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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사의법(四依法)속에서 우리를 가르치고 이끄셨습니다.
첫째는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依法不依人)
둘째는 “뜻에 의지하되 말에 의지하지 말고” (依義不依語)
셋째는 “지혜에 의지하되 식에 의지하지 말며”(依智不依識)
넷째는 “바른 뜻을 담은 경전에 의지하되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말라(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요의경에 의지하되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 하셨습니다.
즉, 법에 의지하고 뜻에 의지하고 지혜에 의지하고 요의경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현대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다양한 경계속에서 살다보니 분별망상이 치성하여 말꼬리(부분)에 집착해서 전체 문맥속에서 드러난 본의를 파악하기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입체적으로 전방위에서 보아야만 하는데 각도 1도의 극히 제한된 시각에서 본 것을 전체 모습의 코끼리로 착각하고 있는 꼴입니다.
경전속에 드러난 부처님의 본회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특히 정토종의 종지를 파악하기는 정말 어려워 2,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성도문적인 정토문으로 해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석존께서 팔정도의 자력문과 특별한 뜻이 있는 홍원의 불력문을 설하셨는데, 자력문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불력문을 해석하는 오류를 아직까지도 범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범주인데 같은 범주로 인식하는 오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도대사께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오셔서 1,380여년전에 그동안의 관경에 대한 고금의 오류를 바로잡아 관경소를 지으셔서 석존의 본회와 아미타불의 본원을 진리 그대로 드러내셨는데 지금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단절과 중생의 생로병사로 인한다고 볼 수 있겠으나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고 안목의 지평을 넓혀 고찰해 본다면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이후 법연상인,혜정법사,정전법사께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진리 그대로 드러내어 중생들에게 진실한 이익을 주고 있으나 정토문을 수행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옛날의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으니 아미타불의 화신이신 선도대사님께서 극락에서 통곡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견해로 인해 나도 그르치고 내 아닌 또다른 나인 남도 그르쳐서 윤회의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이하는 정전법사님 법문입니다.
석존께서 관경에서 13정관을 설하시고, 3복9구품을 설하셨다. 그러나 「관불」은 자력난행의 길이어서 아미타불의 본원이 아니거나와 석존의 본회도 아니며, 시방중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욱이 아니지만, 「염불」은 타력이행의 길이므로 아미타불의 본원이자 석존의 본회이며, 시방중생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관경』의 <유통분>에서 석존께서는 요문의 법을 부촉하지 않으시고 염불의 법을 부촉하신 것이다. 석존께서는 ‘관불을 폐지하고 염불을 세우시면서(廢觀立念)’(요문을 폐지하고 홍원을 세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말을 잘 간직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간직한다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는 것이니라."
정토문을 배우는 사람은 보살의 불상응교법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약에 기타 다른 지견과 다른 관점으로 우리의 정토법문을 장애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즉, 오직 부처님의 말씀만 믿을 뿐, 보살의 불상응不相應교법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 사람이 보살일지라도 그가 설한 것이 만약에 정토법문과 어긋난다면 전부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일반인들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분은 보살이신데 어떻게 감히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것은 고승대덕들이 설한 것인데, 그분들의 수행은 아주 뛰어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 분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어떻게 해야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을 아실 겁니다.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지만 마음이 산란하다면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다.” 이 말은 옳은 걸까요? 이 말을 누가 하신 겁니까? 우리는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이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다. 염불을 하더라도 반드시 왕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신은 청정해야 하고 당신에게는 공부(염불실력)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가지고 정토를 설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명나라 때 선종의 고승이신 감산대사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선종을 배우던 분이셨기에 선종의 교리에 입각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종은 당연히 수행을 중시하고 능력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선종의 교리로써 정토법문을 설한다면 반드시 어긋나고 막힌 부분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종은 자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각도에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토종은 불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토법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을 마치 어명처럼 받들면서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염불인들이 이 말에 흔들려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라면 아직 목이 터지도록 부르지 못한 우리같은 많은 사람들은 더더욱 헛수고를 하는 것이고, 왕생은 더욱 가망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이 두 구절 말씀의 앞에는 또 두 구절이 있는데,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사구게로 되어있습니다. ‘염불하기는 쉬워도 신심내기 어렵고, 마음과 입이 한결같이 않으면 전부 부질없어라.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지만 마음이 산란하면, 목 터져라 부른다 해도 역시 헛수고라네.’ 염불은 아주 쉬워서 누구라도 부를 수 있지만 염불에 대해 신심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만약에 당신의 신심이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바로 뒤의 문제점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입이 한결같지 않으면 전부 부질없으라’는 말은 당신이 겉으로는 염불을 하고 있어도 마음속으로 의심을 하고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며, 왕생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여법하지 못하고 정토법문과 거리가 있는 부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염불하는 사람이 아미타불조차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염불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미타불을 의심하여 ‘나는 왕생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염불이 바로 마음과 입이 한결같지 않고 안과 밖이 똑같지 않은 것이지요. 진실로 아미타불을 믿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상황하에서는 부득이하게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 정말로 목이 터져라 불렀다면 그 사람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러한 부처님의 명호에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음을 설명해주므로 그 사람은 헛수고가 아닙니다. 이 말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에 염불을 하여 목이 터지신 분이 계십니까?
