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빨갱이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문재인은 어제 열린 3‧1절 기념사에서
‘빨갱이란 표현은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 잔재’라며 친북좌파를 공격하는 우익인사들을 싸잡아 친
일분자로 몰아붙였다. 빨갱이라는 아픈 지적에서 벗어나 노골적으로 좌경화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인
다. 1953년생인 문재인은 잘 모르겠지만, 빨갱이라는 용어는 6‧25전쟁으로 65만 명의 민‧관‧군이 죽은
데 대한 국민적 반감과 증오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말이다. 거기 왜 친일이 들어가는가? 대
통령은 분열된 국론을 다독거려 국민통합을 이끌어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다. 가뜩이
나 3‧1절에도 광화문 일대에서는 국민이 태극기집회파와 촛불집회파로 갈라져 따로 기념식을 열었
다. 이런 마당에 대통령이란 자까지 나서서 노골적으로 친북좌파를 두둔하니 나라 장래가 암담하기
만 하다. 문재인이 애국적 우익인사들에게 아무리 공각협박을 가해도 빨갱이는 빨갱이고 친일은 친
일이다. -
이국종의 아버지는 6‧25전쟁 상이군인이었다. 전쟁 직후 거리에는 상이군인들이 넘쳐났다. 정부는 그
들을 외면했고 정치인들은 그들을 득표에 이용했으며, 국민들은 그들을 외다리‧외팔이‧외눈박이라고
놀려댔다. 차라리 전사자가 낫다고 할 정도로 이 나라는 정부고 국민들이고 몸 바쳐 나라를 지킨 상
이군인들에 대한 고마움은커녕 대놓고 홀대하고 핍박했다.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이 이러할진대, 또
다시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누가 6‧25 때처럼 목숨 바쳐 나라와 국민들을 지키고자 하겠는가?
이국종은 문밖출입을 꺼리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버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의 아버지는 나
라 구한 죄 외에는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한동안 죄인처럼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며 지냈다.
어느 명절대목이었다. 어린 이국종은 어머니를 따라 동사무소로 갔다. 상이군인에게 주는 밀가루 한
포대를 타기 위해서였다. 밀가루 포대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는 그만 포대를 떨어뜨
리고 말았다. 포대가 갈려져 밀가루가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흙
과 뒤섞이지 않은 밀가루를 성한 포대에 조심스럽게 쓸어 담으면서 소리 죽여 서럽게 울었다.
1980년대 초,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지역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기 전이라 당장 직장
의료보험 혜택을 받던 가족의 치료비가 걱정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어딜 다녀오더니 노란색 의료보
호카드를 내밀었다. 상이군인에게 주는 의료혜택이었다. 그러나 의료보호카드를 받고 무료치료를 해
주는 의료기관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 병에 걸리면 먼 곳까지 찾아가야 했다. 그러고도 온갖 눈총을
받아가며 일반환자에 비해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국종은 의료보호카드를 들고 지정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은 일
반환자와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해주었다. 이국종이 한 간호원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이 카드를 가져온 환자들도 똑같이 대해주나요?”
“당연한 거 아니야? 학생이 치료나 잘 받지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쓰니?”
이국종은 간호원의 대꾸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간호원은 꾸며서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모든 환자
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원의 모든 의사나 간호원들이 마찬가지였다. 그 병원 외
과의사 김학산은 이국종과 친분이 쌓이자 용돈을 주기도 했다. 이국종은 의사나 간호원이 다른 사람
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이국종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활은
순조로웠다.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은 넘쳐났지만, 이국종은 피나는 노력 끝에
모든 과목에서 높은 학점을 받았다. 종합평가도 거뜬히 통과하고 임상 기초과목과 임상의학 과목까
지 무사히 이수했다. 그러나 본과 3학년이 되어 실습을 나가야 할 시점에 이국종 인생에 가장 큰 위기
가 닥쳐왔다. 집안이 각중에 풍비박산이 나는 바람에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의과대
학 등록금은 아르바이트로 충당할 정도를 넘었고, 당시에는 학자금 대출 같은 사회적 안전장치도 마
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국종은 난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방법으로 군문을 택했다.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갑판수병으로 배
속되었다. 이국종은 경기함에서 함상훈련을 받았다. 경기함은 미국이 이차대전 때 쓰다가 퇴역시켰
던 구축함이었다. 그러나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는 게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낡을 대로 낡은 배였다. 5
인치 함포를 발사할 때마다 선체 전체에서 녹 가루가 우수수 부서져 내리고 전등이 깨졌다. 이음매가
다 떨어져 비가 오면 물이 줄줄 새서 배 안에 홍수가 나기도 했다. 이것이 1980년대 대한민국 해군 전
력의 실상이었다. 그나마 미국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이런 구축함 7척 덕분에 헬리콥터가 뜨고 내리
며 해상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의 군인정신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전 장병이 해
군은 제한된 상황에서도 낡은 장비와 부족한 보급을 탓하지 않는다며 실천으로 ‘이순신 정신’의 전범
을 보여주었다. 해군에게 바다는 항상 전장이자 사지였다. 이국종은 이 단순하고도 순결한 군인세계
가 너무나 흡족하여 스스로 그 속으로 몰두해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이국종은 동료들은 물론 장교들
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국종이 외상외과 의사가 된 뒤 해군이 그
를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명예소령‧명예중령에 임명하는 것도 모두가 이때 형성된 상호 신뢰와 애정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함상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경기함의 모든 장병들이 이국종을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드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훌륭한 의사가 되라며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격려해주었다. 선임 상사
가 해군본부로 전출 가는 날, 이국종은 진해까지 따라가서 그를 전송하고 돌아왔다. 그는 월남전 참
전용사로서 부상을 입은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40년 가까이 계속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해군
에서 함정 기관계통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 상사는 3개월 만에 경기함으로 복귀했다. 배가 흔들릴 때
마다 월남전 때 다친 무릎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해군본부의 책상물림은 자기 자리가 아니라면서 전
함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라. 그러나 거기에도 원칙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이를테면 환
자를 치료할 때 의사마다 각각 자기의 원칙 같은 거. 내가 이번에 해군본부에 가서 절실하게 느꼈어.
내가 현장에서 겪은 함선의 운영 문제라든지 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본부에서는 아는 사람
이 아무도 없더군. 나도 기관계통에는 도사지만 행정 문제에는 문외한이라 아무 쓸모도 없더라고. 그
래서 육체적으로는 고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왔어. 네가 있을 곳도 여기가 아니야.
꼭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서 네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서 해. 그런 일이 반
드시 있을거야.”
사진을 찍을 때만 이국종을 부르고 정작 중증외상 환자 치료문제에는 관심도 없다.
그 해군상사가 일부러 불러서 들려준 이 말은 이국종이 ‘나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대 후 이국종은 함께 아주대 의대에 진학한 절친한 고등학교 동기의 도움
으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군상사의 간곡한 조언대로 이땅에서 이국종 아니
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중증외상센터의 지킴이가 되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중학입학을 한 손녀의 사진이 카톡방으로 보내 왔는데 단정한 교복 차림 이어서 또다른 느낌 이었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규율과 일관된 질서를 배우는 외관의 갖춤 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릴적 교복은 무조건 커서 입기가 거북 하였는데 키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성장을 감안한 오래 입기의 철칙을 알리 없는 요즈음 아이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