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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태국에 도착했다. 짧은 일정이라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다나
모래사장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그녀들은 모델들을 컨셉에 맞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고 있었다.
남자 모델은 유명한 배우라고 했다. 여자 모델도 연예인은 아니지만 모델쪽에서는 뜨는 신인이라고 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태국 시밀란 섬을 배경으로 정말 환상적인 연인으로서의 모습으로 연신 촬영을
하고 있는 두 사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프로네요..”
“그렇지.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데..”
“아..”
“아. 여자 모델이 땀 때문에 머리가 좀 죽었다. 가서 손 좀 봐야겠다..”
혜영이 감독에게 말해서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질 때 모델들의 헤어를 손 보고, 그 사이 은하도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서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들 많으십니다.”
주민과 혜영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머..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저희 회사 광고입니다.”
“아..”
은하가 조용히 주민과 혜영 뒤에 서서 그의 옆에 손을 잡고 서 있는 한율이를 바라보았다.
은하와 눈이 마주친 한율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은하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한율이와 인사를 했다. 서완은 그런 은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한율이를 바라보았다.
“저녁식사 하러 가시죠.”
“네.”
“은하야. 다 정리 했어?”
“네.”
“가자.”
“네.”
은하는 주민과 혜영의 뒤를 따라가면서 무거운 메이크업 박스를 들었다. 서완은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뷔페식으로 준비된 야외에서 식사를 했다.
“사모님은 왜 함께 안 오셨어요?”
누군가 서완에게 물어보는 소리를 은하가 들었다.
“아..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요. 아무래도 먼 여행은 힘들 것 같아서 한율이와 둘이 왔습니다.”
“맞다.. 둘째 임신하셨다고 하셨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접시를 들고 음식이 놓여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은하가 중얼거렸다.
“둘째까지 임신한 아내를 사라졌다고 하다니.. 이상해도 한 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먹고 싶은 음식을 담고 있는데 한율이가 다가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 당겼다. 은하가 한율이 옆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왜?”
“아빠는 바쁘셔서.. 같이 먹어도 돼요?”
“물론이지? 아빠가 허락하시면..”
“물어보고 올게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한율이가 웃으며 서완을 향해 달려갔다. 서완이 고개를 숙여 한율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접시를 들고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율이에게 뭐라고 말 하자 한율이가
다시 그녀에게 달려왔다.
“아빠가 그렇게 하래요.”
은하가 웃으며 한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 음.. 뭐 먹고 싶어?”
“음.. 저거요.”
“그래. 그럼 그거 접시에 담자.”
“네.”
서완은 멀리에서 두 사람이 같이 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 쪽이 저릿해져왔다.
주민이 음식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고 있는 서완을 쳐다보았다. 혜영이 고개를 들어 주민을 보았다.
“뭐 해?”
“최사장님 말이야..”
“응.”
“은하를 자꾸 바라본다?”
혜영이 고개를 돌려 서완의 시선을 따라갔다.
“야.. 아들 보고 있는 거겠지.”
“그런가?”
“그럼. 너 같으면 유진씨같은 아내를 두고 은하한테 관심이 가겠니? 전혀 다른데?”
“하긴.. 그렇지?”
“그럼..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저런 부부는 이혼 같은 거 안 해. 이혼하면 회사 주식이 엄청 떨어질 텐데?”
“아.. 부자들은 그런 게 있구나..”
“피곤하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로 다가오는 은하와 한율이를 바라보았다.
“다 골랐어?”
“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아이처럼 좋아하는 은하를 바라보며 두 사람이 웃었다.
“한율군도 맛있는 거 많이 골랐어요?”
“네. 아줌마.”
“뭐?”
주민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혜영이 풉.. 하고 웃음을 참았다.
“아줌마 아니거든?”
“네. 죄송해요.”
“즉각 사과하는 것도 기분 나쁘거든요~?”
“네.”
주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혜영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선배..”
은하가 혜영을 말렸다.
시끄럽게 식사를 하는 테이블을 서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사시간 내내 한율이는 은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누나. 바닷가에 가고 싶어요.”
한율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닷가에 다녀와도 돼요?”
“그렇게 해.”
“우린 방에서 쉬고 있을게. 피곤하다..”
“네. 오래는 안 있을게요.”
“그래.”
은하는 그녀들과 헤어져 서완을 찾았다. 그가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하가 살며시 그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한율이를 바라보았다.
“저기..”
그의 턱이 굳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저기..”
“말 해.”
그가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한율이랑 바닷가에 가도 될까요? 오래는 안 있고 산책 조금 하고 싶다고 해서요.”