우리에게 만약 지혜의 안목이 없고 정토법문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하면 쉽게 휘둘려서 각종 설법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다른 이해와 다른 수행, 다른 배움과 다른 견해別解別行、異學異解’들입니다. 이는 정토법문과 상응하지 않는 다른 법문들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정토법문을 배우고 있는데, 만약에 이처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면 차라리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석가모니불의 말씀만을 믿을 뿐, 이런 관점들은 한 쪽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보살이 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잠시 보류를 시켜야 합니다. 각도와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정토종의 조사들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불상응교법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보살이 설한 것이 만약 정토법문과 어긋난다면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부처님만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법의 의미를 모르는데 어떡합니까?” 정토종의 조사 가운데 우리는 선도대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미타불께서 다시 오신 것이며, 종토종의 개종조사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신심을 일으킬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법의 뜻을 알 수 없겠지만 우리는 선지식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선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법을 배우는데, 특히 정토종은 겉으로는 누구나 다 염불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만약에 선지식의 지도가 없다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 덩어리들을 풀지 못한다면, 우리는 들은 게 많을수록 의문은 더 많아지게 되며, 마음속에 얽혀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는 전정으로 정토의 법의法義에 대해 비교적 통달한 사람이 필요한데, 선지식이 우리를 인도해주셔야만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임종하는 사람,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관경』의 하품하생에서 설하시길, 그 사람은 오역과 십악의 죄를 지은 사람인데 임종 시에 선지식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선지식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광대사님은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런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염불하라고 권장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식이라고요.
정토종의 선지식과 다른 법문에서 말하는 선지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법문에서 말하는 선지식은 몇 가지 점을 중시합니다. 첫째, 이론적으로 통달해야 합니다. 둘째, 수행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야 합니다. 심지어 선종같은 경우에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밀종에서는 열 가지 공덕과 이익을 갖춰야만 선지식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종에서는 선지식의 기준이 다릅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장하고 사람들에게 왕생의 신심만 줄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이 바로 선지식이라는 겁니다.
현실 생활에서 보더라도 사람들을 염불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들의 왕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예컨대 조념을 해주시는 사람들은 타인의 왕생을 도울 수 있습니다. 조념을 해주는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일반인들이며 정토법문을 배우고 염불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들도 사실은 진정으로 성취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번뇌가 있고 우리일반인들처럼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서방으로 왕생할 수 있도록 성취시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선지식이라 불리게 됩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에서 선지식에 대한 기준은 우리 개개인의 수행의 각도에 서서 말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염불로 인도할 수 있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아미타불을 믿게 하여 그 사람을 성취시켜 주는 이런 인연이 바로 선지식입니다.
