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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1898년)
흥선대원군은 용맹하고 과감하며 번개처럼 빠르고 변통에 능했으니, 실로 정치사상 대혁명가라 할 수 있다. - 박은식
조선 말기의 왕족, 정치가. 휘는 이하응(李昰應).본관은 전주,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남연군의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 조선조에 대원군으로 기록된 인물이 총 4명인데, 이중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대원군이 되었다. 게다가 대원군의 지위를 받은 사람 중에선 유일하게 섭정까지 했기 때문인지, 그냥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에 대원왕으로 추존되고 헌의(獻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정식 시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덩달아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 민씨도 함께 추숭되어, 부대부인 민씨의 정식 시호는 순목대원왕비(純穆大院王妃) 민씨.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풍운아이자,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 사실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도 섣불리 평가를 하기 매우 복잡한 인물로 이 점은 아들도 마찬가지다. 이 문서에도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서술되어 있다. 엇갈리는 평가야 어쨌든 인생역정 자체는 대단히 파란만장한데다가, 세도정치 시대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기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사건에 많이 관련된 만큼, 이런 의미로 보자면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 또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중요 역사 인물이다. 흔히 위정척사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위정척사파와는 거리가 멀다.
가족관계
본래 그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직계 왕통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기에, 남연군과 그의 아들 흥인군, 흥선군 모두 명예직이나마 고위 벼슬을 지내며 조정의 예우를 받았다. 그런데 효종의 남자 후손들은 헌종이 즉위할 당시에 이미 많지 않아 절손 위기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그나마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다른 인조 아들의 후손들 중에서 왕위 계승 후보가 나올 수 있었고, 정치적 문제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여기서 사실상 제외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직계 왕통이 단절된다면 실제 혈통으로는 인조 아들(효종의 사실상 유일한 남동생 인평대군)의 후손이면서 은신군의 후사가 된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왕이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지라 간혹 이 집안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흥선군의 장남은 흥친왕 이재면, 그사이에 서자 완은군 이재선이 있고, 차남이 다름 아닌 고종이다.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군의 아들과 손자들은 왕의 생가 친척인 덕분에 대부분이 출세했다. 대놓고 왕실만 뽑아주는 특별 과거를 열어서 다 합격시켜버렸고, 이 사람들은 당연히 흥선대원군파로 활동했다. 해당 항목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고종과 그의 일족들의 관계는 정말 끝장나게 안 좋았다. 대원군이 훗날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언급된 이재면은 소극적 친일, 이준용은 적극적 친일파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
다만 흥선군은 형제들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그중에서 유독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외가도 처가도 사돈도 모두 여흥 민씨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는 흥선 대원군 어머니의 조카뻘이 되고(정확히는 13촌) 며느리, 즉 명성황후는 부대부인 민씨의 동생 뻘(12촌)이며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의 조카뻘(13촌) 된다.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 원장이 그의 외외증손자가 된다. 이종찬의 어머니인 조계진의 어머니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인 전주 이씨였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평가
중전 민씨와 아들 고종이 평가가 상당히 박한 데 비해, 흥선대원군은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도 나오는 편. 그러나 당백전의 간행과 경복궁 중건이라는 국가 경제를 파탄 낸 정책, 그리고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 통상수교거부 정책으로 비판도 굉장히 많이 받는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는 이전부터 의견이 있었고, 사창제의 실시와 의정부, 삼군부의 설치는 과거에 있었던 제도를 다시 쓴 것 뿐이기도 하므로, '흥선대원군만이 펼친 개혁'은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 면이나 주위 국가와의 상황, 기득권층의 입장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개혁들을 하지 못했던 것들이 세계 역사에서 하나둘이 아니다. 흥선 대원군만의 개혁이 없다고 할지라도, 앞서서 나왔던 제도를 수렴하고 잘못된 관제를 바꾼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강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특히 호포 법과 서원 철폐는 그와 관련된 폐해가 오래전부터 지적됐음에도, 조선 후기 200여 년간 세금 더 내기 싫어한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한 법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