“아빠.. 누나랑 같이 산책해도 되요?”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내려 한율이를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는 안 돼. 알았지?”
“네.”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전화를 주세요.”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가 명함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그녀가 한율이를 미소 지은 얼굴로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그녀의 향기가 아직도 그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잔뜩 긴장했다.
바닷가로 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낮에는 바빠서 느낄 수 없었던 파도 소리,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스멀대는 부드러운 모래가루, 수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었다.
“누나는 꼭 우리 엄마 같아요.”
“응?”
은하가 놀란 표정으로 한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도 누나처럼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러셔?”
“네.”
한율이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아마도 동생이 생겨서 그러신 것 같은데? 동생이 생겨서 싫어?”
“그건 아니지만..”
“나한테도 언니가 있었거든.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 아빠를 나한테 빼앗긴 것 같아서 부모님 몰래 내 다리를 꼬집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었대.”
“정말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할 지도 몰라. 섭섭할 지도 몰라. 짜증이 날지도 몰라. 하지만 한율군..”
은하가 쪼그려 앉아 한율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부모님은..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하신단다. 단지 동생은
아무것도 스스로 못하니까 도와주시는 거야. 물론 동생도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너를 사랑하던 마음이
동생에게 옮겨가는 건 아니니까. 너무.. 어려울까?”
한율이가 고개를 저었다.
“멋지구나.. 정말 멋진 오빠.. 멋진 형이 될 것 같은데?”
“정말요?”
“그럼~. 말했잖아. 우리 언니는 막 괴롭혔다니까? 그래도.. 좋았었어.”
“지금 누나는 언니랑 같이 살아요?”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반짝이는 별로 돌아갔대.”
한율이가 그녀가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별로요?”
“글세.. 저기 반짝이는 별일까?”
“저거요? 큰 거요?”
“응..”
“그렇구나.. 보고 싶어요?”
“응. 엄청.. 이제 슬슬 돌아갈까? 너무 늦으면 아빠가 걱정하실거야.”
한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걷던 한율이가 하품을 하더니 바닥에 앉으려고 했다.
“졸려? 업어줄게.”
그녀가 한율이를 등에 업었다.
“누나..”
“응?”
“노래 불러줘요..”
“그래..”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그 노래 알아요. 아~함..”
“그래?”
“응. 우리 엄마도 알아요..”
“그렇구나. 계속 불러줘?”
“네.”
한율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등에 느껴지자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종소리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희망의 앞날을 알려주려
딩동댕동 딩동댕 들려온다
바람결 따라 저 멀리서
꿈결속에 울리는 맑은 소리
나 - 의 단잠을 깨웠지만
희망을 실어준 종소리에
방긋이 미소를 지었지요
희망의 종소리 들려온다>
한율이가 자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눈앞에 서완이 섰다. 그녀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서완을 보았다.
“막 들어가던 길이에요. 한율이가 졸리대서..”
“그 노래..”
“아.. 한율이도 안 다고 하더라고요. 동요에요. 종소리라는 곡인데...”
그가 힘겹게 침을 삼키자 그의 목젖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너.. 누구야..”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
“누구야.. 왜 자꾸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거지?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사람 혼란스럽게 왜 그러는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야말로 혼란스럽거든요?”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요..”
“그만 해.”
“네?”
“궁금해 하지도 말라고..”
“어떻게.. 아셨어요? 하지만 궁금해요. 왜 그러시는 건지.. 사모님이 둘째를 임신하셨다면서요.
그럼 이러시면 안 돼요. 자꾸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사랑스럽고,
마음이 고운 아이한테 상처 주지 마세요.”
그녀는 왜 눈물이 흐르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닮았어. 정말 보고 싶은 그 여자랑.. 너무 닮았다고..”
“사모님은 저도 뵀어요. 하나도 안 닮았어요.”
“그 여자 말고..”
“이러지 마세요.”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냥 닮은 것 뿐 인건가? 나를.. 모르겠어? 한율이를 몰라?”
그가 애가 끓는 듯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다면.. 받아 줄래?”
“싫어요.”
“싫..어..?”
“그럼요. 누굴 닮아서 내가 좋다는 사람을 왜 받아줘요? 닮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도 안 닮으면
버리려구요? 그리고 가정이 있는 남자는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그가 몸을 돌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의 들썩이는 등과 어깨를 바라보며 은하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가 진정이 된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한율이 내가 안을게.”
“네.”
그가 그녀의 등에서 잠든 한율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한율이를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그럼.. 쉬어요.”
그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가 모래밭에 털썩 주저 앉았다.
