부님들은 규모가 작은 성당에서도, 남미에서 선교하는 성당에서도 교구사제모임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공항에서의 이동을 대중교통이나 우버를 이용하고, 피정의 집을 숙소로 정하면 본당의 규모와 상관없이 개최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하루는 피정의 집에서 성체조배와 피정을 하고, 하루는 교구사제들이 친교를 나누고, 마지막 날에는 사목의 체험을 공유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포 사목 성당도 고령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봉사와 도움을 받기보다는 사제들이 스스로 모임을 꾸려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사제들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2026년의 교구사제모임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선교 사제들, 유학 사제들, 본당 재정이 힘든 사제들에게 특별히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대표를 교구장님이 임명하고, 공문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표가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을 하나의 지구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에 있는 지구장 제도를 미주지역에도 도입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미주지역이 워낙 이동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당 사목을 하면서 지구장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지구장과 대표를 겸임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재정지원을 받기보다는 미주지역의 본당에서 재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주지역에서 고백성사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각 교구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지구장 제도의 도입과 재정지원은 다른 지역(유럽, 아시아, 호주)과의 형평성도 있기 때문에 검토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현임 대표신부님이 내년에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에 새로운 대표를 선출해야 했습니다. 관례상 서품 연도가 가장 빠른 사제가 대표가 되었기에 제가 대표로 추대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는 경쟁과 성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위해서는 양심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할 가족들마저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원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청하여라’의 뜻으로 쓰인 그리스 말은 ‘청하다’ 또는 ‘요구하다’의 뜻도 있지만, ‘기도하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아 일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일합시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일꾼들이 부족하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합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봉사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 가운데 하나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는 겉으로는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열심인 신앙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결국 하느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눈여겨봅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인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기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이면서도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린 신앙인,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 은총이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기도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지 않게 합시다. 먼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모든 일에 앞서게 합시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아멘.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1)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인데, 그 ‘자비’는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등의 일을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비’와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참 목자’이신 주님이 계시는데도 목자를 모르고 있었거나, 알지만 떠나 있었거나, 떠난 것은 아닌 경우라도 목자를 만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꺾여 있었다.”는, “희망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입니다. 이 말은, 앞의 4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예수님은,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죽음을 향해서 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 채 방랑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고, ‘구원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2)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알면서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인생의 목적이나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이,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 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구원의 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혼자서만 알고, 혼자서만 간다면, 그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곳이 하늘나라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고, 모두가 함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3) “수확할 것은 많은데”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데”입니다.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적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의 표현만 보고서, 이 말을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 등을 가리키는 말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모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즉, 신앙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에 동참하는 일꾼입니다. 신앙인은 손님도 아니고 삯꾼도 아닙니다. 주인공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4) ‘수확할 밭의 주인님’은 하느님입니다.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더 많은 사람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뜻인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청하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었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일꾼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즉, 아직도 많은 사람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계시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각자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실행하면서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 오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한 사람은,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내로남불.’ 좋은 말도 아니고 교육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신앙적이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개인의 입장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같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못하는 이가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려 말을 못하였으니 마귀를 쫓아내자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구마’이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비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시선은 참으로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볼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김창대 임마누엘 신부님]
<제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꾼”은 소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요, “춤꾼”이나 “씨름꾼”은 춤이나 씨름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꾼”이란 말은 상당히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예수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꾼”들의 모임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되고 오염되어, 이제 교회에 예수꾼은 없고 “말꾼”이나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말꾼이나 구경꾼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일꾼”에 의해서 성장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일꾼을 찾으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하시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품팔이하는 사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하루 동안만 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꾼”의 성경적 복음적 의미는 “일에 미친 사람” 즉 복음에 미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얼핏 들으면 상당히 불쾌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말은 이제 주님에게 합격점을 받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배당의 경우 가장 만만하고 흔한 직분 중의 하나가 집사(執事)라는 것이 있습니다. 웬만한 교회는 절반쯤이 집사요, 많은 교회는 신자의 삼분의 이가 집사라고 합니다. 이 “집사”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일(事)을 붙잡고(執)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한 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사람을 집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안 하면 좀이 쑤시는 사람, 일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희랍어로는 디아코노스-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이 봉사자를 “집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봉사자나 “일꾼”은 같은 말입니다.