그런 점이 아니더라도 그를 비판하는 세력도 많다. 더군다나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쳐 외국과의 수교를 거부한 탓에, 결국 조선이 열강들에 휘둘리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비판 의견도 강하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수교와 개방을 하기에는 너무 조선이 뒤처져 있어 쇄국 정세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꾀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오늘날 후진국들이 불안한 국내사정과 부족한 생산시설, 외부의 영향에 견디기에는 작은 시장 등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개방하다가, 식민지 시절과 다름없을 정도로 착취당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외국과 통상을 하려면 통상하다가 종속되어 먹혀 버리지는 않을 만큼은 준비해야 한다는 것.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교류는 나라의 부가 빨려나가며 사다리 걷어차기에 당할 뿐이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이득이 없다면 끈질기게 통상을 요구했을 리도 없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그걸 노리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수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리고 통상수교를 거부한 것은 대원군이 꼭 수구꼴통이어서가 아니다. 통상하고자 하는 외국 세력이 온갖 무례한 행동을 도발하여 서양인들은 믿어서는 안 되는 종족이라는 생각이 대원군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원래 이양선이 출몰했을 때 조선은 군자의 나라답게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이나 물품을 제공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제네를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등을 통해 그들이 먼저 도발하고 무례하게 행동하자 "서양인들은 예의도 없고 상종도 못 하는 놈들"이란 인식이 퍼진 것이었다.
하지만 세도정치를 종결시키고 정상적인 정치 제도와 조세 제도를 복원시켰다는 점만으로도 흥선 대원군은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받을 만하다. 국제정세에 완전히 어둡지도 않았고 또한 여론에 상관하지 않는 소신 있는 추진력은 조선 왕조 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흥선 대원군을 좋게 보는 사람이 많다. 특히 호포 법과 서원 철폐 등을 사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현한 것을 통해, 근래 개혁군주라는 평을 받는 정조보다는 흥선대원군이 더 개혁적이 아니었냐고 하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흔히 잘 알려진 집권 이후 (신)안동 김씨를 살려준 것은 그가 딱히 관대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신)안동 김씨와 정치적인 거래를 한 것도 있었고, (신)안동 김씨가 그나마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때문에,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행정에 능숙한 엘리트들도 많았다.
더욱이 대원군 자신부터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신)안동 김씨를 깡그리 없애는 것은 자신의 명분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신)안동 김씨의 행정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정치적 안배가 들어있는 조치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대원군의 집권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의 즉위는 (신)안동김씨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였고,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편에 선 것이 병자 돌림의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안동 김씨를 완전히 몰아내면 조대비의 풍양 조씨가 다시 단독 최대 파벌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풍양 조씨만 좋은 꼴이고, 조대비의 의도대로 (신)안동김씨 학살 + 고종의 왕비가 풍양 조씨가 되는 루트가 되었다면, 이건 풍양 조씨가 종친인 전주 이씨와 손잡고 세도정치를 재현하는 꼴이 될 뿐이다. 때문에 집권 직후 풍양 조씨의 대두를 막을 세력으로 (신)안동 김씨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신)안동 김씨가 그를 포함한 왕족들에게 그렇게까지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하 전의 사사는 (신)안동 김씨가 악질이거나 그 시대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원래 조선 시대 종친에 대한 전체적인 대우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주교 박해 당시에도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고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사형당하지 않았으나 하지만 부모 양쪽을 다 잃으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했는데 왜냐하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친척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
나라 바로세우기 및 왕권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사업은 후대에 있어선 분명한 업적으로 분류된다.