“뭐야.. 가슴은 또 왜 이러는데..”
그녀는 손을 들어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방으로 돌아 온 그는 한율이를 눕히고 욕실로 들어가 찬 물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쳤지..? 후우..”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
“왔니?”
“네. 씻으셨어요?”
“응.”
“너도 씻어.”
“네. 그럴게요.”
“피곤해 보인다?”
“그렇네요. 꼬맹이랑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원래 아이 보는 게 그래.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 일 할래, 아이 볼래 라고 물어보면 일 한다고.. 원래 그런 거야. 얼른 씻고 쉬어.”
“네.”
은하가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 안에 들어가 욕조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가슴 아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서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이러니.. 정신 차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 시간 유진은 친구들과 커다란 월풀 욕조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신랑이랑 한율이 없으니까 살 것 같니?”
“그래~. 살 것 같다..”
“일부러 그런 거지?”
유진이 눈을 뜨고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기회를 잡은 것 뿐이야. 이렇게 해야 또 참고 살 수 있지.”
“그래.. 잘 했어.”
“요즘 서완씨가 잘 해주니?”
“뭐.. 그렇지.”
“하긴.. 서완씨가 너라면 껌벅 죽으니까.. 좋겠다, 얘~.”
친구들이 꺄르르 웃었지만 유진은 한 숨을 내쉬었다.
****
다음 날, 한율이는 은하 옆에서 놀았다. 피부 위에 그리는 물감으로 한율이 손등을 꾸며주기로 했다.
“한율이는 뭘 좋아해? 어떤 거 그려줄까?”
“음.. 폴리요.”
“로보카 폴리?”
“아세요?”
“응. 누나 조카도 좋아했었거든. 여자라 엠버를 좋아했지.”
“아.. 그렇구나.”
“좋아.. 그럼 여기에 폴리를 그려줄게. 변신 전? 아니면 변신 후?”
“이쪽은 변신 전, 이 손은 변신 후를 그려주면 안 돼요?”
“안 되긴~. 다 되지~.”
한율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은하는 한율이 왼손등 위에 변신 전의 폴리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오른손등 위에 변신 한 폴리를 그려주자 사람들이 다가와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은하씨 정말 잘 하는 구나~.”
“아니에요.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보통이에요.”
“끝나면 나도 그려 줘.”
“네?”
“어차피 이제 거의 끝났으니까.. 이후로는 개인 시간 갖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거든. 나도 그려 줘.”
“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그림그리기는 한 시간을 넘겨 했다. 페이스패인팅 수준이 아니라 마치 헤나문신처럼 그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남자 스텝의 등과 어깨에 커다란 용 그림을 그려주었다.
“여의주 물어요?”
“가능해?”
“네..”
“응. 그렇게 해 줘. 난 강해 보이고 싶더라고. 그런데 문신은 아플 것 같아서.. 의외로 겁쟁이야.”
그녀가 붓을 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거리며 웃었다.
“저도 문신한 남자는 좀 그래요.”
“그래?”
그가 움직이려고 하자 은하가 “아.. 안 돼요.” 라고 말했다.
“움직이면 용이 이상해 져요.”
“응. 그런데 문신한 남자가 왜 싫어?”
“무서워요.”
“하하하.. 하긴 이런 문신이 실제라면 나도 겁날 것 같다..”
은하가 웃으며 마무리를 했다.
“다 됐어요. 물놀이 하시면 지워져요.”
“응. 고마워. 수고했어요.”
“네.”
그가 바닷가로 달려가자 주민과 혜영이 그녀 옆에 앉았다. 힘든 은하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선배님들도 해 드려요?”
“하여간.. 왜 거절을 못 하냐?”
“다들 빡빡한 일정을 힘들게 소화했으니까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제 정말 힘들어서 못하겠다.. 싶었어요.”
“하여간 순딩이..”
“그런데 말이야..”
“네?”
물감을 정리하며 은하가 대답했다.
“너 최사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잠깐 손을 멈칫했던 은하가 아무렇지 않게 정리를 하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주민이 어깨로 은하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티가 나요?”
“너도 너지만, 최사장님이 좀 그래.”
“맞아. 너를 쳐다보다가 홱 돌고, 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홱 돌고.. 이상해.”
그녀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누굴 닮았대요. 그래서 신경이 쓰이나 봐요.”
“닮아? 누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은하는 사실과 섞여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잘 넘어갔다.
“첫사랑이라도 닮았나?”
“아니야. 첫사랑이 사모님이라고 들었는데?”
은하가 혜영을 바라보았다.