또 “일꾼”을 말하는 다른 희랍어로는 에르가테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 즉 에르곤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일꾼은 일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하는 이도 피곤하고, 일을 시키는 이도 짜증스럽습니다. 물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일에 미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일 많이 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요란스럽게 떠들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인 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28절을 보면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믿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돼있지 않으면 공연히 선무당 사람 잡듯, 예수님의 이름만 더럽힙니다. 성당의 이미지만 나쁘게 만듭니다. 일꾼이란 모름지기 일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사명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을 보면 일꾼 중의 일꾼인 사도 바오로가 세 번째 전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도시 밀레도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놓고 고별 연설을 합니다. 이 고별연설 속에는 복음 전하는 일꾼으로서의 사명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도 예루살렘에 간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사도 바오로가 얼마나 선교사명에 불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그토록 열성적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합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합니다. “우리 성당에는 일꾼이 없어요.” 그럽니다.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작은 본당이라 없고, 이사 갔기 때문에 없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불평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것은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할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를 일꾼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일꾼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
[부산교구 박재구 시몬 신부님]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씨가 맑아도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날씨가 흐려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마음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저는 그날 인간의 마음에 따라 날씨의 색깔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날씨 속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왜 갑자기 날씨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그 일꾼들은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일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안고 기쁘게 출발하면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매일 건강한 날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마태오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아멘.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9, 32~3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삼 말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이란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이란 곧 마음을 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마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요, 뜻을 나타내는 음성적인 부호입니다. 이처럼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말할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다른 동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뇌의 발달과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뇌는 성장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이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없다면 뇌는 스스로 진화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뇌가 만들어 내는 생각들을 세상에 영속적으로 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뇌의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할 말도 많아지게 되고, 할 말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 세상에 할 일도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세상을 잇는 다리의 시발이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엄청난 축복이며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9,33)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난 적이 많습니다만 저 역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아직껏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마귀 들려 헛소리나 괴성을 질러대는 사람 여러 명은 보았습니다. 만일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들을 하였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부드러운 말을 할까?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할까?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까? 아니면 남을 욕하는 말을 할까? 남을 흉보고 멸시하는 말을 할까? 남의 흠을 잡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할까? 아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이,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니 어쩌면 그 역시도 즈카리야처럼 말문이 열리자,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의 소리가 터져 나왔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마귀를 쫓아내 주었는데도 이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만일 그가 찬미와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돌들과 나무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이 찬미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귀 들린 사람이 말 못하였다는 표현은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도, 영적 지도 후 자연스럽게 개인 기도를 하라고 하면 손사랫짓하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감사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느끼지 못했으며 그러기에 감사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흉보는 말은 잘하는데 주님을 찬미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 앞에서 자기 자랑은 잘하면서 기도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하듯이 기도 말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루아침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 하면서 말을 배워가는 것처럼 기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말도 꾸준히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언어이기에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때, 기도 말을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사랑한다, 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떻게 사랑의 언어인 기도 곧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9,33)라고 감탄하며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놀랍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9,34)하고 모욕하며 예수님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지켜봅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에 대해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치유 받은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워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시선 곧 마음의 태도는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된 삶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당대는 민중들이 그 피해를 입었고, 현재는 국민들이 그 부담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9,36)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꾼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하느님 포도밭에서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제대로 된 일꾼들이 많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9,38)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10,14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대학을 다니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이 학생들은 남들을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일반 학생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니라 63%였지만, 일반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이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도움을 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요? 63%에서 10%로 도움을 주는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근본적으로 착한 성향을 보여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방송에서 난처한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듯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무관심하다고 악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대처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역시 잘못이 아닐까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냈고 이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반대의 뜻을 취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반대하는 모습, 어쩌면 앞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수확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의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 됩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취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합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와 함께>
마태오 9,32-38 (말 못 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홀로와 함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
홀로
모으는
함께이니
홀로
할 수 있는
이는
함께이어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이루는
홀로이니
함께
하지 못하는
이는
홀로이어도
할 수 없지요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생활하다 보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의 자존감 역시 한없이 낮아질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의 공통점은 대부분 나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질 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때입니다.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특별히 이런 경우를 더 많이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 온 유학 사제들은 언어적 한계로 인하여 자존감이 떨어진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영어, 스페인어, 불어권에서 온 사람들은 이태리어를 배우지 않고도 문법 구조와 단어가 비슷해 언어를 쉽게 체득하는 반면, 아시아 사제들은 문법은 완벽히 알더라도 교과목마다 다른 전문 용어들을 전부 다시 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농담처럼, 왜 우리 조상들은 남들이 다 쓰는 서양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지, 베드로가 한국에 와서 순교했으면 굳이 유럽의 언어를 따로 배울 필요 없었을 텐데 아쉽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가장 용기를 주는 말은, "교수님들의 자비는 하느님 현존의 증거"라는 선배님들의 농담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교수님들께서 알아서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해 주시니 언어적 한계를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즉, 우리가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의지할 곳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경험할수록 대부분의 유학생 사제들은 용기를 갖고 최선을 다해 다시 공부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 안에서 특별히 병자와 허약한 이들은 개인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이 돌봐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 해, 자신이 부족해서 하느님께 병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 자책에 시달렸고, 그만큼 자존감은 바닥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측은한 마음으로 다가가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일이 안 풀릴 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종종 하느님은 왜 나를 돌봐 주시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기며 기가 꺾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붙잡아주고 계시는 하느님,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판단으로 주님의 도우심이 있고 없고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코린토 2서 4장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의지함으로써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그야말로 참 목자가 있는 양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주님의 수확을 돕는 참다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 복음의 전사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착한 목자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열면 온통 전쟁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모두가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상태를 살아갑니다. 정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신원은 “주님의 전사”입니다. 사랑의 주님으로 무장하고 영적전쟁을 수행해 가는 믿는 우리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수도생활 만 42년, 초창기부터 참으로 선호했던 말마디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수도생활은 예로부터 영적전쟁이라 칭하는데 영적전쟁 42년채가 되지만 영원한 현역의 수도자입니다.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더불어의 전우애(戰友愛)가 동반한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두 분 뿐 아니라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작금의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영적전쟁을 수행할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주님의 전사들이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음은, 또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을 궁극의 희망이자 꿈, 비전으로 모신 삶이기에 가능한 평생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우상들과 치열한 전투에 얼마나 통쾌한 승리를 거뒀는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줄기에 이삭이 패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리 없다.