설사 당신이 보살일지라도 만약에 한 사람의 왕생도 성취시킬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정토문의 선지식이 아닙니다. 다른 종파에서 선지식이라 불리는 사람들, 예컨대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해줄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선종의 선지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정토법문을 설하는데 정토의 교의와 어긋난다면, 그렇다면 정토종의 선지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법문의 차이를 분명히 분별하는 데는 그 기준이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물론 법과 법은 서로 상통하고 서로 평등하여 모두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원칙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법과 법이 상통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면에서 상통하는 지를 봐야 합니다. 귀결점이 상통하고 결과가 상통하겠지만 방법상에 있어서는 엄연히 다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전부 똑같고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법의法義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무엇 때문에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셨겠습니까? 이는 법문이 다르고 응하는 근기가 다르며 시작하는 방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토법문은 그중에 가장 뛰어난 방편입니다. 우익대사께서 하신 세 구절 말씀이 있는데, 정토종은 ‘방편 중의 제일방편이요, 요의 중에 무상요의요, 원돈 중에 가장 지극한 원돈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정토법문은 가장 편리한 법문이어서 누구나 염불할 수 있고, 또 가장 요의了義여서 의리義理적으로 가장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불법에는 요의了義과 불요의不了義가 있습니다. 요의란 뜻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원만하며 가장 투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법들은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소승불법 가운데 그들은 중생들은 성불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아라한의 과위밖에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석가모니불만 믿을 뿐, 시방제불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요의고 불완전한 교법입니다.
정토법문은 모든 구경법究竟法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고, 원돈법문 가운데 가장 원만하고 가장 빠른 법문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오직 부처님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다른 관점들은 듣게 된다면 스스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정전스님 법문]
●의리義理의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조사님의 해석은 요의에 의거하되 불요의에 의거하지 않고(依了義不依不了義), 지혜에 의거하되 알음알이에 의거하지 않습니다(依智不依識). 우리는 알음알이에 의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문구에 막힐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뜻에 의거한다”고 말할까요? 다음 몇 구절 경문을 들어보겠습니다.
예컨대 61쪽에, “내가 부처가 되면 국토가 으뜸이 되고 대중들은 걸출하게 훌륭하며 도량은 가장 수승하오리. 이 나라는 열반과 같아서 세상에서 둘도 없으며 모든 중생 가엾이 여겨 내가 마땅히 제도하리라(令我作佛,國土第一,其眾奇妙,道場超絕。國如泥洹,而無等雙。我當湣哀,度脫一切)”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단어들을 한번 보십시오. “국토가 으뜸이 되고 대중들은 걸출하게 훌륭하며 도량은 가장 수승하오리.” 만약 이러한 국토가 열반계가 아니고 열반계보다 조금 못하다면 그럼 따로 열반계가 있겠습니까? 가장 뛰어나고 으뜸이며, 둘도 없는 극락세계조차 조금 부족하다면 그럼 보토가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이 나라는 열반과 같다(國如泥洹)”고 하셨지 “버금간다(次)”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교증입니다.
73쪽, “닦은 불국토는 한량없이 넓고 뛰어나게 수승하며 홀로 미묘하고, (所修佛國,開廓廣大,超勝獨妙)”, 일체 제불국토를 초월하고 보다 수승하며, 유독 극락정토가 가장 절묘하다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건립한 국토는 영원하여 쇠퇴하거나 변하지도 아니한다(建立常然,無衰無變)”, 이게 열반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열반이 곧 불생불멸입니다. [정전스님 법문]
●불교는 신이니 절대자니 자아니 마음이니 하는 존재나 관념의 속박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고 해탈을 지향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해탈하신 부처님께서도 의지처가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고백하셨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에 과연 나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를 두고 이렇게 진지하게 사유하셨다.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우루웰라 경, A4:21) 정등각을 성취한 자신이 의지할 존재가 어디에도 없음을 꿰뚫어보신 세존께서는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라”(A4:21)라고 결론지으셨다.