그 당시엔 모르겠지만 역사가 지나고 나서 봤을때 아주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들이 있는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바로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이 만든 만리장성이나 구스타프 에펠이 만든 에펠탑 전부 그 당시엔 비판을 받았었다. 하지만 역사가 흐른 지금은 그 나라의 랜드마크로서 칭송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그 복원공사가 이뤄 질 수 있는 것 또한 흥선대원군때 이뤄진 경복궁 중건 덕분이다. EBS 신병주 교수의 역사이야기 편 참조
중건하는 도중에 운이 없었는지 초기엔 신분차별없이 걷은 원납전을 통해 자금을 충족하고 부역도 신중하게 정한데다 위로금도 지급하여 순탄하게 건설되었으나 중건 시작후 1년쯤에 화재로 그동안 만들어놓은 전각과 왕릉에서 벌목해 쌓아놓은 목재가 전소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대원군이 총지휘자이었기에 완성을 위해 목재를 다시 구하고 자금을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까지 만들게된 원인이다.
다만 국가경제 사정을 봐가면서 이런 공사를 해야 했는데 당백전까지 발행해가며 이런 공사를 시도한 탓에 경복궁 재건은 결국 조선을 멸망시켜버린 토목공사가 되고 말았다.
비판
다만 이 모든 것은 문제 하나를 장점 하나로 상쇄한다는 식으로 해석했을 때 이야기다.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만 집중한 것도 있다. 단적으로 대원군은 호포제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하지만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의 왕권강화책도 사용하였다, 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경복궁을 짓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 개혁으로 인한 백성들에 대한 플러스 수치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클까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각주들이 추가되기 전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는 원납전과 당백전을 사용할 정도로 과하게 진행된 시대착오적 왕권강화책 정도가 고작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대충 이 정도로 적혀 있다. 하지만 각주에도 적힌 것처럼 경복궁 중건은 평시 조선조정 1년 예산의 12년치 분량의 자금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보다도 더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저 760만냥이라는 돈이 경복궁에 들어간 돈의 총액이 아니라,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에서 발표한 원납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성들과 양반들에게 거둬들인 돈이 720만냥, 왕실과 내하전에서 내놓은 것이 35만냥이었다. 이 760만냥이 어느 정도 거금인가 하면, 당백전을 발행하기 이전에 유통되던 조선의 공식화폐 상평통보의 총액이 약 1,000만냥이다. 상상이 가는가? 인플레이션 이전 유통화폐 총액의 3/4이 그다지 필요도 없는 랜드마크를 건립하는 토목공사에 투입되었다는 것이? 더구나 당백전과 청전으로 인한 이득, 노동력 강제동원, 무단벌채, 결두전이나 통행세 등은 모조리 제외다. 물론 이게 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연간 세입의 규모가 현물+화폐로 60만냥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이 와중에 병인양요가 터졌지만, 이건 꾸준히 진행되었다. 백성들 뿐 아니라 조선왕실도 정부고관들도 원납전이라는 형태로 돈을 내놔야 했고, 이걸로 부족해서 강제로 걷어야 했다. 호포제의 실시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며, 결두전을 포함해서 온갖 잡세가 다 등장했다. 예를 들면 사대문 밖에서 출입세를 걷고 한강에서 선세를 걷었다. 이게 고종 재위시기라고 해서 고종의 악행으로 까이고 있다.
이걸로도 부족해서 생각해낸 것이 앞서 언급된 당백전과 청전의 발행이다. 당백전은 기존의 상평통보에 비해서 6/100 정도의 악화였는데도, 2년만에 1,600만냥의 가치의 돈이 풀렸다. 이로 인한 문제는? 당시는 실질화폐의 시대이다. 명목화폐를 사용하고 싶었다면, 조선정부가 당백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야 실질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이게 아니면 조선정부가 1,000만냥 이상을 조선 전체에서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화폐 발생 초기 왜 금, 은, 구리를 필두로 한 금속이 화폐로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금속제 화폐는 내구성이 매우 높아 반영구적이기도 했지만, 화폐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기 때문에 화폐가 안정적인 신용도를 쌓을 수 있던 것이다. 당시는 신용의 시대가 아니었으며(정확히 말하면 '신용화폐의 시대') 심지어 현대에서조차 화폐 이전에 현물이 있다. 그 유명한 미국 달러조차 '브레튼우즈 체제'로 대표되는 금태환 화폐 시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미국 달러는 파운드 스털링의 따귀를 후려치고 기축 통화의 위치에 올라서는데 성공한다.
