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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30일(화)
* 시작 기도
(수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주님...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 두 명이 여리고 성 초입에 있는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리고 왕이 정탐꾼 소식을 듣고 라합의 집을 수색하였습니다.
하지만 라합의 기지로 그 정탐꾼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가나안의 원주민이요 여리고성의 주민인 라합으로서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육신의 나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두 정탐꾼이 말한 대로 그녀의 온 가족을 집에 모으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이 붉은 줄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어린 양의 피를 예표합니다.
하여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로 인함입니다.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살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순간순간 나를 넘어지게 하는 나의 의 곧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지금 우기여서 매일 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로 인하여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나훔 3:12-19
제목 : 앗수르 왕이여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희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 나의 묵상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해서 계속하여 멸망을 선포한다.
그들의 때가 다 된 것이 마치 처음 익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너무나 농익어서 나무를 흔들기만 하면 떨어지는 것처럼 니느웨가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장정들은 여인 같이 힘이 없고 성문들은 원수들을 위하여 활짝 열려 있으며 빗장은 풀어지다 못해 이미 불에 다 타서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 한 번 이런 위경을 피해보려고 사방으로 포위된 성 안으로 물을 길어서 들어가 보아라.
산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도 하고 진흙을 이겨서 무너진 성을 벽돌로 보수하기도 해 봐라.
그러나 네가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불이 너희 성을 삼킬 것이며 느치 떼가 와서 갉아먹는 것처럼 칼이 너희를 다 넘어뜨릴 것이다.
어디 한 번 느치 떼와 같이 많게 해봐라.
메뚜기 떼같이 너희들의 힘으로 강하게 해 보거라.
네가 아무리 장사꾼들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너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다 갉아먹은 느치 떼가 날개를 펴서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고 너희의 관리들이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 울타리에 앉아 있다가 해가 뜨면 날아가 버려서 그 자리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앗수르 왕아, 네 통치자들은 잠들었고 너희 귀족들은 지쳐서 누워 쉬고 있으며 너희 백성들은 산에 다 흩어졌는데 그들을 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네 상처가 너무 깊은데 그것을 과연 누가 고칠 수 있겠느냐?
오히려 너의 이런 처참한 소식을 듣는 자들이 다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너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훔 선지자를 통하여 니느웨가 완전히 멸망 할 것에 대해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에서 100여 년 전 요나 선지자가 회개를 촉구하며 복음을 전할 때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 심지어 짐승들까지 금식을 하면서 조복을 입고 회개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의 긍휼이 니느웨 성에 임했던 것처럼 앗수르가 전 민족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지라도 그들 중에서 나훔 선지자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영혼이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훔 선지자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난 이후 약 50여 년이 지났을 때 앗수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나훔 선지자의 예언의 메시지가 딱 들어맞았다는데 그 초점이 맞춰지지만 적어도 그들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멸망되기 50여 년 전에, 나훔 선지자가 그들에게 전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이들은 그것을 가슴 깊이 새겨듣기보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는 아직 앗수르가 세계의 패권을 쥐고 뒤흔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강한 힘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메뚜기 떼로 묘사하고 있다.
메뚜기 떼가 넓은 밭에 앉으면 불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개를 펴서 날아가는데 그 뒤를 보면 밭은 완전 초토화가 되어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순간이다.
오늘 본문은 나훔 선지자가 앗수르를 향하여 심판을 선포하고 실제로 앗수르가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50여 년의 간격이 있다.
앗수르는 그들의 영화가 아마도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만에 그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마태복음 24-25장에서 친히 종말에 되어 질 일들과 그 징조들 그리고 그 비유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이 외에도 성경 곳곳에서 종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고 있다.
마 24장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와서 자칭 그리스도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곳곳에 지진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단다.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예수 믿는 자들을 넘겨주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넘길 것이다.
종말이 되면 될수록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게 된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불법은 더욱 성할 것이며 사람들의 사랑은 식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인데 구원을 얻게 하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반드시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그제야 세상의 마지막 곧 종말이 올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마 25장에서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의 면면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열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뉜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했고 미련한 처녀들은 등만 준비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등에 있는 기름으로 불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랑이 오는 것이 늦어지는데 문제가 있다.