그리고 “법을 의지하여 머물리라”는 이러한 부처님의 태도는 부처님이 전법과 교화를 하신 45년 내내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대반열반경, D16)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첫 번째 유훈도 바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D16)이라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에게 “비구들은 법을 의지처로 한다”(M109)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반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지금에 사는 우리 불자들이 뼈가 시리고 가슴이 사무치게 의지하고 존중하면서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법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법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이기도 하며, 동시에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부터 법은 참으로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온(五蘊)으로서의 법이며,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12처(處)요,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18계(界)라는 법이다. 윤회와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하신 법은 12연기이며, 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법칙으로서의 법은 조건(緣, 24연 혹은 6인-4연-5과)이다. 중생을 타락하게 하는 10불선업도는 해로운 법(不善法)이며, 향상하게 하는 10선업도는 유익한 법(善法)이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로서의 법은 사성제이고,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의 법은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 助道品)이며 그 핵심은 팔정도이다.[각묵스님 법문]
●대반열반경』에서 '네 가지 위대한 교설이라는 타이틀로 설해진 법문은 바로 이에 따른 佛說의 眞僞와 取捨에 관한 규정이다. 즉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혹은 율장에 밝은) 장로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경과 율과 論母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律에 나타나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非佛說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佛說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4依의 순서는 諸經論에 따라 다르다. 하카마야 노리야끼(袴谷憲昭)는 대승 諸經에서 설해진 4依를 설해진 순서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
고 있다. A형=法,了義經,智(『유가론』, 『대승장엄경론』). B형=義·智·
了義經·法(『유마경』, 『옥녀소문경』, C형=法·義·智.了義經(『대지도론』, 『열반경』,D형=
중현 또한 세친이 제기한 '아비달마=비불설론을 비판하면서 논거로 제시된 經을 의지로 삼는 이가 되어야 한다. (玄裝 역어는 當依經量)는 대반열반경의 말을 4依와 관련시켜 “여기서 ''은 다만 협의의 經이 아닌 아비달마를 포함한 여래의 일체 聖敎를 총괄하는 말"이라고 논의하였다. 즉 의지해야 할 것이 다만 經뿐이라면 4依(法·義·了義經‧智=慧)를 설할 필요가 없으며, 法·義·智의 세 의지처는 了義經 하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실론』등의 諸論에서도 '위대한 교설'의 법문을 4依와 관련지어 하나의 교리체계로 논의하고 있다. 즉 성실론』 제16 四法品에서는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을 드러내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위대한 교설에서의 말을 “경(修多羅)에 포함되어 있는지 法相에 위배되지 않는지 율(比尼)에 隨順하는 것인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말로 설하고서, “여기서 '경'은 了義經, '요의경'은 그 뜻(義趣)이 法相(진실)에 어긋나지 않는 경을 말하며, '法相'은 律에 隨順하는 것. 律은 번뇌의 滅로서 번뇌는 곧 유위법이 무상,고 · 공 · 무아임을 通達할 때 끊어지기 때문에 불타는 '法에 의지하고 了義經에 의지하고, 뜻(義)에 의지하고 통달의 智에 의지해야 한다'고 설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위대한 교설'의 법문과 관련되어 어느 시기 4依의 체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經(sūtra)을 의지로 삼고 사람(pudgala)을 의지로 삼지 말라" 에서의 經을 이것의 다른 명칭인 '法'(或諸契經名爲達磨)으로 설정하고 이를 다시 뜻(義, 所詮의 법)과 뜻을 드러내는 말(語, 能詮의 법)로 갈래짓고, 뜻을 다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了義)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不了義)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뜻 또한 그에 대한 이해를 무분별의 통달직관(智)과 언어적,분별적 인식으로 갈래지어 마침내 "法(dharma)에 의지하고 사람(pudgala)에 의지하지 말 것이며, 뜻에 의지하고 말(語,文)에 의지하지 말 것이며, 經에 의지하고 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 것이며, 智에 의지하고 識에 의지하지 말라" 는 4依의 정형구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등현스님 법문]
●오직 부처님 말씀만 따라야 하는 이유
또한, 모든 행자가 이 경에 의지하여 깊이 믿고 수행할 수만 있다면 절대 중생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대비를 만족하신 사람인 까닭이요, 진실한 말씀만 하시는 까닭이다.
부처님 이하는 지혜와 수행이 원만하지 못하고 아직 배우는 단계에 있어 번뇌와 습기를 제거하지 못했고, 과덕과 대원이 원만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범부와 성인이 설령 제불의 가르침의 뜻을 헤아린다고 해도 확실하게 분명히 알 수는 없고, 비록 논평이 있다고 해도 부처님께서 증명해주셔야 확정할 수 있다. 만약 부처님 뜻에 부합한다면 곧 “이와 같다(사실에 부합한다). 이와 같다.”라고 인가해주고, 만약 부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곧 “너희들이 한 말은 그 뜻이 이와 같지 않다.”라고 말해 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가해주지 않았으면 곧 무기(無記), 무리(無利), 무익(無益)한 말과 같고, 부처님께서 인가했으면 바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수순함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곧 바른 교법(正敎), 바른 뜻(正義), 바른 행(正行), 바른 해석(正解), 바른 업(正業), 바른 지혜(正智)이며, 많든 적든 모두 보살이나 인천 등에게 물어서 옳고 그름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곧 요의교(了義敎)이고, 보살 등이 설한 것은 전부 불요의교(不了義敎)이니, 마땅히 알라.