현대 신용화폐의 시대에서 화폐발행의 주체들이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화폐가 전적으로 현물과의 교환을 담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금본위제도에 의거한 금태환 화폐의 경우에는 무조건 '금'이라는 현물과의 교환이 담보되기 때문에 문제가 비교적 적다(비교적 적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용화폐가 과도발권될 경우 화폐는 신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짐바브웨 꼴이 나므로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타이밍을 열심히 재는것이다. 고도로 금융학이 발전한 현대에도 이럴진대, 근대의 물도 제대로 못 먹은 조선에서 화폐의 신용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악화(당백전)를 유통했으니 어떤 꼴이 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대원군은 당백전 유통을 위해 조정에 내는 세금도 당백전으로 내라고 명령했지만, 이게 이상하게 작용되어 지방 수령들은 상평통보나 아예 실물로만 세금을 받은 다음에, 명목가치에 해당하는 당백전으로 조정에 상납하여 수령들 배만 엄청나게 불렸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이 양화인 상평통보를 빨아들이고, 악화인 당백전의 유통비율을 높인 것이다.
더구나 기존의 상평통보의 총액은 1,000만냥 정도에 불과했으니, 인플레이션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자연스럽게 상평통보는 창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다. 그리고 2년 만에 당백전은 폐지된다. 무려 1,600만냥이 폐지되었다. 폐지된 당백전은 유통이 불가능하고, 녹이기라도 하면 국법으로 처벌되었다. 당백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호구, 빵셔틀이 된 것. 이에 구제책으로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교환비율은 당백전 1개로 상평통보 또는 청전 1냥. 그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녹였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애초에 당백전으로 돈놀이해서 번 돈이 사라지면 재정압박이 강해지지 않겠는가. 이걸 대비한 것이 앞서 언급된 청전(淸錢)이다. 애초에 청전은 각주에도 언급되었지만 밀수품이었다. 당백전이 워낙에 말도 안 되는 악화이다 보니, 그보다는 볼만한 돈으로 시선이 몰렸는데, 그것이 바로 청전이다. 청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1/3. 이것도 악화란 소리다.
이러니 상평통보가 창고 밖으로 나올 일은 여전히 없다. 애초에 당백전에 비해서 양화(良貨)란 것이지, 어차피 상평통보 대비 악화인 청전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유로 대원군 퇴임하는 그 시점까지 사용되었다. 이게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소리도 하는데, 자기나라 돈의 화폐 유통 체계를 개판으로 만들고, 밀수된 외국 화폐를 정식 유통하는 것이 무슨 놈의 안정인지도 의문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청전의 유통도 400만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되었고, 대원군의 돈놀이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청전은 경복궁 다 지은 이후에도 유통이 금지되지 않았다. 청전의 유통은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런 화폐사기극과 그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은 가혹한 조세수취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부시책을 따라서 당백전이나 청전을 사용하는 이들만 손해를 보고, 상평통보를 자기 창고에 쌓아두었던 이들은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관북지방과 영남지방에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애초에 당백전이건 청전이건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시책이 안 먹힌 것이고, 부작용이 기호지방과 특히 한양에 몰빵이 될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연 실질가치의 1/3인 악화를 유통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금을 거둬들이는 쉬운 방법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빨아들인 최대의 블랙홀인 경복궁 중건에 시대착오적 왕권강화책이란 명분은 차라리 부차적일 정도이다. 정부의 재정적 한계와 국가의 경제적 화폐적 기반을 뒤흔들 정도의 뭔가를 진행했다면, 그게 왕권강화책이건 민주주의의 상징이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재정문제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악화를 통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화폐불신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악화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후폭풍은 악화를 폐지하는 시점에서 몰아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종의 친정 초기이다. 황현은 자신의 일기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10년을 쌓아둔 재정을 고종과 명성황후가 1년만에 탕진했다고 기록하면서, 고종 부처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미 파탄지경이었던 조선 재정상황에서, 모든 자금을 빨아들인 블랙홀 경복궁 중건을 거친 대원군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재정을 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데, 이 경우의 해답은 청전과 당백전 유통의 이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환투기 수단을 폐지하고, 조선왕실이 스스로 불러온 인플레이션을 정면을 맞이하게 되는 고종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재정파탄으로 가게 된다.