신랑을 기다리면서 열 처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는데 밤늦게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에는 이미 불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의 등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등은 준비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는 복음의 차원으로 보면 등 곧 빛은 말씀이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말씀 앞에 나아가도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요 6:63) 살리는 것(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따라서 아무리 말씀 앞에 나아갈지라도 성령과 함께가 아니면 그것은 결코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복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복음 또한 야곱의 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도 복음이 아닐 수 있다.
그저 그 말씀을 나 중심적으로 적용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다.
2달란트와 5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을 잘 알아서 그 돈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겼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긴 액수가 아니라 그것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장사란 다름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이다.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 주인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래서 그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는 철저히 주인을 오해하였다.
게다가 주인과 교제를 하지 않았기에 주인의 뜻을 알 턱이 없다.
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주인을 생각하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주인과 깊은 교제가 없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이렇다.
인자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셨다.
양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면서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받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영접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양들이 주님께 묻는다.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신 것을 보고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언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혔나이까?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한편 염소들에게는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리실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주님께 묻는다.
언제 우리가 주님이 주리신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헐벗으신 것으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다.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오른편의 양들을 의인이라 하시고, 왼편의 염소들을 악인이라고 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작은 어린 아이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찮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일에 대하여 얼마나 열심인가?
다시 말하면 몸으로 하는 각종 봉사와 섬김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다.
그런데 정작 주님의 존재 자체이신 말씀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며 소홀히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님을 잘 섬기고 잘 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신다.
심지어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게까지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따라서 위의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주인 되신 주님과 얼마나 친밀하게 교제하며 사귐 가운데서 아느냐의 문제이다.
진짜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쉐마하는 자이다.
쉐마란 그저 귀로만 듣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반석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집을 짓는 자를 말한다.
이는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이 있는 자야말로 주님을 아는 자요 그런 자가 진심으로 주님과 친밀한 자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하는 척, 시늉은 낼 수 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는 무익하다.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날 주님과의 친밀함이란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몸으로 때우는 것만도 아니다.
그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진짜 친밀함이요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이며 영생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나는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였다.
마음으로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자부하였고, 몸으로는 그 열심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정작 주님을 모르는 자였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을 알지 못했기에 주님의 뜻을 오해했으며 이 땅에서 주의 자녀들이 육신적으로 잘 되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믿어서 이 땅에서 잘 되려고 갖은 몸부림을 쳐왔었다.
그것이 곧 열심인 줄로 알았고 주님의 뜻인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런 나는 주의 심판을 받고 복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제는 그 무엇보다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더 가까이 함께 하여 친밀감을 유지한다.
물론 나 중심적인 묵상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묵상이기에 그 안에 늘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에 생명이 있다.
그 생명으로 오늘도 살아가는 나이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한 죽은 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일어나는 징조를 보면 정말 종말의 시대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진의 안전지대로 여겼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남미에 있는 베네수엘라 역시 요 며칠 새 지진으로 인하여 수천명이 죽고 실종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또한 여기저기서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영혼을 도둑질하는 도적과 강도가 아닌가?
내가 바로 그런 자였음을 고백하며 이제는 도둑이 아닌 그들의 영혼을 지켜주는 영혼지킴이로 살아간다.
(계 18:12-13)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마지막 종말의 때에 주님과 함께 말씀과 성령으로 날마다 교제하며 사귀는 이 자리, 바로 여기에 주의 영광이 임한다.
오늘도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여 넘어지지만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 안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 나의 연약함을 보지 않고 나를 일으키시는 주의 손을 잡고 아버지 품으로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훔 선지자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앗수르 백성들은 비웃고 조롱하며 코웃음을 치다가 결국 50여 년이 채 못되어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임을 절감하나이다.
노아 시대요, 앗수르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나이다.
아니 그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음은 그 완악함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 일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육신으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려 했던 중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심판하셔서 내 주변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내가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면 나를 통하여 주의 복음이 증거될 것이오니 나를 주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오늘도 오직 주를 드러내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