“맞다. 사모님이 그랬지? 엄청 거만하게 이렇게 고개를 들고 자랑했었다.”
주민이 고개를 약간 들고 눈을 약간 내려 거만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시겠지만 그러시지 말라고 했어요.”
“잘 했어.. 가정도 있고, 갖은 것도 많은 남자가 왜 저런대니?”
“그러게.. 이미지 좋았는데.. 좀 깬다..”
“이해는 돼요.”
“또 뭐가 이해가 되니?”
“저도 저의 언니 닮은 사람을 보면.. 신경 쓰이거든요.”
“은하야..”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보고 싶은 사람을 닮으면 모른 척 하기 힘들거든요.”
두 사람이 미소 지으며 팔로 은하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도 놀자.”
“네.”
세 사람도 바닷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 새 깔깔거리며 세 여자와 한율이. 그리고 많은 스텝들이
물놀이를 했다. 한율이가 점프를 하자 은하가 한율이를 안아들고 서로를 바라보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바라보고 있는 서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는 서완이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았다.
“뭐 하냐?”
서완이 놀란 표정으로 웃으며 걸어오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너.. 바쁘다면서..”
“휴가 냈다. 여름에 안 썼던 휴가.. 여기 좋다. 너무 좋아서 울고 있었냐?”
서완이 피식 웃었다. 연우가 어깨를 툭 치고는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은하와 한율이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넌 알고 있었지?”
서완이 그들을 바라보며 연우에게 말했다.
“어느 정도는.. 야.. 태국으로 광고 촬영가는 팀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알려주었으면 안 왔을 거다.”
“은하씨 때문에 네가 해야 할 일을 안 한다고?”
“안 와도 상관없었어. 한율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오게 된 거지..”
“유진씨는?”
“글세.. 아마 편히 쉬고 있겠지. 그럴 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어때? 여전히 예전 유진씨와 닮았냐?”
“...응..”
“그럼 만나.”
서완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싫대.”
“싫대? 벌써 얘기가 거기까지 간 거야?”
“자기는 내가 찾는 여자가 아니라고.. 가정이 있는 남자는 절대로 싫대.”
“그래? 그럼 내가 대시해야겠네..”
서완이 심각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가 피식 웃으며 어깨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농담이야, 인마~. 심각해지기는..”
“농담 아닌 거 알아. 네가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할 녀석 아니라는 것도 알고, 바쁜데도 시간 내서 여기까지 올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너랑 조금 달라. 너는 유진씨 닮았다고 했지? 난.. 그 여자를 닮은 것 같거든..”
“연우야..”
“어딘지 닮았어. 나도.. 미치겠다.”
연우가 쓸쓸한 미소를 짓자 서완이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멀쩡한 줄 알았던 남자 둘이 한 여자에게서 다른 여자의 모습이나 찾고..”
서완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하지만 너나, 나나 안 돼. 알지?”
“응..”
“결국 은하씨를 상처 입힐 거야. 누군가를 떠올린다고 섣부르게 다가가면 안 된다.. 은하씨도 보고 싶었지만
너도 걱정이 되어서 온 거야. 한율이도 보고 싶고.. 유진씨가 있으면 어쩌나 하기도 했다만..”
“그 여자가 이런 델 오겠냐? 어디 월풀 욕조나 찾아갔겠지..”
연우가 서완의 어깨를 감싸며 웃음을 터트렸다.
“바다가 아직도 무서워서 이렇게 멀찌감치 있는 거냐?”
서완이 혀로 입 안을 쓸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너 말이야. 그 아가씨만 생각하고 왔지?”
“은하씨? 응.”
“너한테 고백했던 아가씨도 있어.”
“뭐?”
연우가 놀란 표정으로 물놀이하는 무리를 다시 살펴보았다. 주민이 어떤 남자와 손으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연우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서완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 연우삼촌 왔다.”
한율이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하가 한율이에게 말했다.
“삼촌한테 갈래?”
“네.”
“그래. 그럼.. 어?”
은하는 조심해서 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한율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한율아.. 나는..”
“삼촌~!”
그녀는 한율이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그들에게 갔다.
“어~. 한율아~.”
연우가 한율이를 보고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요. 힘들지 않았어요?”
“네.”
“심장은?”
“괜찮았어요.”
은하가 서완을 힐끔거리듯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서완이 커다란 타월을 들어 한율이의
머리와 몸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깨끗한 타월을 하나 더 꺼내 은하에게 내밀었다.
“괜찮은데.. 한율아. 누나는 가서 또 놀 건데.. 한율이는 여기에 있을래?”
“나도 같이 갈래요.”