우선 청전이 폐지되었으므로, 당연히 인플레이션은 정반대로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게 되고, 이 여파가 더해지면서 조선 정부는 세수확보에 발악을 하게 된다. 그런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운요호 사건 시기다. 대원군이 재정을 동원해서 강화했던 강화도 병력의 주 수입원이었던 경강수세마저 중앙정부 유지비용으로 들어가고, 강화도 병력들이 별다른 응전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황현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원군이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과정과 고종 초기에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이전 관념으로 상상해서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관념을 가진 사대부나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대원군이 돈 많은 이유야 호포제 등을 실시해서 그럴 것이고, 고종이 돈 없는 이유야 사치를 통해서 돈을 많이 써서 그렇겠거니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전 세계 어느 지식인이라 해도, 극소수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가끔 고종이 호포제를 폐지했단 말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대원군의 호포제부터 양반과 평민의 세율에 차이를 둔 불안정한 것이었거니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 고종이 그나마 안정적인 세원(稅源)인 호포법을 폐지할 리가 없다. 실제 완전 균등과세는 갑오개혁 시기에 완성되고, 그 이전은 대원군의 세수체제가 그대로 이어졌다.
대원군 실각 이후 호포제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치긴 했는데, 고종은 미친 소리 말라며 다 씹었다. 서원 철폐와 사창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박규수를 비롯한 대원군계 사람들도 중용되었다. 서원 복구 주장엔 "너네들은 서원 없으면 선현을 존경할 수 없을 정도의 놈들이니?"라고 비웃었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라고 대놓고 디스했다. 나중에는 승정원에 명령해서 개혁 철폐 관련 소는 아예 퇴짜를 놓게 했다. 고종이 대원군 반대 유림들의 말을 들어준 건 딱 하나 만동묘 복구인데, 그나마도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의식의 제관을 지방 수령에게 맡겨서 유림들이 손을 댈 여지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퇴위 이후의 활동은 흑역사에 가까운데, 정권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서 꾸준히 쿠데타 시도를 하였다. 국왕의 생부라는 점에서 재집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지만,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대리청정이 끝나게 된다면, 대원군은 물러나서 후견인으로만 존재하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대원군은 세종 초기 태종처럼 상왕에 가까운 위치에서 집권하려고 하였으니, 국왕인 고종의 측근세력과 대립한 것은 당연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왕실내부의 문제는 외국 세력들이 꾸준하게 이용하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더욱이 이때 대원군의 행보를 보면 정권 장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등, 원칙도 없고 극도로 기회주의적이었다. 강경하게 척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답지 않게 일본 세력과도 기꺼이 연계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혹심하게 탄압했던 천주교 쪽에 손을 내미는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결국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과정에서 왕족은 분열되었고, 고종에 대립했던 대원군계파는 황당하게 이후 친일로 넘어가버린다. 사실 고종의 친정 이후,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사실상 부자 관계는 남아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원수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인물됨과 일화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그 외에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두 발언이 유명하긴 하지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권력에서 물러난 후, 그가 거처한 궁이 바로 운현궁이다.
그를 부르는 호칭은 꽤 다양하다.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고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실의 호칭이 격상해서인지 (주상전하는 대군주폐하로 왕비전하는 왕후폐하로)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그를 가리켜 대원군 전하 국태공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운현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렸다.