그런 까닭에 이제 왕생에 인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러러 권하오니, 오직 부처님 말씀만 깊이 믿고 집중하여 받들어 실천해야지, 보살 등의 불상응교不相应教를 신용함으로써 의심과 장애가 생겨 의혹을 품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왕생의 큰 이익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또한, 깊은 마음으로 깊이 믿음이란, 결정코 자기 마음(결정코 왕생하는 신심)을 건립하고 교법에 따라 수행하며 영원히 의심과 잘못(疑錯)을 없애고 일체 별해(別解), 별행(別行), 이학(異學), 이견(異見), 이집(異執)으로 인해 퇴실하거나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정전스님 법문]
●사람이 능히 한량없는 힘과 공덕을 갖춘 이 부처님을 염할 수 있다면
즉시 필정에 들어가리니, 그런 까닭에 나도 항상 염하느니라.
人能念是佛,無量力功德,
即時入必定,是故我常念。
‘사람이 능히 한량없는 힘과 공덕을 갖춘 이 부처님을 염할 수 있다면’: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으니, 현장대사가 변역한 『칭찬정토불섭수경』에서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명호”라고 설한 바와 같다.
‘즉시 필정에 든다’: 위에서 해석한 ‘평생업성, 현생불퇴’의 뜻과 같다.
‘그런 까닭에 나도 항상 염한다’: ‘그런 까닭에 항상 마땅히 억념해야 하느니라’의 뜻이다. 다시 말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라’는 것이다.
이 게송은 정토종의 심수心髓이자 용수보살의 심성心聲이다. 보살은 스스로 고백하여 말하기를 “염불만 하면 즉시 필정에 들게 되니, 쉬운 행으로 빠르게 이르는 수행은 이것만한 게 없다. 그런 까닭에 나 용수도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억념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게송은 거의 『대경』의 ‘본원성취게’와 같은 효용을 지니고 있다. 성취게에서 말씀하시길 “그 부처님의 본원력으로 이름 듣고 왕생하고자 하면 모두 저 나라에 왕생하여 저절로 불퇴전을 이루게 되리”라고 하였다.
‘본원취의문’은 『이행품』의 골수와 핵심이자 귀취이며, 『이행품』의 목적은 이 아미타불의 본원을 설하는 데 있다. 이행 가운데 가장 지극한 이행이며, 방편 중에 으뜸가는 방편이다. 이 방편은 과정이 아니고 방편설이 아니며 불요의不了義가 아닌 곧장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자 용수보살의 사상이 원숙한 곳이며, 또한 보살이 일생 동안 스스로 실천하고 남을 교화하는 귀취와 목적이기도 하다.[정전스님 법문]
● “요의 가운데 위없는 요의이다(了義中無上了義)”, 이것은 교법의 측면에서 말한 것인데, 모든 경전의 가르침에는 요의와 불요의의 구분이 있습니다. 예컨대 오계의 법문과 십선을 비교한다면 오계는 불요의이고 십선은 요의입니다. 십선과 사성제를 비교한다면 (십선은 여기서 당연히 색계와 무색계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음) 십선은 불요의이고 사성제는 요의입니다. 하지만 사성제를 가지고 십이연기와 비교한다면 사성제는 불요의이고 십이연기는 요의이며, 십이연기를 가지고 육바라밀과 비교한다면 십이연기는 불요의이고 육바라밀은 요의입니다. 육바라밀을 이 미타명호와 비교한다면 육바라밀은 불요의이고 미타명호는 요의입니다. 따라서 우익대사께서 여기서 “요의 가운데 위없는 요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성제가 요의이고, 십이연기도 요의이고, 육바라밀도 요의인 이유는 이런 수행을 통해 삼계의 육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의 경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위가 있는 것이지 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정전스님 법문]
어렸을 때 전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죽음의 이별로 오는 공포를 느끼고,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꿈꾸었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심신이 지칠때로 지쳐있는데 불보살님과 선지직님들의 가피로 극락정토를 만나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진정한 유토피아인 극락성에 이를 수 있음에 진실한 안심을 얻고 한걸음 한걸음 나무아미타불 염불속에서 열반성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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