“너무 뜨거워. 한율이는 그만 놀자.”
서완이 한율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서완의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은하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빠~.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안 돼.”
한율이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은하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럼 누나도 그만 놀게.”
은하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수건을 갖고 있는 서완의 손에서 수건을 받았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누나.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빠. 삼촌.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그래. 가자.”
결국 은하는 한율이의 손에 이끌려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네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아까 팔에 소름 돋는 거 봤지?”
연우가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서완에게 말했다.
“그래. 봤다.. 친구 놀리니까 재미있냐?”
“응.”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서완도 피식 웃었다.
“삼촌. 아빠~. 얼른 오세요.”
앞서서 걷던 한율이가 뒤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
가게 앞에 서자 한율이가 메뉴판을 보고는 주문을 했다.
“딸기 아이스크림요.”
“은하씨는 뭐 먹을래요?”
연우가 은하에게 물었다. 은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말해요.”
“저만 특별대우 받는다고 소문이 안 좋게 날 거에요. 정말 괜찮아요.”
“지금 내 걱정하는 겁니까?”
서완이 은하에게 물었다. 은하는 시선을 조금 피하며 대답했다.
“네.”
“왜?”
“저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촬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사장님은.. 소문이 안 좋게 나시면 안 되시잖아요. 피해주고 싶지 않아요.”
서완이 고개를 돌리며 턱에 힘을 주자 연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되요? 모두 다 사주지 뭐.”
은하가 놀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다.. 다요?”
연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들은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직원에게 부탁해 바닷가로 가져갔다.
“잘 먹겠습니다.”
다들 합창하듯 말하고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은하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한 쪽에 앉았다. 한율이
가 그녀 옆에 앉았다.
“맛있어?”
“응.”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 해 봐.”
혜영이 은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한율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대서요. 그렇게 된 거에요.”
“중간에 뭔가가 빠졌잖아.”
“저도 사 주신다는 걸 소문이 이상하게 날 거라고 싫다고 했더니 이렇게 된 거에요. 이제 만족하세요?”
“응. 고맙다. 덕분에 시원해.. 기분이 좋구나..”
혜영이 미소를 지으며 은하를 바라보았다.
“주민아.. 뭐 하니? 다 녹는다.”
주민이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긴 왜 왔대?”
“안 물어봤어요. 두 분이 친구이시니까 오신 거 아닐까요?”
“그래? 설마.. 날 보러 왔나?”
은하가 커피를 품었다. 주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뭐지? 그 반응은?”
“아줌마는 안 될텐데..”
한율이가 주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줌마 아니라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은하한테는 뭐라고 부르는데?”
“누나요.”
“그럼 나도 누나지. 은하랑 3살 차이밖에 안 나~.”
“뻥치시네~.”
“뭐?”
“한율아.. 그런 말은 나쁜 거야. 특히 어른한테는 쓰면 안 돼..”
은하가 한율이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안 돼요?”
“응.”
“그럼 죄송해요. 이모..”
“좋아.. 이모든 누나든 상관없어. 아줌마만 아니면. 그건 그렇게 나는 왜 안 되는데?”
“연우삼촌 좋아하는 여자 있댔어요.”
“그건 나도 알아.”
“좋아하는 여자가 엄청 예쁘댔어요.”
“그래? 너도 모르는 여자야?”
“선배.. 아이한테 지금 무슨 정보를 알아내려고 그러세요..”
주민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했었다는데?”
“누가?”
“연우삼촌이.. 10년 넘게 사랑했다고 했었어요.”
“아.. 10년 넘게..?”
“주민아.. 포기해야겠다. 10년 사랑을 어떻게 막냐?”
“그건.. 그렇네..”
그제서야 주민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안 차가우세요?”
“응. 괜찮..지 않아.. 아.. 이마.. 이마..”
주민이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다들 주민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율이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자 은하가 손끝으로 닦아주었다. 한율이와 눈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닮았지?”
“그렇네.. 진짜 닮았다..”
서완과 연우가 그녀들과 한율이 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했다.
“하아~.”
서완이 한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맑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죽겠다..”
“그래.. 하지만 안 돼..”
“그래. 안 돼.. 나도 안다..”
“돈을 너무 썼다.. 갈 때 비행기 표값 좀 주라.”
서완이 인상을 찡그리며 웃으며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
모든 일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은하는 한율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누나 또 만나~.”
“그래. 한율군도 잘 지내~.”
은하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연우와 서완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요. 병원에 놀러 와요.”
“병원으로.. 놀러 가요?”
은하가 웃으며 말하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가 서완을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다시 고개 숙여 말없이 인사를 하고 다른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러 갔다.