노련한 정객답게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졌으며, 음담패설의 달인으로 좌중을 자주 웃음바다로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대원군 개인적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고. 조선 후기를 풍미한 인물답게 그 재치나 언변과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흥선대원군 일화는 거짓일화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김동인의 소설 속 창작들이 실제 일화인 것처럼 퍼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국태공의 귀환》, 《젊은 그들》의 내용을 모아놓으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긍정적인 흥선대원군 상이 거의 정립될 정도로 흥선대원군 위인전 작가들이 복붙을 해댔다. 그리고 근대화도 싫고, 명성황후가 설치는 것도 싫고, 일본은 더 싫었던 당시 양반들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밀어준 것이 대원군이라서 이쪽 관련해서 미담들을 대원군과 연관시킨 것도 많다. 결국 재미로만 보고, 실제로 이 일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일화들 속에서는 대인이나 쿨가이로 등장하거나 벼슬셔틀 올려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대원군이 젊었던 시절 기생 춘홍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군금별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이때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외상술이나 먹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뒷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러, "아직도 내 싸닥션 한번 갈겨볼 테냐?"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께서 기생의 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려 이장렴을 대접했다고.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여봐라, 금위대장 오셨으니 술상 차려라!"라고 했다고도 한다.)
•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청의 사신은 조선의 경복궁을 둘러보고, 이거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대원군에게 물었더니 대원군은 약 3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하자 청의 사신은 "이 정도 건물은 우리나라는 1년이면 뚝딱 지어낸다"며 어라? 요놈봐라? 대원군을 벙찌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청의 사신은 또 이 궁궐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는데 대원군은 1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했다. 이번에 사신이 또 "이 정도는 몇 달이면 다 짓는데 ㅋㅋㅋ"라며 이 새퀴가… 또 대원군을 열받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다다르자 사신이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이런 대답으로 사신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어? 저긴 어제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는데!"
• 전라도 영광에 살던 한 선비가 대원군에게 벼슬자리를 청하고자 운현궁을 방문했는데, 선비는 대원군을 보고 절을 올렸다. 대원군은 그냥 선비 하나가 자신에게 인사나 드리러 온 줄 알고 대충대충 대했는데, 그러자 선비는 다시 한 번 대원군에게 절을 올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을 두 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일이다. 열받은 대원군은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냐?"라고 화를 내자 선비는 천연덕스럽게 "처음 절은 인사를 올리는 절이었고, 두 번째 절은 이만 물러가겠다고 올린 절이었사옵니다"라고 받아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대원군은 이 선비에게 한 자리를 내려준 이야기는 대원군의 일화 중 유명한 편.
• 어느 날 대원군에게 한 무관이 찾아왔는데, 때마침 조 대비(신정왕후)의 친척이 찾아와 청탁을 했다. 조 대비의 친척은 대원군에게 "마침 백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니 그 자리에 저를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친척이 말한 황해도 '백천'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이라고 읽었다. 어이가 없어진 대원군이 기본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방 안에 방귀 소리가 났다. 그 방귀는 무관이 뀐 것이었는데, 무관은 자신이 뀐 줄도 모르고 친척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큰 방귀 소리를 내느냐"며 성을 냈다. 그런데 이 친척은 아무 변명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와서 식사를 들게 했는데, 친척은 또 체면치레 하느라고 좀처럼 음식을 먹지 않았고 무관은 "제가 가난하게 살아서 이런 진수성찬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러고 대원군에게 "제게 늙으신 부모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배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고 들었는데 소인을 거기 보내주시면 열심히 일하며 부모님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했다. 대원군은 이 무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힘써 주겠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조 대비의 친척이 "대원위대감,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제 밥그릇도 찾아먹지도 못하고, 방귀 뀌지 않고서도 방귀 뀐 것처럼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자네 같은 자를 군수로 쓸 수 있겠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 하루는 대원군이 별장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데, 별장 밖에서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료했던 대원군이 그 노인과 함께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종자를 시켜 그 노인을 불러오고는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저 앞에 사는 장가이며 아직 환갑은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원군이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판 두세. 바둑 둘 줄 아는가?"라고 묻자 그 노인은 둘 줄 모른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장기를 두자고 했는데도 이것도 둘 줄 모른다고 했다. 대원군이 "그렇다면 자네 고누놀이는 할 줄 아는가?"라고 묻자 이 노인은 그것도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고 만다. 싫증이 난 대원군은 결국 그 노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이 이야기가 장안에 퍼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그 노인도 참 멍청하구만. 어떻게든 대원위대감의 무료함을 풀어드렸다면 무슨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었을 텐데 말이야"
• 어떤 선비가 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운현궁을 찾았다. 그런데 이 선비가 좀 '아는 척, 잘난 척'을 했는지 대원군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원군이 문득 "자네 처가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선비는 또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문자를 써서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황씨 문중에서 아내를 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 왈, "항문이라니. 자네는 똥구멍에 장가를 들었단 말인가?" 선비는 결국 데꿀멍하고 버로우.