그들이 제단들을 많이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제단들은 죄짓는 제단일 뿐이다. 그들은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그들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할 때 우상들의 정체는 폭로되고 그들이 얼마나 헛된 존재들이요 우리를 노예화한 것들인 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은 무지의 삶으로 인해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유형무형의 우상들에 빠져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할 때 예수님처럼, 아모스 예언자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제자리 주님 안에서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삶은 없을 것이니 주님의 전사는 그대로 복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치유의 전사, 구원의 전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축출하자 말못하는 이는 말을 합니다. 마귀에 대한 통쾌한 영적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전사 예수님이요 이에 놀란 군중들의 반응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반영하는 고백과는 달리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어떻게 다음과 같은 반대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지 바리사이들의 왜곡된 견해가 충격적입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무지에 눈멀면 이토록 완고해집니다. 흡사 극우나 극좌 이념에 매몰된 극단의 맹신이나 광신의 무지한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통해 복음의 전사로서, 평화와 치유의 전사로서, 또 착한 목자로서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마음과 사랑에 정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는지 확연히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온전히 봉헌된 하루의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과 이리도 흡사한지요!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죄와 병으로 얼룩진 인간 현실같습니다. 첨단 문명을 구가하는 시대에도 인간불행은 지속됩니다. 궁극의 원인은 단하나! 하느님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었기에 무지와 탐욕으로 자초한 화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영적 난민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당신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정말 주님의 참 일꾼들인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목자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아니 우리 각자 솔선수범 분발하여 복음선포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참 좋은 일꾼이 되어 살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시편 115,9).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도 악평의 대가?>
아시다시피 마태오복음은 5-7장이 산상수훈, 곧 율법과는 다른 주님의 가르침 모음입니다.
그리고 8-9장은 주님의 갖가지 치유 모음인데 오늘 복음은 치유 얘기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구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군중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정반대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지요. 어떻게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오는지.
그것은 겸손한 군중과 교만한 바리사이들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만 선하기에 자기 밖의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악하다고 단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군중에 대해서는 율법도 모르는 족속이라고 곧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주님께 대해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졸개일 뿐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악평합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이렇게 간단하게 악으로 평가하니
그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을 자들이다.”라고 저주하고, 안식일 법과 정결례 법을 어긴다고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니 오늘 주님께서 한탄하시듯 군중은 그들 밑에서 다 기가 꺾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한편으로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를 보며 저도 주님처럼 가엾은 마음도 가집니다.
정말 저 자신에 깨어있지 않으면 저도 악평의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도 깨어있어야 하지만 제가 얼마나 뼛속부터 교만한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가엾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 안에서 모든 사람이 기가 꺾여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할 때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그런데 그것이 상처를 줘야겠다고 작심하고 주는 것이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경쟁 사회의 부지불식의 교만 때문입니다.
부지불식이란 알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겁니다.
경쟁 사회 안에서는 남을 깎아내리고 내리누르고 악평해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안에 박혀 있고, 그러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우월감과 교만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악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지불식의 교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서로 기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기를 살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구원의 일꾼들!>
오늘 복음(마태 9,32-38)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먼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기 위해, 곧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땀'이 묵상됩니다. 그리고 수확의 때와 구원의 대상과 일꾼들에 대한 묵상을 해 봅니다.
'수확의 때'는 '세상 종말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먼 훗날의 때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때이기도 합니다. 세상 종말의 때가 언제일지 모르는 현세적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인 복음화의 대상'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 권고문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곧 '미지근한 신자들'과 '냉담 신자들'과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14항 참조)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일꾼이 적다고 하십니다. 일꾼이 부족하니 하느님께 구원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복음화의 사명'입니다. '사제직(거룩함)과 예언자직(친교)과 왕직(희생.봉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늘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구원의 일꾼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ucJ_KeqE4Ug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 37)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행복한 일꾼은
복음을 위해
온 삶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확의 참된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수확할 일꾼의
첫 번째 덕목은 언제나
기도이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일꾼이 청해야 할 것은
풍성한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확할 수확물은
결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합다.
일꾼을 이끄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일꾼은 먼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내면에서 묻는
이들입니다.
우리 내면은
가장 강력한
수확의 현장입니다.
기쁨과 감사
행복과 성장이라는
주님의 현존을
수확하길 기도드립니다.
수확할 현장에서
자꾸만 만나게되는
주님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일꾼의 기도로
일꾼의 충실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풍요로이 수확되길
기도합시다.
일꾼의 수확은
이미 일꾼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이미 행복한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