“아무 말도 안 하냐?”
“집으로 가자~.”
서완은 연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한율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우도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하의 어깨를 안으면서 주민이 물었다.
“누가 신경 쓰여? 의사? 사장님?”
은하가 고개를 돌리며 주민을 바라보며 웃었다.
“선배는요? 포기가 되셨나요?”
“음.. 잘 모르겠다. 곧 알게 되겠지 뭐~. 가자.”
“네.”
다른 스텝들과 더 인사를 나누고 은하는 집으로 갔다.
****
서완과 한율도 유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갔다. 유진은 한율이가 달려가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소지었다. 서완은 은하의 행동과 비교가 되는 유진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러지 말자.. 어쩌자는 거야..’
“다녀왔어요? 즐거웠어요? 한율이는 즐거웠다는데..”
“일 때문에 갔는데 즐거웠겠어? 물을 좋아하지도 않고..”
“맞다..”
“당신은 즐거웠나?”
서완의 차가운 말에 유진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예전같지 않더라구요. 친구들이랑 스파에 갔었는데 별로 즐겁지 않았어요. 몸이 괜찮았으면 따라갔을텐데..”
“...”
“저녁은요?”
“난 생각 없어. 한율이랑 알아서 해.”
“네.”
서완이 2층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찬 물로 샤워를 했다.
“정신 차려.. 정신..차리자..”
그가 눈을 감았다.
****
그날 밤 은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서완의 얼굴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떨리던 것이 생각이 났다.
“후우...”
그녀는 긴 한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 형부가 좋다고 쫓아다녔을 때.. 그 때도 이랬어? 가슴 아프고, 어딘가 저리고.. 신경쓰이고 그랬어?
하지만 형부한테는 도도하고 아름다운 부인도 없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도 없었지.
오히려 사랑스런 언니와 사랑스런 아이가 있는데도 여자와 바람을 피웠지.. 절대로 그런 짓은 안 해..
하지만 여기가.. 이상해..”
은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쪼그려 앉아 다리를 가슴에 끌어당겨 안았다.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
“은하는요?”
혜영이 원장에게 물었다.
“오늘 갈 곳이 있다고 해서 빼줬어.”
“갈 곳이요? 아.. 오늘이 그 날이에요?”
“응. 갔다가 온 다는 걸.. 됐다고 했어.”
“역시.. 우리 원장님 멋지시다니까요?”
“일이나 하셔요~.”
“네~.”
혜영과 주민이 자리로 돌아갔다.
연우는 꽃을 들고 오른 손에 예주의 작은 손을 잡고 묘지로 향했다.
“예주야.. 오늘 여기 온 거는..”
예주가 커다란 눈을 들어 연우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비밀이죠?”
연우가 미소를 지으며 예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똑똑하네.. 그럼 갈까?”
“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은하도 품에 꽃다발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와.. 나무 그늘이 좋네.. 언니 좋아하겠네..”
은하가 언니의 묘지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 서 있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은하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묘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아이가 묘지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은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 예주야..”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바람결에 들었는지 예주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은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모..”
연우가 예주의 목소리에 눈썹을 조금 올리며 예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주의 시선을 쫓아 몸을 돌려 바라본 연우의 숨이 막혔다.
“선생님..”
은하의 눈에서 놀란 빛이 스치고 지나갔고,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주가 연우의 손을 놓고 달려와 은하의 품에 안겼다. 은하가 쪼그려 앉아 예주를 품에 안았다.
“예주야..”
“이모..”
두 사람이 한 동안 그렇게 안고 눈물을 흘렸다. 연우의 턱 근육이 단단해졌다.
****
잠시 후 세 사람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예주는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연우가 말을 더듬자 은하가 피식 웃었다.
“감사해요. 예주.. 잘 돌봐 주셔서..”
연우가 고개를 숙이고 저었다.
“잘 안 돌봐 줬어요.”
예주가 손을 들어 연우의 손을 잡았다. 연우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예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지냈어요?”
“예주 앞에서는 말하기가 좀..”
“그래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주를 데려다주고 두 사람이 연우의 차에 다시 올랐다. 예주와 헤어져 눈물을 글썽이는 은하에게 연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미용실 들어가야 해요?”
“아니요.. 하루 휴가 주셨어요.”
“그럼 어디 갈까요?”
“어디요?”
****
두 사람은 한강 유람선을 탔다. 저녁이라서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은하씨 보면서 그 사람.. 생각이 났었어요.”
연우의 말에 은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눈이 커졌다.