• 대원군이 되기 전 불우했던 시절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 집에 땔나무를 해다 준 한 나무꾼이 있었다. 이를 잊지 않던 그는 대원군이 된 후, 이 나무꾼을 운현궁 연회에 초대했는데, 조정의 고관들과 장안의 부호들까지 초대했고, 이 연회에서 자신이 상석에 앉고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나무꾼을 앉혔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그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나무를 해다 줄 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거면 고개를 저으라고 하자 나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대원군이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자네 어머니께 내 수청 좀 들게 하게"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나무꾼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고 그래도 대원군이 계속 이 청을 하자 결국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연회장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원군은 이 나무꾼을 버선발로 쫓아가며 청을 했으나 나무꾼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이 나무꾼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가져온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하인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연회석에 있던 고관들이나 부호들이 '대원위께서 저리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분명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거나 대원위의 측근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나무꾼에게 아부할 생각으로 재물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즉 대원군은 자기 재물은 한 푼도 안 쓰고 그 나무꾼에게 보답을 한 셈.
•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명당'에 자리 잡은 가야사를 불 지르고, 거기에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쓰기로 했는데, 이장하기 전 형제들 모두가 신인이 '내 본진 건드리다니 니네 다 끔살'하고 협박하는 꿈을 꿨다. 다른 형제들은 덜덜 떨었지만, 흥선군만은 '여기가 진짜 명당인가 보다! 까짓 거 한 번 죽고 말지!' 하고 흥분해(...) 이장을 고집했다. 또한 무덤 자리에 돌이 깔려있어 도끼로 찍어도 불꽃이 튈 뿐 깨지지 않았는데, 흥선군이 하늘에 대고 "나라고 왜 임금의 아비가 되지 못 한단 말인가!"하고 외치고 도끼질을 하니 그제야 돌이 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결국 화를 입게 되었는데, 명당이라고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만 그 다음 이야기는(…)
• 인왕산 인근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을 강탈(?)한 야사도 유명하다. 석파정은 본래 안동 김씨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는데, 이미 당대부터 수려한 경치와 건물로 유명했다. 이에 석파정을 가질 욕심을 가지게 된 대원군은 집권한 뒤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석파정에서 하루 기거하게 한 것이었다.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대원군에게 석파정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별장의 이름 또한 대원군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를 따서 붙였다는 이야기.
• 본인부터가 사군자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은 예술가이기도 했던 만큼 당대 문화, 예술의 애호가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대단히 좋아해서, 운현궁엔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현대의 판소리를 정립한 신재효와 그의 여제자인 진채선도 운현궁에서 소리를 기가 막히게 불러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 사진이나 그림으로 봐도 알수 있듯이 카리스마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를 한번 본 이사벨라 비숍이라는 영국인이 "표정과 생명력과 정력,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눈빛과 위엄이 넘치고 원기왕성한 제스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했을 정도.
그 외 많은 화가들도 운현궁에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남사당패까지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사당패에 '바우덕이(한자로는 김암덕金巖德)'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남사당패 꼭두쇠(남사당패 대표쯤 된다)로 5세 때부터 남사당패에 들어가 뛰어난 기예로 유명했으며, 경복궁 증건 현장에서 공연한 후 흥선대원군이 당상관 벼슬의 인물들이 쓰는 관자인 옥관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이후로도 1860년대에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쳤으나, 불행하게도 1870년에 23세로 폐병으로 요절했다.
