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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26년도 상반기를 지내고 하반기를 맞는 7월의 첫날입니다.
이방 여인 가나안 사람 라합을 통하여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신 주님은 이방인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을 통해서도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수 2:11b)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왕하 5:17)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과연 주님은 온 천하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롬 9:5).
그러나 가장 낮고 천한 이 죄인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으며 내 마음대로 주장하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는 주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죽음의 자리, 진노의 자리, 진멸의 자리만이 내게 가장 합당한 자리임을 압니다.
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나에게 긍휼을 베푸사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손톱 밑의 때만큼이라도 좋사오니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07:1-22
제목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 나의 묵상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 외에 무엇이 있으랴?
감사는 곧 그분의 선하심과 영원하신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이런 감사와 찬양을 올려야 하지만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받은 이들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대적 중의 대적인 마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어느 한 곳에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있는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모아주신 것이다.
이들의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읍을 찾지 못하여 주리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근심 가운데 빠져 있던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거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다.
죽기에만 합당한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은 목이 말라 물을 사모하는 영혼에게 생명의 물을 만족하게 주시고 배가 고파 주린 자에게 가장 좋은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4절에 광야 사막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장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찾지 못하면 육신적으로 고달프고 영혼이 피곤한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다.
왜냐하면 ‘광야’라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이다.
광야라는 ‘미드바르’는 말씀이라는 ‘다바르’에 접두어 ‘미’가 붙은 형태이다.
이는 광야를 살아가는 자의 양식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목이 마르고 주리게 되는 이유는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얻어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얻어먹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 외에 다른 그 무엇 곧 something으로 그 공허한 심령을 채우려고 하니까 주리고 목이 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제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른 길을 주신다.
여기서 바른 길이란 곧 복음이며 복음은 곧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얻어먹는 자들은 결국 거할 성읍 곧 아버지 집에 들어가게 된다.
아버지 집은 곧 만물 위, 창세전의 세계이며 생명이 풍성한 곳이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곳이 쉐키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이다.
본문 8절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먹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 거할 성읍 곧 생명의 꼴이 풍성한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은 더 원할 것이 없고 목마름이 없는 곳이다(요 4:14).
요한복음에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모습과 동일한 여인이 한 사람 나온다.
그는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이다.
수가성 여인은 목이 말라서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하여 날마다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오는 여인이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신적 의지를 가지고 일부러 유다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지나가신다.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 수가성에 오신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서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을 기다리신다.
때가 낮 12시가 되어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한다.
그 이유는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면서 여인은 예수님에게 야곱의 우물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
그런데 그녀가 자랑하는 야곱의 우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주리고 목이 마른 상황과 똑같다.
이들은 ‘다바르’ 곧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쳐두고 다른 그 무엇(something)을 구하여 그것으로 목마름을 해갈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광야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읍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마른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가성 여인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엉뚱한 야곱의 우물만 길어다 마시니 잠시는 해갈이 되는 것 같으나 또 다시 목이 마르고 그래서 또 물을 길러 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가 길어 마시는 야곱의 우물이란 그동안 교회를 통하여 내려온 강고한 신앙의 전통과 유산들이다.
그것이 교회의 신앙 프로그램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설교일 수 있으며 선한 일일 수도 있다.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이 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의 말이 옳다고 하신다.
(요 4:17-1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기에 나오는 남편도 야곱의 우물과 마찬가지로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섯이나 두면서 남편을 바꿔가면서 살아온 여인이다.
우리는 외견상 이것만 보고 수가성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현상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사실과 진리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이 옳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두 차원으로 해석하신다.
사실은(the fact) 그녀에게 남편이 여섯이 있지만, 진리 안에서는(in the truth) 남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수가성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기다리는 여인이었다.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수가성 여인이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라고 하신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제 이 수가성 여인은 자신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을 마시는 여인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긴가민가하면서 잘 알지 못하였다.
그저 예수님께서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 물을 달라고 하면서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에 물을 길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고 한다(15절).
그런데 남편의 사건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서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이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때(시간)으로 옮겨가신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오늘날 보통 예배라 하면 주일에 공동체로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생각한다.
물론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예배는 자칫 잘못하면 수가성 여인이 날마다 길어 마셨던 야곱의 우물이 될 성향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교회가 크고 예배의 세션들이 잘 디자인 된 교회일수록 예배가 감동적이고 성도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눈물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가 목사님의 감동적인 설교가 어우러지면 그날 예배는 아마도 눈물 바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정말 은혜를 받았노라고 하면서 입이 닳도록 예배를 칭찬하고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런 예배를 꿈꾸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
물론 모든 예배가 이렇게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아무리 주일에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가 이런 은혜 충만, 감동 충만한 예배일지라도 일주일간 날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지 않고서 주일날 감동적인 찬양과 강단의 설교로 은혜받았다는 것은 그저 내가 그 예배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서서 예배를 잘 감상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에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만 강조하면 이것이 또 하나의 야곱의 우물이 되고 남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중요한 말씀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은 바로 지금 곧 이 때에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형식과 순서를 갖춘 그런 예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새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그 말씀을 날마다 얻어먹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 백성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누구에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내주(內住)하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수준에 맞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말씀 앞에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말씀이 어렵다고만 핑계하면 그는 영적으로 배가 고파서 주리고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고통 가운데 방황하며 거할 성읍인 창세전 나라 곧 아버지의 품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헤맬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말씀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진리를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야곱의 우물을 전전하고 이 남편 저 남편 바꿔가면서 나의 남편 삼았는지 모른다.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바꿔가면서 나와 교회의 목마름을 채웠고 이 사역, 저 사역에 온 몸을 던져 일을 하면서 사역을 남편 삼았었다.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애쓴 나에게 잠시는 해갈되는 것 같았으나 이내 다시 목이 마르고 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국 땅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의 것은 아무리 멋지고 화려해 보여도 한계가 있으며 한시적이다.
금방 충만해졌는가 하면 이내 다시 시들해져버리고 마는 풀이나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그런 나에게 복음이 들어왔고 이 복음은 곧 생명의 양식이 되어 나를 위에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음임을 알고 오늘도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이야 누구나 한 번 오는 것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다.
이게 정말 무서운 것 아닌가?
우리의 거듭남은 오직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아 눈에 보이는 것, 금방 있다가 사라질 그 무엇으로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매일 주시는 양식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연약한지도 모른 채 나 잘난 맛으로 살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 안에 나의 의로 가득 채우며 만족감으로 충족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알고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신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입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뜻을 알았으니 주의 말씀을 홀로 얻어먹는 자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는 이들이 진실로 주님을 아는 은혜를 허락하시고 말씀으로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주님을 아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그 은혜가 더욱 충만하여 주님께만 영광돌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