“설마.. 10년을 사랑했다는 사람이..”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10년이면.. 언니가 결혼했을 때..”
“맞아요. 결혼식에서 처음 봤죠.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어요?”
은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믿어요. 은하씨 언니.. 그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했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혼식이어서.. 마음만 갖고 있었죠.”
“선생님..”
“결혼식에서 은하씨도 봤었는데.. 아직 학생이었죠? 작고 마른 여학생이 눈물을 소리 없이 훔치고 있었던 게 떠오르긴 해요.”
“가족이라고는 언니와 저, 둘 뿐이었어요. 아마 언니가 결혼한다니까 좋기도 하면서 불안했던 것 같아요.”
“이혼했을 때.. 그 때 만났었어요.”
연우의 말에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와 그녀 사이를 지나갔다.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다고.. 프로포즈했었는데... 거절하더라고요. 내 사촌 형과 이혼하고
나랑 결혼은 말이 안 된다면서.. 고맙지만 미안하다고.. 그리고는 나는 우리나라에 없었어요.
미국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어요. 예주를 그 자식이 데려간 것도 몰랐고, 빗속에서 사고로..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들어왔었어요. 서완이랑 같이 장례식장을 찾아갔었는데.. 정신이 없는
저를 대신해서 서완이가 장례식 비용도 계산하고, 모든 절차를 잘 마무리 해줬더라구요.”
연우의 말에 은하의 눈이 커졌다.
“사장님이.. 해 주신 거였어요? 그 땐 저도 정신이 없어서.. 사실은 형부가 해 준 줄 알고 있었거든요..”
“서완이가 했어요.”
은하가 고개를 돌려 강물을 바라보았다.
“예주를 돌보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그 자식이 또 결혼을 했거든요. 외톨이처럼 있는 예주가 안쓰러워서.. 병원에 자주 오라고 하고.. 오늘도 비밀로 하고 데리고 온 거였어요.”
은하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연우가 눈물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손으로 닦았다.
“하지만 선생님.. 언니가 하늘나라 간지.. 벌써 3년이에요. 얼마나 힘드실 지는 저도 알지만.. 이젠 마음 깊이 묻어두시고 좋은 분 만나세요. 잊어주셔도.. 괜찮아요.”
연우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겁니다..”
“선생님..”
“어떻게 지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낸 겁니까?”
“그냥 미용실 다니면서.. 지냈어요. 저도 별로 살고 싶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살아 있어서 이렇게 언니에 대해 대화를 할 수 있고, 예주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살려고요.”
연우가 손을 들어 은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위로는 저 보다 선생님이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연우가 피식 웃었다.
“정말 닮았어요.”
“언니랑 저랑 별로 안 닮았어요. 언니는 밝고, 씩씩하고, 똑 부러지고.. 저는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달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연우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외모는 분명히 언니와 닮은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성격은.. 서완이가 찾는 그 여자와 닮았어요.”
은하가 놀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이상한 녀석 아니에요.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 믿어야 한다면 저는 그 녀석만 믿을 겁니다.”
“그만.. 하세요..”
“궁금하지 않아요? 그 녀석이 은하씨한테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알아서 뭐하겠어요? 부인도 있으시고, 아이도 있으시고.. 형부도 그랬어요.
언니랑 예주가 있는데도 사랑한다면서..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서 이혼해 달라고 졸랐어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더니 언니를.. 언니에게 손을 댔어요. 전 가정이 있는 남자는 절대로.. 절대로 싫어요.”
“은하씨..”
“전 그런 여자가 되기 싫어요.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그런 여자..가.. 되기 싫어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무슨 뜻인지.. 그런 부분이 또 그 사람이랑 닮았네요.”
“선생님..”
“내가 보호해주고 싶어요. 예주도.. 은하씨도..”
“선생님..”
“따른 마음 없어요. 은하씨는 그냥 동생같은 느낌이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
은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여기에서 살아요?”
“네. 언니랑 살던 집은 팔았어요. 제가 병원을 좀 오래 있었거든요. 신세를 진 분이 있어서 그 집 팔아서 갚았어요.”
“그랬구나.. 내가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은하가 피식 웃었다.
“들어가요. 이건 내 명함.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언제든..”
“네. 오늘 감사했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연우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안 있어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다.>
핸들을 잡고 있던 연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어쩐 일이세요?”
<너 오늘 예주 데리고 어디 갔다 왔니?>
“같이 아이스크림 먹었어요. 왜요?”
<그냥.. 기분이 유난히 좋아보여서 혹시.. 어딜 갔다왔나 했지? 행여나 그 여자 묘에 데리고 간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마라.>
“왜요?”