대원군으로 실권을 잡기 직전부터 '천하장안(천희연(千喜然), 하청일(河淸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의 성을 딴 것)'이라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 것으로 유명하며, 대원군이 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의정부 경전철 흥선역은 흥선대원군의 군호인 '흥선'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역 주변에 흥선광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역 주변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직곡산장터가 있기 때문.
석파란(石坡蘭)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운 난을 잘 그렸다고 하며, 붓을 세 번 틀어 잎을 그리며 그 끝이 쥐꼬리처럼 튀는 특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이 친 난초를 따로 일컫는 말로 그의 호인 '석파'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명의 소설도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가끔씩 나온다. 물론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이걸 반영해서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은 사극이나 소설,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대원군의 필수요소. 특히 심기가 불편하면 화로에다가 잘못된 난을 불태우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특히 실각 후 청나라에 잡혀가 있을 때 난을 치며 소일했기에 청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퍼져, 청나라 사람들도 석파란을 많이 받아갔다고 한다. 의외로 진품 석파란은 중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조작이 많다고. 독립운동하시는 분들이 자금을 벌기 위해 일부러 그린 가짜(그런데 위조작 파는 화가들이 '독립운동' 운운할 수 있지 않을까?)도 있다고 한다. 이때 석파란을 위조한 사람 중에는 오세창 같은 저명인사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오세창은 자신의 그림을 추사 김정희의 것으로 위장해서 판 적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오세창의 석파란 위조설은 이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설이다. 오세창은 추사의 그림이나 글을 위조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알려졌는데, 흥선 대원군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그림의 특징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번거로워진 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석파란이라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따른 화가들인 노천 방윤명(1827~1880)이나 소호 김응원(1855~1921) 등이 친 난초고, 낙관만 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특히 방윤명에 대해서는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도 "방윤명은 난초 외에 매화도 잘 그렸으며, 묵란화가 대원군의 화법과 유사하여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오세창 역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석파노인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달라고 하면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 노천이 그 필체를 꼭 닮아 세상에서 구별할 수 없었으니, 오늘날 석파란이라 유행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응원의 경우는 출신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원군의 종자였다는 설도 있다.
인물은 인물이었는지, 당시 외국에서도 제법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선의 정치가였던 셈. 외국인들의 평가를 대충 종합해 보면, 과격, 완고, 보수적이지만, 투쟁적이고 카리스마를 갖추었으며 능력도 있었던 정치인 정도로 귀결된다.
한편 청의 실권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보고서는 임오군란(1882년)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악하다'고 했다가, 2년 뒤 갑신정변 직후에는 '조선인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만은 효웅(梟雄)이다'라거나 '그의 재기(才器)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나 외국 사신들의 기록에 의하면, 키는 작고 얼굴은 얽었으나 그 목소리나 품행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평했다.
미국인 선교사로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석파(대원군의 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아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원군이 사망하자 당시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렌은 국무장관에게 한 보고에서 대원군을 이렇게 평했다.
대원군은 잔인하고 배타적이었으나, 항상 자기 나라에 대해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들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국민 대부분은 그가 다시 권좌에 오르기 바랐습니다. 최근에 그의 부인이 사망했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의 언론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는 "강철 같은 의지와 확고한 목표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했으며, 역시 미국의 언론지인 《보스턴선데이포스트(Boston Sunday Post)》지에서는 대원군을 가리켜 "철석(鐵石) 같은 인물(Bowels of iron and heart of stone)"라고 묘사하고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원군 이하응은 10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과가 반반이었다. 갑술년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10여 년간 두문불출하는 동안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번번이 좌절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여서 이름이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조야가 그를 대로(大老: 나라의 원로, 큰 어르신)로 의지했다. 그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다 슬퍼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원군을 대혁명가라고 매우 고평가했다.
확실히 여러 기록으로 미뤄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 '운현대감'은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