<뭐?>
“예주 엄마한테 가는 게 왜 안 돼요?”
<새엄마한테 정을 붙여야지. 안 그래?>
“그럼 예주한테 잘 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들지 말라고 해도 정이 들겠죠. 안 그래요?”
<자꾸 예주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으면 다시는 못 만나게 할 거야. 그렇게 알아.>
예주 아빠가 전화를 끊자 연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연우가 서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나올 수 있겠냐?”
<응. 필요하냐?>
“미안하다.. 한율이 자냐?”
<늘 가던 데로 지금 나갈 테니까 보자.>
“고맙다.”
전화를 끊은 연우가 차를 돌렸다.
****
집에 돌아 온 은하가 사진 속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야.. 오늘 예주 만났어. 우리랑 있을 때보다 좋은 옷, 좋은 구두 신고 있더라. 얼굴도 좋아보였어.
걱정 많이 안 해도 될 것 같아. 의사선생님이 삼촌이래. 언니는 알고 있었지? 차라리 그 분이랑 결혼하지..
그래서 미국으로 도망가서 살지.. 그랬으면 예주를 그 집에 빼앗길 일도 없고, 언니도..
언니도 살아 있을텐데.. 그 분.. 좋은 분이더라.. 언니는 바보야.. 그렇게 좋은 사람을 밀어내고.. 바보..”
은하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
연우가 술을 연거푸 마시자 서완이 말렸다.
“마시지 말라는 거 아니야. 대신 천천히 마시라고.. 응?”
“역시.. 난 네가 있어야 해..”
“징그럽다..”
서완이 웃으며 알콜이 들어 있지 않은 칵테일을 마셨다.
“완아..”
“응?”
“은하씨.. 안 돼..”
서완이 힘겹게 칵테일을 삼키고 굳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그 여자 얘기가 왜 나오냐?”
“안 돼..”
“알아.. 인마..”
“그 여자.. 동생이었어..”
서완이 놀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 누구.. 은주씨?”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정말? 정말 은주씨 친 여동생이라고? 그 말라깽이 동생?”
“그래..”
“진짜로?”
“그래. 인마..”
“히야.. 그래? 그렇게 컸어?”
서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오늘 예주 데리고 그 여자 묘에 갔다가 만났어.”
“아.. 벌써 그 날인가? 한 3주기 됐냐?”
“응.. 그래서 말인데.. 내가 보호해 줄 거야. 예주도, 은하씨도..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 가질 수 있게.. 도와 줄 거야. 그래서 너는 안 돼. 친구로서 너는 억만금을 줘도 안 아깝지만.. 은하씨를 아프게 할 거야.”
“알았다고..”
“정말 알아?”
“그래. 알아.”
서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남은 칵테일을 단 숨에 마셨다.
“유진씨랑 닮았더라. 네가 힘들어 하는 이유를 더 확실하게 알았어.”
“그만 해.. 듣고 싶지 않아.”
연우가 피식 웃었다.
“은하씨도 그렇게 말하더라. 듣고 싶지 않다고.. 알고 싶지 않댔어. 알아서 뭐하냐고.. 그 자식이 그랬거든.. 은주씨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랑 바람피우고.. 이혼하자고 매달리고.. 싫다니까.. 손을 댔대.. 그건.. 오늘 알았다..”
연우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완을 바라보았다. 서완도 놀란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 행복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인간이.. 너무 잘 먹고, 잘 자고.. 너무 잘 살잖아..”
“연우야..”
“은하씨는 그래서 싫대. 유진씨.. 그리고 한율이..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 않대.. 가정이 있는 남자가 절대로 싫은 건.. 다 그 자식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맞지 않냐? 가정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들었다.. 내가 마음 접을게. 다시는 그 아가씨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완아..”
“응?”
“미안하다..”
“네가 뭐가 미안해..”
“나 힘들 땐.. 네가 큰 힘이 되어주었는데.. 네가 힘들 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별 소릴 다한다. 네 말이 맞는 거야. 가정이 있으면.. 그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야. 아무리.. 그 여자를 닮았다고 해도.. 정말 그 여자는 아니니까.. 그만 해야지. 이러다가는 정말 병원에 다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
다..”
“미안해..”
“그만 해.. 괜찮아. 늘 그렇듯.. 난 괜찮을 거야.”
서완이 손을 들어 바텐더에게 독한 칵테일을 주문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0.08 15:2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0.08 16:31
첫댓글 보는 내내 가슴이 막 저며오는데요..ㅠ.ㅠ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이런. . ㅠㅠ 행복으로 가는 길이니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